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87)화 (88/237)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오웬이 내실 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책을 노려보았다. 두께와 장정이 다양한 그 책들은 오웬이 기사 영웅담을 좋아하는 후궁에게 주기 위해 특별히 지시를 내려 구해온 것이었다. 아직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것들이라 장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만 나가주세요. 앞으로는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지도 않으셨으면 해요.’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나가달라 요구하던 후궁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오웬은 분노에 휩싸여 손을 탁자 위로 가져갔다. 거친 손길에 밀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책들이 둔탁한 소음을 낸다. 검토 중인 서류 또한 뒤따라 바닥으로 안착한다. 사기로 만든 물병이 떨어져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고 새어나온 물로 인해 책과 서류가 젖어들었다.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보는 오웬의 표정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장난감을 내던지며 떼를 쓰다 형에게 크게 혼난 후로는 다시는 사물에 화풀이를 하지 않았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오웬은 의자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자신이 먼저 후궁에게 선을 긋고자 했고 후궁역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겠다 말했다. 결과적으로 잘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달라진 후궁의 태도에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뭘 원했던 거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반기고 웃어주며 스스럼없이 몸을 내어주기를 바랐던 건가. 마치 선황의 후궁들처럼.

아니다. 사내 후궁이 선황의 후궁들처럼 행동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와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다. 그의 이야기 또한 자신에게 들려주기를 바랐다. 함께 이야기하고 같은 길을 걷고 차를 나눠 마시며 가끔은 자신이 치는 장난에 토라지다가도 다시  웃으며 그 맑은 눈동자로 올려다봐주기를 바랐다. 다락방에서 함께 보냈던 그 시절들처럼.

후궁의 태도가 변했다. 후궁을 처음 안기 시작했던 그때처럼 색사 외에 그 어떤 감정교류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버렸다. 바랐던 결과가 아닌가. 왜 동요하지? 왜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이제 저를 싫어하지 않으세요?’

그 물음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차라리 후궁이 자신을 좋아한다 직접 고백했더라면 이미 알고 있었노라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호오를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고백보다 더 간절한 마음의 표현. 오웬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든 물음이었다.

자신의 마음은 그와 같을 수 없다. 같아서는 안 된다.

인형처럼 후궁을 예뻐한 선황과 사내첩에 미쳐 모든 걸 저버린 황태자.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 제 마음이 부친처럼 깊지도 않거니와 자신의 의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전자여야 했다. 자신이 어찌 그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날이 밝자 황제의 내실로 시종장이 올라왔다. 엉망이 된 방안을 보고 크게 놀랐으나 침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황제 자신이 어지른 결과임을 곧 깨닫고 조용히 청소를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잠이 든 젊은 황제의 얼굴 위로 수심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아버지!”

장미궁의 주인 로제타가 환한 얼굴로 별궁의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수석 시녀 리엔의 뒤를 따라 걸어내려오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에도 간만에 화색이 돌았다. 로제타의 모친인 대공 부인이 어릴 적부터 유모로 일했던 그녀는 친손녀와도 같은 공녀와 떨어질 수 없어 연로한 나이에도 함께 본궁으로 왔던 것이었다.

“아버지, 언질도 아니 주시고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셨어요? 어머니나 오라버니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죠?”

부친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기뻐하다가도 가족 걱정에 금세 흐려지는 로제타의 얼굴을 대공이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간 서신은 자주 주고 받았지만 대공이 직접 딸이 지내는 별궁은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보지 못한 사이에 부쩍 성숙해진 딸이 손수 차를 내려 아버지를 대접했다.

“무슨 일이 있을 까닭이 있겠느냐. 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너 또한 그간 별고는 없었느냐.”

“보시는 것처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함께 오시지 그러셨어요?”

