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83)화 (84/237)

회의실에 내갈 다과의 종류를 지정해 준 시종장이 빠른 걸음으로 본궁의 계단을 내려갔다. 그가 회의실 바깥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사내가 급히 뒤를 쫓았다. 오늘 오전 궁을 방문한 이래로 시종장과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오기만을 바라며 주변을 맴돌던 인물이었다.

“시종장, 잠시만 기다려주게. 내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시종장이 자신을 불러 세운 사내의 정체를 알아채고 곧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시종장의 먼 친척으로, 지방에 있는 본인의 영지에서 유유자적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시몬 백작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몬 백작. 궁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 사람아, 어찌 그리 무정한가. 그토록 만나 달라 연통을 보냈는데 답장 한 번 보내 주지 않길래 내 직접 찾아왔네.”

“그러셨습니까. 궁의 일을 돌보느라 바빠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네요. 늦은 시간이니 쉬실 수 있도록 처소를 배정해 드릴까요?”

“잠이야 아무 데서나 자면 되는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네. 폐하께서도 이 늦은 시간까지 나랏일을 돌보시느라 쉬지 못하시는데 내 어찌 편히 몸을 누일 수 있겠는가. 오늘 궁이 시끄럽기에 무슨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나 근심했었네.”

“백작의 충심을 아신다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시종관에게 일러 쉬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따로 제게 할 말이 있으신지요?”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기를 바라며 시종장이 의례적인 미소를 보냈으나 백작은 눈치채지 못하고 수십 년 전의 일화까지 입에 올리며 수다를 떨었다. 극히 미약한 친분을 강조하며 백작이 늘어놓는 집안의 대소사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시종장이 대화를 끝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럼 또 다음에 뵙기로 하지요. 연락드리겠습니다.”

본 용건은 꺼내지도 못한 채 우선 친분을 강조하느라 바빴던 백작이 돌아서는 시종장의 등 뒤로 급히 말을 던졌다.

“아까 말했던 내 동생 말일세. 올해 열일곱이 되는 손녀가 있어. 어려서부터 어찌나 미모가 뛰어났는지 혼담을 맺겠다는 이들이 성 마당까지 줄을 섰다는구만. 나 역시 직접 눈으로 보고 참한 품성과 눈부신 미색에 감탄했다네. 자네가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없겠는가?”

“제 동생에게도 혼기가 찬 손주가 있기는 합니다만 한번 자리를 만들어 드릴까요?”

백작의 의도를 뻔히 짐작하면서도 시종장이 조카 손주를 입에 올리며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답답하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백작이 드디어 본심을 꺼내놓았다.

“폐하 말일세. 내로라하는 미모의 여인들을 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는 들었네만 우리 조카 손녀를 한 번이라도 보시게 된다면 마음이 바뀔 것이리라 장담하네. 후궁들이야 다 제 공국의 잇속을 따라 움직일 테지만 제국 출신이라면 마음가짐부터 다르지 않겠는가? 그 어미의 가문이 대대로 아들을 많이 낳기로 유명하네. 황실 후사가 있어야 자네도 마음이 놓이지 않겠나.”

“저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부디 좋은 혼처 찾게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가시는 길은 시종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더 이상 상대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고개만 까닥해 보인 시종장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백작의 다음 말에 한심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인이 그리 싫으시다면 나에게 외모가 출중한 조카 손주도 또 한 명 있네만 어떻게 안 되겠는가?”

젊은 시절 시종관으로 임명된 이후 올곧은 충심으로 황실을 모셔온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이 된 후로는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분이니만큼 들어오는 청탁 또한 끊이지 않았다. 함부로 청탁을 넣는 인물과는 인연을 끊어 버린다는 소문을 저 작자는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눈앞에 뜨이기만 하면 혼인 여부도 고려하지 않고 침실로 끌어들였던 선황제 덕분에 황제가 바뀐 지금도 헛된 꿈을 꾸는 이가 간혹 있었다.

시종장이 궁에서 보낸 세월만큼이나 들어오는 청탁 또한 다양했으나 태반은 백작처럼 자신의 피붙이를 황제에게 소개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들은 후궁전의 공녀들이 황제에게 외면받는 이유를 미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제멋대로 단정하고 온갖 미녀들을 황제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해 안간힘을 써 댔다. 그중에서는 백작처럼 미동을 준비해 오겠다는 이도 있었다.

미동을 데려온다한들 황제의 마음이 움직이기나 할 것인가. 약에 취한 상태에서도 엉겨 붙는 미동을 거부하고 황제는 제비궁으로 달려갔었다. 감옥에 갇힌 미동은 고된 심문을 받던 중 심장이 멎어 사망했다. 애초에 사형이 예정된 죄인이었다. 제 누이를 믿고 질이 낮은 장난질을 쳐 댔던 망나니는 형수를 배려한 황제의 결정으로 목숨을 부지했으나 평생 동안 관직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재정대신 또한 사임을 요청했으나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국을 호령하는 황제라고 하기에는 아직 어리고 마음 약한 청년이다. 얼핏 단단해 보이는 외피 속에는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깊은 상처가 숨어 있다. 방어가 지나쳐 가끔은 고슴도치처럼 세운 가시로 상대를 상처 입히기도 했다. 시종관에게서 전해들은 황제의 기행을 떠올리며 시종장이 한숨을 쉬었다.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황제는 창문 너머로 먼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이 백조궁이 있는 남쪽을 가리킨다는 것을 눈치챈 시종장이 황제를 대신해 회의실을 나선 것이다.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조금만 더 드세요. 태의께서 프리아 님이 너무 마르셨다고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스프 한 그릇을 다 비워 내지도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는 프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유디스가 말했다. 프리아가 깨어났다는 걸 알고 급히 주방을 닦달해 식사를 마련해 왔으나 태반이 남긴 채였던 것이다.

