황제의 변덕에 더는 휩쓸리고 싶지 않다.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굴다가도 순식간에 돌변해 차디찬 경멸을 내보이는 그 시선을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어울려주어야 한단 말인가. 프리아는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프리아 님이 날로 야위어가고 있다. 유디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식사량도 부쩍 줄어들어 주방에서 무슨 일이냐며 먼저 물어왔을 정도였다. 떨어진 입맛을 북돋아준다며 주방장이 고심해 준비한 특별식들 역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 그리하셨다고?”
유디스의 물음에 침실 정리를 담당하는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 프리아 님의 침실에서 부쩍 젖은 빨래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무엇을 쏟아 더럽히셨다 하더라도 그저 벗어두면 그만이다. 스스로 벗을 필요조차 없었다. 옷시중을 드는 시녀가 언제나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손수 세탁을 하시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에 프리아 님의 시중을 들러 갔을 때 전날 입혀드린 침의와는 다른 것을 입고 계신 경우가 많아 유디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하녀가 하는 말이 어찌 이리 피 묻은 빨래가 자주 나오나며 후궁께서 혹 크게 다치신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었다 합니다.”
“피 묻은 빨래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유디스 역시 아침 시중을 들 때 가끔 젖은 침의가 대야에 담겨 있는 걸 보긴 했지만 핏자국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겉으로는 다 빠진 것 같아 보이지만 자기 눈에는 다 보인대요. 여인들이야 달거리를 하니 그런 빨래가 나올 만도 하지만 후궁께선 사내이시니까요.”
후궁의 몸에 외상이 없다는 것은 매일 옷시중을 드는 유디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상처에서 나오는 피도 아니라 하면 대체. 영문을 몰라 하는 유디스의 머릿속으로 지난번 태의가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코피를 쏟으시거나 갑자기 정신을 잃으시는 일은 없느냐?’
프리아 님이 코피를 흘리셨다면. 그것도 젖은 빨래가 이리 나올 정도로 자주 흘리셨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낱 시녀에 불과한 유디스에게 일반 궁중의가 아닌 태의를 불러올 권한은 없었다. 몸의 이상을 확실히 확인한 후에 시종장에게 여쭈어야 할 것이다.
“유디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왜 자꾸 쳐다봐?”
기어코 책 한 권을 다 읽어 낸 프리아가 수석 시녀의 태도를 지적했다. 유디스가 프리아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시선이었던지라 거슬렸던 것이다. 오전 내내 뚫어져라 프리아를 관찰하던 유디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프리아 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몸 상태가 안 좋으신 거죠?”
유디스의 질문에 놀란 표정으로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유디스에게 들킬 만한 행동을 했던가. 식사량이 적다고 잔소리하더니 넘겨짚는 것일까.
“아니, 괜찮아. 저번에 비 맞아서 감기 걸렸던 것도 다 나았잖아?”
“기침만 하지 않으시지 아직 열도 있으시고 식사도 계속 남기시잖아요.”
“입맛이 없어서 그래. 환절기라서.”
속이 뒤집어져 구토가 잦아진 까닭에 무언가를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변명하듯 말하는 프리아를 보며 유디스가 한숨을 쉬었다.
“주방에서도, 빨래하는 하녀들까지도 다 프리아 님을 걱정해요. 몸이 좋지 않으신 거라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조용히 유디스의 말을 듣고 있던 올가와 이사벨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티가 나는 걸까. 프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가 거울 속에서 프리아를 마주보고 있다. 사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와 입술과 턱을 적시는 광경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프리아 님!”
소리치며 달려온 유디스가 손수건을 꺼내 프리아의 얼굴에 갖다 댔다. 흰 천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해!”
고작 코피 한 번에 호들갑을 떠는 유디스를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피곤해서 그래. 놀랄 일 아니야.”
“어떻게 놀랄 일이 아니에요? 처음이 아니시잖아요. 지금까지 이걸 감추시려고 침의를 갈아입으셨던 거예요?”
“아니야. 그건 땀이 나서 그런 거야.”
붉게 변한 손수건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며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프리아를 바라보며 유디스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어쩐지 백조궁으로 옮기게 된 후부터 자꾸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다.
가장 총애받는 후궁이 쓰던 곳이기도 했지만 이곳에 들어와 죽어나간 여인도 많아 단명하는 궁으로 불리기도 했다던 소문이 유디스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실제로는 다른 후궁들의 미움을 받아 독살되거나 싫증을 낸 황제의 변심에 충격을 받아 자살한 주인이 존재해 따라오게 된 소문이었다.
“벌써 다 멎었어. 유디스, 나 세수할래.”
더는 피가 나오지 않는 얼굴을 들어 보이며 프리아가 잡고 있던 손수건을 앞에 있던 벽난로 속으로 던졌다.
