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시종관의 질문에 대답 없이 황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눈치만 살피고 있던 시종들과 호위병이 시종관의 손짓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제각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내미는 그들의 뒤늦은 합류를 시종관이 제지했다. 대신 그중에서 가장 키가 큰 호위병의 우장을 벗겨 황제에게 내밀었다. 미동 없는 황제를 대신해 시종들이 나서 벗은 몸에 우장을 입혀주었다.
“폐하, 곧 해가 집니다. 서둘러 내려가셔야 합니다.”
시종관의 말에 황제가 후궁을 안았던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어 굳어진 몸이 휘청거리자 놀란 시종들이 황제를 부축하기 위해 다가섰다.
“프리아 님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빗길이 험해 이대로는 내려가실 수 없습니다.”
백조궁의 호위병들이 내민 손을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손대지 마.”
후궁의 몸에 손을 대는 건 불경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궁의 주인은 자신들이 모실 생각이었다. 산길이라 마차를 동원할 수도 없었다. 후궁을 업고 하산하기 위해 나선 호위병들이 황제의 서슬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아무도 손대지 마.”
무서운 얼굴로 경고한 황제가 후궁을 안고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종들과 호위병들이 앞뒤를 둘러싸고 황제를 엄호했지만 갑자기 내린 비로 험해진 길이 평지와 같을 순 없었다. 발밑이 내려다보이지 않아 돌부리에 차인 발이 꺾이기도 했으며 키 작은 관목들이 휘두르는 날카로운 가지에 드러난 종아리가 사정없이 베이기도 했다.
백조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궁 문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후궁을 안고 나타난 황제의 험한 차림새에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비바람에 반쯤 벗겨진 우장이 간신히 젖은 나신에 매달려 있었으며 드러난 무릎 아래로는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폐하!”
“프리아 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폐하!”
의식을 잃은 프리아의 상태를 알아챈 유디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황제의 뒤를 따라왔다. 그녀의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처럼 황급히 계단을 올라가던 황제가 고개를 돌려 시종관에게 지시했다.
“더운 물을 준비해, 어서.”
한창 식사 준비중이던 주방의 끓는 물이 모두 2층의 욕실로 옮겨졌다. 평소처럼 입욕제니 물 위에 뿌릴 꽃을 준비할 겨를도 없었다. 욕조에 물이 채워지자마자 황제가 후궁을 안은 채로 서둘러 입수했다. 비바람에 시달렸던 몸이 더운 물에 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상처를 살필 새도 없이 달려왔던 오웬이 베인 피부로 스며드는 온수에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후궁의 몸을 감쌌던 여러 겹의 옷이 물 위로 떠올랐다. 오웬이 물 위를 떠도는 천을 붙잡아 욕조 밖으로 밀어냈다. 혹시 상처라도 있을까 싶어 오웬은 물속에 잠긴 프리아의 흰 나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등허리로 번졌던 풀물은 수차례 쓰다듬는 오웬의 손길에 씻겨나갔다. 맨 바닥에 쓸렸던 것일까. 프리아의 피부 위로 남은 긁힌 상처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으나 오웬은 치기 어린 오늘의 실수를 아프게 후회했다. 잘 대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굳이 그런 험한 곳에서 일을 치를 필요까지는 없었다. 후궁의 몸이 약하다는 걸 알면서도 빗속에서 정사를 감행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손발을 주무르는 오웬의 손길에 창백했던 후궁의 안색에도 핏기가 돌아왔다. 더운 물에 익어 열이 어리기 시작한 피부에도 더는 찬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온을 올리는데 효과적인 목욕이지만 너무 오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외려 역효과를 줄 수도 있었다.
먼저 욕조 밖으로 나온 오웬이 준비된 수건을 들어집었다. 대충 닦아 물기를 제거한 후 다시 욕조에 손을 넣어 후궁을 꺼내들었다. 커다란 새 수건으로 젖은 몸을 감싸 안았다.
오웬의 지시로 인해 밖에서 대기중이던 시녀들이 후궁을 안고 나온 황제의 나신에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침실로 향하는 황제의 발걸음을 시종과 시녀들이 뒤따랐다. 미리 지펴둔 벽난로의 열로 인해 침실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쏟아져나왔다. 달군 돌로 침대 안까지 데워놓은 까닭에 시트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는 후궁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여며주고서야 돌아섰다. 시종관의 전언을 받고 달려온 시종장이 준비해온 새옷을 황제의 빈 몸에 입혔다. 황제의 기행을 전해들었으나 묻지 않을 작정이다. 이미 짙은 후회가 황제의 얼굴 위로 서려 있었다.
“폐하, 태의가 도착했습니다.”
태의를 부르러갔던 시종관이 돌아와 도착을 알렸다. 반쯤 머리가 센 중년의 의사가 걸어들어와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왜 깨어나지 않지?”
황제의 질문에 중년 사내가 손수건을 꺼내들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비가 내려 쌀쌀한 날씨이기는 하나 방안의 온도는 지나치게 높았다. 벽난로도 모자라 여기저기 피워놓은 임시난로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곧 깨어나실 겁니다. 약하신 몸에 비를 맞으신 까닭에 기력을 쇠하셨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말할 수 있겠어. 다른 이유를 대 보아라.”