“나 이제 괜찮아. 나 원래 밤에 뭘 먹지 않는 거 유디스도 잘 알잖아.”

유디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프리아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프리아가 의식을 차리자마자 몰려온 시녀들이 소란을 피우며 앞다투어 음식을 권했다. 그리고 황제가 어떤 모습으로 프리아를 안고 나타나 몸소 손발을 주무르며 체온을 높여 주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녀들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평소 시니컬하던 이사벨과 말수가 적던 올가까지 몇 마디 거들 정도였다.

그녀들의 입을 통해 묘사되는 황제의 모습은 연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과장 보태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는 순정파에 다름없었다. 애초에 자신을 그 꼴이 되게 만들었던 건 다름 아닌 황제가 아니었던가. 선을 그으며 몸을 함부로 취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프리아 님이 추우실까 봐 폐하께서는 입고 계시던 옷을 다 벗어 덮어 드렸대요. 그리고 다른 이들은 손도 대지 못하게 경고를 날리셨대요.”

친분이 있는 호위병에게 그 순간의 모습을 낱낱이 전해 들었다며 시녀 아이가 눈을 빛냈다. 내실을 담당하는 시녀이기는 하지만 평소 프리아에게 직접 말을 걸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꽤 흥분한 모양이었다.

“젖은 옷을 덮으면 더 춥지 않아? 체온을 빼앗길 텐데.”

그래서 그렇게 추웠던 거였어. 프리아가 당연한 사실을 지적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그, 그건 그렇지만 폐하께서는 프리아 님을 안고 달려오시느라 상처도 나셨고 피! 피도 흘리셨어요!”

“벗기고 안고 왔으면 내가 좀 창피했겠네. 그건 고마워해야겠어.”

황제의 행동에 깊이 감명받은 시녀 아이가 조심스럽게 반박하자 프리아가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도 황제보다는 프리아의 편인 유디스가 눈을 흘기며 시녀 아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다들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피곤해서 좀 쉬었으면 좋겠어. 자리 좀 비켜 주겠어?”

프리아의 말을 들은 유디스가 빠르게 시녀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정작 유디스 본인은 너도 가서 쉬라는 프리아의 말에도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갑자기 또 열이 나시면 어떻게 해요? 저는 밤새워 프리아 님의 곁을 지킬 거예요!”

한참을 고집부리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프리아가 누워 있는 침대 위에 파묻었다.

“제 잘못이에요, 프리아 님. 날이 안 좋았는데 제가 날씨가 좋다고, 야외로 나가시라고 해서.”

그게 어디 유디스 탓이던가. 흐린 하늘을 보고도 산책을 감행한 건 황제였음에도 유디스는 내내 가책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유디스를 달래는 프리아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출입을 허락하는 프리아의 말에 응접실을 담당하는 시녀 아이가 들어오더니 시종장의 방문을 알렸다.

“늦은 시간에 찾아뵌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깨어나셨다는 소식 듣고 꼭 무사하신 모습을 직접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변함없이 인자한 표정으로 시종장이 자세를 낮춰 침대에 앉아 있는 프리아에게 예를 표했다.

“괜찮습… 아니, 괜찮… 다.”

습관적으로 말을 높이려다가 황제의 지시를 떠올린 프리아가 어색하게 말을 낮췄다. 이유를 짐작한 시종장이 눈가 주름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말씀 편하게 해 주십시오, 프리아 님. 폐하께서는 지금 급한 회의 중이십니다. 회복하셨다고 말씀을 전해 드리면 기뻐하실 겁니다.”

병 주고 약 주고 다하네. 한숨을 내쉰 프리아가 편치 않은 얼굴로 시종장을 올려다보았다.

“폐하께서 힘써 주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고 감사하다고 전해 줘요.”

가시가 담긴 이중적인 말에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프리아를 내려다보던 시종장이 빈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금방 돌아갈 줄 알았던 시종장의 착석에 놀란 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께 섭섭하신 것이 많으실 줄 압니다. 폐하께서는 가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실 때가 있지요. 잠시 시간을 내주신다면 프리아 님께 폐하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또?

다락방에서 지내던 시절 프리아는 시종장의 황제 수다를 질릴 만큼 들었었다. 어두워지는 프리아의 얼굴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가끔 프리아 님께 모질게 행동할 때가 있으시지만 그건 폐하의 진심이 아닙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황제의 편을 드는 이가 많다. 프리아는 지친 얼굴로 이어지는 시종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