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86)화 (87/237)

자정을 넘겨 이어지던 회의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힘든 하루였다. 시종장의 옷시중을 받는 오웬의 얼굴 위로 짙은 피로가 서렸다. 백조궁에 다녀왔다며 후궁의 상태를 전하는 시종장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시종장이 밤인사와 함께 물러났다. 물을 먹은 솜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무겁다. 침대에 누워 바라본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켰다.

‘무사히 열도 내리고 저녁 식사도 마치셨다 합니다. 안색이 창백해보이시기는 했지만 푹 주무시고 나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래, 그냥 몸이 약한 탓이겠지. 태의 역시 큰 이상은 없어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웬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의 피로와 반비례하는 것처럼 정신은 오히려 또렸해졌다. 다시 쳐다본 시계의 시침은 숫자 3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대로는 아침까지 꼬박 날을 새울 판이다. 오웬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차라리 지금 찾아가 후궁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상념을 떨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가서 무사히 잠이 든 모습만 보고 올 것이다. 몸을 움직여 더 피곤하게 만든다면 한두 시간은 무사히 눈을 붙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며칠 새 부쩍 기온이 낮아졌다. 잠옷 위로 걸친 로브 한 장으로는 새벽의 한기를 떨쳐낼 수 없었다. 돌아갈까. 걸어가 제 눈으로 후궁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의식 없이 늘어진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걸음마다 교차했다. 흔들리는 등불빛으로 밤벌레가 수없이 날아들다. 이미 걸어온 길과 남은 길을 헤아리던 오웬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문을 열고 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장작을 품은 벽난로의 열기가 차갑게 식었던 몸으로 후끈 끼쳐들었다. 침대가 놓인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오웬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 섰다. 후궁이 아직 잠들지 않고 깨어 오웬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오셨습니까.”

후궁이 먼저 입을 열었으나 오웬은 몸 상태를 묻는 사소한 안부인사 조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대답이 없는 오웬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후궁이 손을 들어 잠옷의 단추를 벗기 시작했다.

“……뭘 하는 거지?”

드디어 입 밖으로 나온 황제의 말을 들은 후궁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벌어진 잠옷 사이로 오웬이 남겼던 흔적이 내려다보인다. 흰 피부 위로 남은 붉은 자국을 바라보며 오웬은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제 소임을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밤늦게 후궁의 침실을 찾은 황제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하나뿐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몸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는 것처럼 후궁이 스스로 남은 옷을 마저 벗었다. 멈춘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오웬에게로 나신의 후궁이 걸어왔다. 황제의 옷을 벗기기 위해 다가온 손을 오웬이 잡아 제지했다.

“그만둬. 아픈 몸을 안는 취미는 없어.”

오웬의 말을 들은 후궁이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러면 입으로 해 드릴까요?”

감정 없는 눈동자로 자신의 중심을 내려다보며 후궁이 하는 말에 오웬의 입에서 기가 찬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제게 원하고 만족하시는 것이 이런 것들 아닙니까?”

“나는…….”

이러려던 것이 아니야. 나는 단지. 단지…….

일그러진 오웬의 표정을 바라보던 프리아가 지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어제 그만큼 받아줬으면 되었지 새벽부터 찾아와 또 트집이라니.

“폐하께서 말씀하신 제 효용입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돌아가 주세요.”

뭐?

돌아가라는 프리아의 말을 들은 오웬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 이상 저와 폐하 사이에 다른 용건이 있을 리가요. 혹시 어제 일이 과하다 생각해서 찾아오신 거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다만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장소만은 고려해 주세요.”

“뭐라고?”

“폐하께선 절 취하실 권리가 있죠. 그 권리를 행사하시길 원하신다면 언제든 응해드리겠지만 다른 것은 저 또한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고장난 시계처럼 움직임을 멈춘 오웬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말을 이었다.

“절 취하려고 오신 게 아니라면 이만 나가주세요. 여긴 제 처소고 사적인 공간입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비밀통로로 불쑥 찾아오시지도 않으셨으면 해요. 정식으로 방문해 주셨으면 합니다.”

후궁이 하는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으나 오웬은 자신도 이해 못 할 충격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후궁와 선을 긋기로 먼저 결심한 것은 그였으나 이러한 반응이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적인 공간이라고?”

