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프리아 님께 돌아가신 아서 저하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세상 어느 형제자매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두 분은 정말이지 참으로 우애가 각별한 형제셨습니다.”
레온의 친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걸까. 흥미를 느낀 프리아가 시종장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궁은 아이들이 자라기에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사가의 아이들도 유모의 손에 자라나긴 하지만 친부모와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성장하지요. 그러나 법도에 따라 황손 저하 두 분은 본궁과 멀리 떨어진 황자궁에서 극히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나셨습니다. 두 분께서는 서로 의지할 곳이 서로밖에 없으셨던 거죠.”
“그렇지만 레온, 아니 폐하의 조카분은 본궁에 살고 있잖아요?”
같은 황손임에도 황자궁에 아닌 본궁에 머무르고 있는 레온이 떠올라 프리아가 질문을 던졌다. 시종장이 반가운 눈빛을 보내며 설명을 이어갔다.
“저하에 대해 들으셨군요. 폐하가 말씀하셨던가요?”
“마상 대회 때 관람석에 있는 걸 보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니, 들었어.”
레온을 직접 만났던 사실을 알릴 수는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 시종장에게 하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아 말을 높였다 내려가며 대화를 이었다. 프리아가 호사가들이 떠들어대는 헛소문을 들은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 시종장이 황급히 부인을 했다.
“혹시 폐하와 린드가르트 님을 두고 불경한 말을 꾸며대는 못된 종자들의 말을 들으신 건 아니겠지요? 레온 저하는 틀림없는 아서 저하의 핏줄이십니다. 폐하께서 레온 저하를 본궁에 두신 건 더 가까이에서 살뜰히 보살펴주시려는 것이지 다른 의도가 있으셔서가 아닙니다.”
그런 오해는 하지도 않았는데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시종장이 울컥 터져나오는 눈물을 떨궜다. 당황한 프리아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든 시종장이 팽하고 야무지게 코를 풀었다.
“정말이지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아서 저하가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린드가르트 님도 유폐를 자청하지 않으셨을 테고 레온 저하께서도 두 분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라나실 수 있었을 텐데요. 폐하께서도 다정한 성품을 힘들여 감추며 살아가시지 않아도 되셨을 테고요. 제왕의 자리란 게 그런 거지요. 외롭고 쓸쓸해도 약점 하나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해야 하지 않습니까.”
“……폐하가?”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떠들어대는 ‘다정하고 상냥하신 폐하’에 동의할 수 없는 프리아가 떫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젠가 바이런이 말해 준 적 있던 황궁 내 중요인물에 대한 설명이 다시 떠올랐다.
‘시종장은 황제의 제일 가는 추종자라오. 그 할배의 눈에는 황제가 실제보다 백만 배는 더 미화되어 보인다고나 할까. 다 큰 사자를 어미 잃은 새끼 사슴처럼 감싸고돈다오. 혹시라도 만나게 되거든 황제에 대한 찬사부터 냅다 날리시오. 그러면 최소한 눈에 어긋나지는 않을 테니.’
“그렇습니다. 프리아 님. 지금도 급한 정무를 보시고 있사온데 프리아 님 걱정하시느라 통 집중을 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폐하 대신 찾아뵙게 된 것이지요.”
바이런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 애초에 걱정할 인간이었다면 그리하지도 않았을 텐데.
“저는… 아니, 나는 괜찮아. 아까 말했듯이 폐하께 감사하다고 전해줘.”
“괜찮으셔야죠. 괜찮아지셔서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정말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 초조해하시는 모습을 보니 아서 저하께서 투병중이시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자신이 잠든 사이 혹여 아서 저하가 잘못되시기라도 할까 봐 저하의 곁을 지키며 부지기로 밤을 새우셨습니다. 그러다 두 황손을 다 잃게 되지는 않을까 선황께서 염려하실 정도였지요.”
먼 옛일을 떠올리며 시종장이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고는 손수건에 다시 콧물을 묻히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리셨던 폐하께서 밤낮없이 지극정성으로 돌보셨지만 결국 아서 저하께서는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 충격으로 린드가르트 황손비께서는 조산을 하시게 되어 폐하께서는 또 황손비와 저하의 소생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움에 빠지셨습니다. 그 후로는 본인이 아프신 것까지 끔찍이 여기게 되셨습니다. 몸져눕게 되셔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하십니다. 여간해서는 티를 내시지도 않고요. 그렇게 참으시다가 한 번쯤 크게 앓으십니다.”
시종장의 말에 프리아는 지난 초여름밤의 일을 떠올렸다. 다락방에서 앓고 있던 황제를 만났던 그 밤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니, 그보다 전. 황제가 프리아를 처음 찾아왔던 밤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 처음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제비궁에서 유디스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약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로 살고 있겠지. 몸은 지금보다 더 천천히 나빠졌을 것이다. 어느 날 얼굴조차 한 번 보지 못한 후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황제는 어떠했을까. 짧은 순간 묵념이라도 올려주었을까.