“……어쩐지 손수건이 자꾸 없어진다 했어요. 손수건은 버리셔도 되지만 저에게 말은 해 주셨어야죠.”
궁에서는 흔한 물건이긴 했으나 레이스를 두른 고급 손수건은 서민들 사이에선 사치품에 속했다. 잘못하면 애꿎은 하녀들이 도난해간 것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한숨을 쉬는 유디스의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버릇처럼 벽난로 속에 손수건을 던져 버린 것을 프리아가 뒤늦게 깨달았다.
“아, 미안.”
“프리아 님이 왜 사과를 하세요. 손수건은 얼마든지 버리셔도 괜찮아요. 다만 몸이 안 좋으시면 숨기지 말고 저희에게 말씀해 주세요.”
말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앞으로 더욱 몸 상태가 악화되어 갈 터인데 언제고 드러날 일이긴 했다. 그래도 숨길 수 있을 만큼은 숨기고 싶다. 사내 후궁의 시녀가 되어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럴게. 그런데 나 진짜 괜찮아.”
“태의께 한번 봐 달라고 해야겠어요. 프리아 님이 불렀다고 하면 오실 거예요.”
“싫어.”
태의를 부르는 문제로 한참 실랑이가 이어지던 내실로 갑자기 시녀 아이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같은 지역 출신이라 유디스를 언니처럼 따르던 신입 아이였다.
“유디스 님! 큰일 났어요!”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시녀 아이의 말에 내실의 소란이 멈췄다. 모두가 주목하던 아이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
“폐하께서! 페하께서! 오늘 장미궁에 가셨다고 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의 말에 놀란 유디스가 반문했다. 황제가 프리아가 아닌 다른 후궁의 처소를 찾다니. 즉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미 들어가신 지 한참 되었다고! 궁에 소문이 다 났대요!”
뭘 그렇게 유난이야. 황제가 후궁전에 갈 수도 있는 거지. 잠시 놀랐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이사벨이 중얼거렸다. 사내 후궁이 총애를 잃기 시작한 걸까. 그렇다면 더는 이곳에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안 돼.”
곁에 서 있던 올가에게서 들려온 말에 이사벨이 기가 차 입을 벌렸다. 유디스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여자까지 왜 사내 후궁에게 충성하지 못해 안달이 났단 말인가. 이 지긋지긋한 시녀 노릇도 그만 둘 때가 된 모양이었다.
아.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프리아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방울 더 떨어진다. 뭐라고 하는 거지? 사람들의 말소리가 멀어지고 비릿한 피 냄새만이 숨결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코피가 또 나는구나.
후두둑. 핏방울의 지름이 넓어졌다. 유디스에게 말해야지.
“유디…….”
천장이 이상하게 멀어지며 달려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하늘이 핑그르르 돌았다.
* * *
“알훼니아에서 오셨다고?”
“그렇습니다.”
“그쪽 얼굴이 아닌데. 귀화라도 하셨소?”
증명서에 무슨 조작의 증거라도 있는 것처럼 빤히 들여다보던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검은 머리에 밤색 눈동자를 한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제국 태생입니다. 고향에는 오랜만에 오는군요.”
“아, 어쩐지. 낯이 자꾸 익어서 이상하다 생각했지 뭐요. 얼마만의 귀향이시오?”
“30년도 넘었습니다만 제국은 예전 그대로군요.”
“어렸을 때 나가셨나 보구만. 그런데도 기억이 나시오?”
알훼니아 대공의 직인이 찍힌 신분증명서에 도장을 찍으며 관리가 부쩍 친밀한 표정을 지었다. 유달리 애국심이 강한 그는 수십 년간 고향을 잊지 않았다는 사내의 말에 가슴을 활짝 펼쳐들었다.
“기억력은 매우 좋습니다.”
“궁이야 그대로겠지만 사람들은 다 바뀌었지. 황제도 바뀌었다오.”
“소식은 들었습니다.”
“새파랗게 젊지. 인물도 아주 훤칠해.”
“그렇습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땐 좀 이상해. 고우신 공녀님들을 제쳐두고 사내 후궁만 끼고 돈다지 뭔가. 사내로 태어나 어디 그게 할 짓이던가. 어느 공국에서 왔다더라……. 알젠토였던가, 모스라티아였던가. 뭐 얼굴은 예쁘다던데. 그래도 나 같으면 안 그래. 여인이 백번 낫지.”
황궁을 오가는 이들은 대부분 정문인 남문을 통과하고 상인들은 서문과 동문을 이용하기 마련이었다. 후미진 곳에 있어 출입하는 이가 없던 까닭에 매일 경비병을 제외하고는 만날 사람이 없던 관리가 묵혀놓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30년 전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이끼 낀 북문의 벽을 그리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기르가 맞장구를 쳤다.
“확실히 얼굴은 예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