“하긴 폐하께서 내려주신 공간이긴 하죠.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제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비궁이 아닌 다른 곳도 괜찮습니다.”

어디든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황제의 분노를 사 유폐궁으로 쫓겨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어제 일을 빌미삼아 시위하려는 거라면 여기까지만 해.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더는 받아줄 수 없어.”

화가 나서 하는 투정일 것이다, 자신은 후궁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지만 후궁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오웬이 프리아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프리아는 그런 오웬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더 꺼내놓았다.

“제가 왜 화가 났다고 생각하세요?”

“어제 너를 마음대로 안았다고 하여 화가 난 것이겠지.”

왜 사람 말을 알아듣지를 못 해. 다시 한숨을 쉰 프리아가 어린 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폐하의 권리를 행하시는 일에 저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여러 번 제가 거부한 적이 있어 그리 생각하셨나 봅니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어요.”

“왜?”

자신도 모르게 오웬의 입이 의문의 말을 꺼내놓았다. 절박하게 매달리는 오웬의 질문이 이해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프리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폐하와의 잠자리에 만족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시겠다 하셨고 저와 공국의 안위까지 보장해 주셨으니까.”

결과가 중요한 일에 왜 이유를 묻는 것일까.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던 황제가 이제와 이유를 따져묻는 모순을 프리아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이 또 불만이었을까.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린 황제가 등을 돌려 프리아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평소보다 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는 침대 위에 올려두었던 잠옷을 집어 다시 몸에 걸쳤다.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알고 보면 그렇게 상냥하고 다정하며 마음이 여릴 수가 없다는 시종장의 주장처럼 황제는 자신의 몸 상태가 신경이 쓰여 이 새벽에 방문한 것일 테다. 그러나 그런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저 잠깐의 마음씀일 뿐 다시 내쳐질 것인데.

그새 잠깐 나신으로 서 있었다고 다시 한기가 들었다. 터져나오는 기침에 위에서 역류해온 핏물이 섞여들었다. 피가 묻은 손수건은 유디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어서 태워야했다.

프리아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숨을 천천히 내쉬며 뒤집힌 속이 다시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낮보다는 기온이 더욱 떨어지는 밤에 잦은 발작이 일어난다. 시녀들의 눈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다른 한 명의 눈 또한 피해야만 했다.

황제가 화가 나 발길을 끊어도 좋고 궁에서 나가라 해도 좋았다. 어디든 좋았다. 황제가 어느 때고 예고 없이 자신의 일상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이 백조궁만 아니라면.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해?’

언젠가 물었던 질문에 기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명쾌한 답을 들려주었다.

‘어떻게 하긴요. 그냥 좋아해야죠. 감정을 지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누굴 좋아하게 되어서 심장이 막 쿵쾅쿵쾅거리다가 터져 버리면 어쩌지?’

‘심장이 터져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감정이 요동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병이 악화되기는 하겠지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해서 늘 즐거운 일만 생긴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세상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법이니까요.’

‘좋아하는 사람과 있으면 매일매일 즐거운 일만 일어나지 않을까?’

‘그럴 리가요. 즐거운 날도 있겠지만 슬픈 날도 있을 것이고 크게 화가 나거나 속상해 눈물 나는 날도 있을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인데 왜 화를 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좋아하는 만큼 그 사람이 날 좋아해 주지 않아서? 그래서 화가 나나 보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만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서도 다툼은 많이 벌어집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같아도 다른 면에서는 마음이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상대방을 좋아한다고 상대가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죠. 존중이 필요합니다.’

‘어렵다. 안 싸우면 좋을 텐데.’

‘맞아요. 어려운 일입니다. 프리아는 가능한 그런 고통을 겪지 말았으면 좋겠지만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제게 꼭 알려 주십시오. 한번 좋아진 마음은 바뀌기 어려우니 이 기르가 가능한 너무 힘들지 않게 도와드릴 수밖에요.’

‘정말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게 돼?’

‘정말 좋아하게 된다면 모를 수가 없을 겁니다. 약 많이 드실 각오만 하세요.’

‘어떻게 아는데? 가르쳐 줘!’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자신이 힘들더라도 상대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죠.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욱 생각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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