“폐하께선 상처가 많으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폐하를 무조건 이해해 달라는 말씀은 드리지 못하지요. 그저 제가 바라는 것은 폐하께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실 때까지 프리아 님께서 조금만 기다려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프리아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시종장이 침대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귀가 벌써 어두워졌나 봅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알겠다고 했어.”
“감사합니다. 늙은이가 주책맞게 젊은 사람들의 일에 너무 간섭을 했지요? 피곤하실 텐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프리아의 대답에 안심한 시종장이 자세를 낮추며 예를 표했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가다 멈추더니 다시 돌아와 입을 열었다.
“아닐 거라 생각은 하지만 혹시나 싶어 여쭙습니다. 외람되지만 프리아 님의 주치의라는 분에 대해서 질문 드려도 될까요?”
황제에 이어 이번엔 시종장인가. 갑자기 보이는 기르에 대한 관심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프리아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 분 어떻게 생기신 분입니까? 나이는 몇이나 되시고요?”
“나이? 나이는 모르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걸까. 한 번도 기르의 나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언젠가 생일에 대해 물었을 때 더는 챙기기 귀찮은 나이라 생략하기로 했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기르는 대체 몇 살이지? 아이였을 적, 처음 본 순간부터 기르는 늘 한결 같았다. 어릴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라면 검은 머리에 흰 머리가 아주 조금, 몇 올 정도 생겨난 것뿐이었다. 큰 형님보다 조금 위의 연배일까.
“혹시 저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머리카락의 절반 이상이 흰색으로 덮인 시종장과는 도저히 같은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내젓던 프리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려줄게. 기르가 찾아오면 통과시켜 줘.”
내실에서 대기 중이던 유디스에게 시켜 종이와 목탄을 가져왔다. 지금도 눈에 선한 엄격한 눈매와 오똑한 콧날, 선명한 귀밑 턱 각을 떠올리며 손을 바삐 놀렸다. 이 정도면 얼추 비슷한가? 완성된 초상을 프리아가 시종장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종이를 받아든 시종장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알아볼 수 있을까?”
“……예. 성문을 지키는 호위병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조금 늦은 대답이 시종장에게서 들려왔다. 종이를 품속에 넣은 시종장이 자신 없는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어왔다.
“프리아 님, 그 분께서 저와 같은 연배가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까?”
“응. 큰형님과 비슷한 나이일 거라 생각해.”
자신감을 얻은 프리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아의 대답을 들은 시종장이 실망이라고 해야 할지, 안도라고 해야 할지 모를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 역시 같은 이름을 가진 분을 알았던지라 여쭤보았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저와 비슷한 연배이니 프리아 님의 주치의와는 나이가 꽤 차이나는군요. 그림 감사합니다. 호위병에게 전하겠습니다.”
전한다한들 어찌 알아볼 수 있을까 싶은 서툰 낙서였지만 시종장은 후궁에게 감사를 전했다. 프리아 님의 작품 세계는 참으로 난해하구나.
고개가 가슴에 닿을세라 꾸벅이며 졸고 있던 유디스를 간신히 설득해 침실 밖으로 내보냈다. 프리아는 내실 밖으로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문에 귀를 대고서 듣고 있었다. 내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황급히 손을 입으로 가린 채 화장실로 뛰어갔다.
겨우 목으로 넘겼던 저녁 식사가 쓴 냄새를 풍기며 뒤섞여 아래로 떨어졌다. 여러 번 퍼부은 물에 의해 피와 섞인 토사물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갔다. 난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차가운 벽을 붙잡고 프리아는 뒤집어진 속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을 느끼는 건 어렸을 때 이후 처음이다. 기르의 보살핌을 받기 전에는 겨울이면 늘 자는 동안 흘린 코피로 잠옷과 이불을 적신 채로 피 냄새를 느끼며 깨어나곤 했다. 몇 걸음조차 떼지 못하고 어지러워 다시 침대에 누워 있다 보면 유모가 이상한 냄새가 나는 물약을 가져와 입 안에 넣어주었다. 약기운이 돌면 잠시 쌩쌩해졌다가 다시 피를 쏟으며 주저앉았다.
황제를 위해 건강하라니.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다.
“바보 같아.”
제국으로 오는 길은 멀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해내는 사람처럼 두근거리며 그 먼 길을 마차에 실려왔다. 나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잖아. 잘 생각했어. 잘한 일이야. 그렇게 되뇌며 익숙한 것들이 멀어지는 풍경을 창문 밖으로 지켜보았다. 오래 달려 도착한 제국의 궁 앞에서 생각했다. 죽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황제의 솔직한 마음 같은 건 모른다.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마음뿐이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당신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을 거야.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