후궁이 깨어나지 않아 심기가 상한 황제의 추궁에 태의가 진땀을 흘렸다. 이게 다 몸이 약한 사내 후궁을 궂은 날씨에 산에 데려가 굳이 찬 비를 맞히면서 안아 댄 황제의 탓이지 않은가. 누구나 건강한 몸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나진 않는다. 타고난 건강체로 태어나 많은 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귀하게 자라나 몸에 좋은 것만을 섭취하며 적절하게 몸을 단련하기까지 한 황제와 선천적인 약체로 태어나 낯설고 기후가 다른 제국으로 차출된 후궁과는 기본적인 체력부터가 하늘과 땅이었다.
황제가 몸소 후궁을 산에서부터 안고 뛰어왔다는 시종의 말에 태의는 혀를 내둘렀다. 태의의 지위를 물려받기 전에도 장대한 기골과 넘치는 정력으로 여러 후궁을 거느렸던 선황제 아래에서 오래 일을 했으나 이 정도로 유달리 총애하는 후궁을 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예뻐한다 하여도 자신의 몸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토록 육체강건하니 젊은 황제의 치세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겠으나 후궁을 치료하지 못하면 당장 자신의 앞날이 험난해질 판국이다.
한 달이 넘어 다시 보게 된 사내 후궁의 몸이 부쩍 말라 있는 것에 의문을 느낀 태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에는 상사병이 아니냐며 호들갑떠는 시종장의 말에 휩쓸려 마음의 병이라 진단내리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어쩐지 모를 찜찜함이 남았었다.
심장 박동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빠른 편이기는 하지만 채혈의 결과 큰 이상은 없었다. 후궁의 맨몸을 살필 수는 없어 황제에게 물어보았지만 반점이 나타나거나 이상한 체향이 풍기지도 않는다 했다.
“물어볼 것이 있으니 시녀를 불러주시겠습니까?”
태의의 요청에 시종관이 유디스를 불러왔다. 상전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나 싶어 긴장하고 있던 유디스가 굳은 표정으로 태의의 질문에 답했다.
“후궁께서 식사는 잘 하고 계시더냐?”
“원체 적게 드시기는 하지만 식사를 거르시진 않았습니다.”
“혹시 구역질을 하시거나 구토를 하신 적은 없느냐?”
“백조궁으로 옮기신 직후에 쥐를 보고 놀려셔서 그러신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코피를 쏟으시거나 갑자기 정신을 잃으시는 일은 없느냐?”
“오늘… 을 제외하고는 그러신 적이 없습니다.”
황제를 곁눈질하며 망설이던 유디스가 대답했다. 이토록 궂은 날씨에 밖을 권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궁 앞 호수만 둘러보고 오실 줄 알았더니 숲으로 향하시는 통에 황제와 후궁이 돌아올 때까지 궁 앞을 맴돌며 좌불안석이었다.
“후궁께서 질병의 증상은 딱히 없으신 걸로 보입니다, 폐하. 몸을 보하는 약을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염려를 기우라 판단한 태의가 진단을 내렸다. 필시 후궁이 밤마다 젊은 황제에게 시달린 까닭에 몸이 축난 것 뿐이리라. 체온이 낮은 편이기는 하나 아이를 낳을 몸도 아니니 큰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체온도 안색도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후궁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태의가 물러난 후에도 후궁의 침실을 지키던 오웬이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던 시종장을 쳐다보았다.
“기르라는 자에 대해 알아보라 했던 것은 어찌되었지?”
“알훼니아에서 답신이 왔습니다만 그자는 현재 타지에 나가 있어 연락이 닿기 어렵다 합니다. 다만 돌아오기로 약속한 기간이 멀지 않았는지라 귀환 즉시 제국으로 보내겠다 하였습니다. 답신이 오는 동안 날짜가 꽤 지났으니 이미 제국으로 출발하였을 겁니다.”
“그래. 그자가 도착하거든 지체 없이 백조궁으로 보내라고 해.”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뜨내기라 해도 최소한 마음의 안정은 되어줄 수 있겠지.”
기르라는 자가 보고 싶다며 잠꼬대 하던 후궁의 말을 오웬은 떠올렸다. 외로운 걸까.
후궁의 삶이 어떠한지. 일상이 어떠한지 오웬 자신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한때는 알고자 했던 것들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무슨 취미를 가졌으며 자신이 없는 동안은 무얼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친구라는 핑계로 바이런이 후궁의 곁을 얼쩡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 뜨내기 의사라 할지라도 후궁의 곁에 붙여주어야 할 것이다.
후궁에게 큰 이상은 없다고 하는 태의의 말을 오웬은 믿고 싶었다. 제국에서 제일 가는 의술을 갖고 있으니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오웬 자신을 위해서라도 후궁은 무사해야 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지긋지긋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황제의 입에서 지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겨우내 투병하던 아서가 숨을 거둔 후 넋을 잃고 살아가던 오웬의 지난날을 떠올린 시종장이 애틋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오웬은 증오하면서도 오랜 기간 조부였던 선황제의 병구완을 묵묵히 해내기도 했다.
“폐하! 국경에서 온 급보입니다.”
황급히 계단을 올라와 후궁의 침실을 두드린 시종관이 본궁에서 온 소식을 전했다. 대신들이 이미 회의실에 모여 있다는 전언에 황제와 시종장이 급히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고 고요해진 침실에서 프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