대공 부인을 떠올리는 로제타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제국에 간다는 자신의 말에 아내는 동행하겠다 했지만 일의 사안이 중대하니만큼 혼자 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함께 또 오마. 네가 이리 무사히 잘 지낸다고 전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혈통과 외모, 품성까지 온 나라에 소문이 자자했던 로제타를 후궁으로 보낸 일을 두고 대공 부인은 아직까지 남편을 원망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가 어디가 부족해서 후궁전까지 가서 독수공방을 하고 있냐며 날이면 날마다 눈물바람이었다. 딸을 후궁으로 보내 지금보다 더한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은 없었다. 마땅히 제국에 충성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제 딸이 해가 지나도록 황제와 마주하는 일 없이 꽃다운 나이를 보내고 있다는 소식에 대공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국에 반기를 들 생각은 결코 없으나 자신의 도움으로 딸이 행복을 누릴 수만 있게 된다면 무엇이든 내놓을 각오가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딸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는 대공의 말에 시중들던 시녀들과 유모까지 자리를 비웠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유모와 사촌 리엔 앞에서까지 감춰야할 이야기라니 무엇일까. 로제타의 얼굴 위로 긴장이 드리웠다.

“국경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 폐하께서도 이 문제로 인해 며칠째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중이신 걸로 안다.”

힐데룬의 대공은 새로 등극한 왕에게 막내딸을 후궁으로 보냈다. 일종의 균형 맞추기라며 느물스럽게 웃어보이던 그와 자신은 생각이 매우 달랐다.

긴장된 얼굴로 그간의 사정을 듣고 있던 로제타는 이어진 대공의 말에 크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스문드 군력의 상당령을 황제에게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네 오라비들과도 이미 합의한 내용이다. 걱정 하지 않아도 돼.”

“어째서 그렇게까지…. 저 때문인가요?”

아무리 아스문드가 제국의 우방국이라지만 이렇게 큰 희생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공국의 의무라 한들 적당한 숫자의 병력과 물자를 제공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제국에 대한 부친의 충성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규모였다.

“자세한 건 후에 폐하를 뵙고 말씀드리마. 그러나 내가 먼저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우선 폐하를 뵙고 먼저 말씀드리도록 해.”

황제가 후궁전의 여러 공녀들을 외면한 채 사내 후궁만을 티 나도록 총애하는 이유야 뻔했다. 즉위 초의 힘겨루기. 황제가 진정으로 그 사내를 총애하건 총애하지 않건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황제가 보란 듯이 사내 후궁을 끼고 돌아도, 여러 공국을 저울질한다 해도 대공은 자신이 있었다. 후손을 생산할 수 없는 사내 따위는 진정으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어차피 황후는 자신의 딸 로제타가 될 것이다. 꼭 자신의 딸이라서가 아니다. 그 어떤 수학자가 계산한다 하여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제국에 가장 큰 안정과 이익을 가져다줄 황후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반대해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부친을 바라보며 로제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황제의 관심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동안 자신의 자존심과 싸우며 빈 찻잔만을 노려보던 로제타가 자신의 수석시녀를 호출했다.

“리엔, 폐하에게 알현을 청하도록 해.”

아스문드 대공이 입궁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장미궁은 오늘 황제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응접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프리아에게 유디스가 말을 걸었다.

“프리아 님, 국경에 무슨 큰 일이 벌어졌다는 것 같아요. 폐하께서도 요즘 그 문제로 대신들과 회의하시느라 엄청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그래?”

유디스가 고심 끝에 꺼낸 말이었으나 프리아는 짧은 대답만을 할 뿐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디스의 머릿속은 뻔했다. 황제가 다시 발을 끊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굴렸을 테지. 그리고 수소문해 알아낸 정보를 통해 그 이유를 국경 상황 때문이라 결론 내렸을 것이다.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게 된 이유 또한 황제가 오지 않기 때문이라 짐작하고 나름대로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일 것이다.

황제가 요즘 오지 않는 이유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언제고 마음 내키는 대로 또 다시 들이닥칠테니. 기분이 상한 까닭일까. 전처럼 비밀통로를 통해 밤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