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프리아는 매일 그 새벽을 떠올리며 뼈아픈 후회를 했다. 싸늘하게 굳어 가던 황제의 얼굴이 눈 감으면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했다.
그 답을 들려주기 위해 여기까지 데려왔구나. 예정된 파국의 시간이었다. 그 어떤 답을 듣더라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황제의 감정을 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을. 황제에게서 흘러나올 날선 말을 예감하며 프리아는 눈을 감았다.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여러 날 살을 맞대고 얼굴을 보아 온 탓일까. 더는 예전처럼 사내 후궁을 증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너와의 잠자리는 꽤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겠지. 후궁으로서의 효용 가치를 염려하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미 품었으니 내치지 않을 것이고 더는 너를 찾지 않게 되더라도 섭섭지 않게 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후궁과 황제 사이에 다른 무엇이 필요할까. 미색으로 위로하고 아이를 품어 황제를 기쁘게 해 주는 것만이 후궁의 의무이자 보람이었다. 눈앞의 사내 후궁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지만 오히려 더 그렇기에 오웬에게 유용한 존재였다. 후궁이 자신을 연모한다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냥개가 주인을 따르는 것처럼, 길들인 매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보살피는 것처럼 안위를 살펴 주면 될 일이었다.
그간의 불면이 무색하도록 결론은 간단했다. 어째서 동요했을까. 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후궁의 침실 앞을 서성거렸을까. 후궁과 보냈던 시간이 즐거웠다 하여 왜 스스로를 자책하고 증오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을까. 그저 후궁과 황제의 관계일 뿐이다. 당연한 결론이다.
정원의 꽃이 예뻐 잠시 길을 멈추는 것처럼, 기르는 개의 재롱에 잠시 시름을 잊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눈앞의 사내가 아름다워 잠시 그 미색을 즐겼을 뿐이다.
“앞으로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도 좋아. 이 정도면 네가 제국으로 온 목적도 달성되었겠지.”
말을 마친 황제의 얼굴은 평온하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더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으며 안위를 보살펴 줄 것이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니.
폭력과 모욕을 예상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폭언을 쏟아 내는 황제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 그러나 황제에게서 들려온 말은 예상치도 못한 미래에의 보장이었다. 프리아에게는 존재하지도 않을.
철저하게 오웬 자신과 프리아를 황제와 후궁으로 규정짓는 그 말들이 아프게 심장에 와 박혔다. 짓궂은 말투를 던지면서도 눈빛만은 따뜻하던 그였는데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며 싸늘해진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잠자리에 만족한다니. 이걸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칭찬으로 여겨야 할까. 효용가치라……. 황제가 말한 것처럼 제국으로 온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 마티아는 후궁의 운명에서 벗어났고 알훼니아 역시 표면적으로는 제국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런 것을 바라고 떠나온 길이었다. 황제와 밤을 보내고 총애받는 남총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나 후궁의 신분인 이상 싫어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프리아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잎을 떨구기 시작한 나무들이 갈퀴처럼 솟아난 가지를 위협스럽게 흔들었다.
“알아들었다면 더는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도록 해.”
고개를 숙인 후궁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저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풀잎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알았다는 듯, 그리 하겠다는 것처럼 천천히 후궁이 고개를 끄덕인다. 끝내 자신을 올려다보지 않는 그 시선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들자 비로소 후궁은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야지.”
“……예, 폐하.”
순순한 대답도 기대가 사라진 눈빛도 살짝 움켜진 손힘에도 힘없이 끌려오는 가벼운 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충동에 휩싸여 오웬은 붙잡은 후궁의 몸을 거칠게 풀밭 위로 눕혔다.
이건 후궁으로서의 쓰임새다.
거친 숨결과 열망을 띤 눈동자, 연거푸 맞춰오는 입술 따위에 숨겨진 진심 같은 건 없다. 서로는 그렇게 합의했다. 입 속으로 파고든 황제의 뜨거운 혀가 프리아의 혀를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아서 프리아는 손을 들어 자신을 내리누르는 단단한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폐, 폐하. …읍. …으읏.”
발버둥치는 짐승을 제압하는 것처럼 오웬이 프리아의 양 손목을 한 손에 잡아 바닥에 고정시켰다. 욕망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흐트러진 후궁의 머리카락과 그로 인해 드러난 가지런한 귓가로 향했다. 귓바퀴로 들어오는 매끄러운 혀의 감촉에 진저리치며 프리아가 젖은 신음을 내뱉었다. 한참을 귓불을 빨고 깨물어가며 괴롭히던 입술이 목선으로 내려왔다. 머무는 자리마다 금세 붉은 울혈이 피어난다.
옷 속으로 들어온 손이 정신없이 엉덩이를 매만지다 천을 아래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윗옷이 말려 올라가 드러난 등허리로 풀물이 들었다. 땅에 박힌 돌조각이 아프게 허리를 찔러댄다.
프리아의 벗은 두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오웬의 허벅지가 거친 동작으로 간격을 더 벌려 놓았다. 이토록 험한 정사를 경험하는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놀란 육체가 의지와는 달리 벗어나길 원하며 자꾸 뒤로 물러났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여린 풀뿌리뿐이다. 머물렀던 곳에서 끌려와 강제로 뽑히게 된 풀잎이 바람에 휘날려 삽시간에 흩어진다.
후둑, 물이 튀었다.
가지 끝에 맺혔던 물방울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 위로 쏟아져 내린다. 감은 눈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다시 눈을 떴다. 흐린 하늘을 감싸고 있던 가지 사이로 비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마 위로, 콧등으로,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입술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린다. 오웬의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프리아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어째서일까. 그 역시 눈을 감고 있었다.
프리아는 자유로워진 손을 들어 오웬의 감긴 눈꺼풀을 만져 보았다. 만지면 검은 물이 들 것 같은 짙은 눈썹도 쓸어 보았다. 괴로운 사람처럼 일그러지던 오웬의 얼굴이 아래를 향해 내려왔다. 프리아는 오웬의 젖은 머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고 뜨거운 숨이 피어나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한층 빗줄기가 거세졌다. 어린 짐승 같은 황제의 얼굴이 프리아의 품 안으로 숨어들어 왔다. 상처 입은 짐승을 품는 것처럼 프리아는 제 품으로 오웬을 감싸 안았다. 이것은 연민일까, 복종일까.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사랑이라 해도.
비 내리는 숲은 빠르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프리아는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더 이상 눈물인지 빗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땅에 죽으려고 왔어.
프리아는 제 안으로 파고든 황제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의 사신.
폐하.
폐하.
어디 계십니까.
황제 폐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웬은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쏟아졌던가. 불어난 빗물이 작은 내가 되어 나무 주변을 흘러가고 있다. 풀이 적은 곳은 이미 진흙탕이나 다름없었다.
옷은 물론이거니와 머리카락이며 온몸이 흠뻑 젖었다. 자신과 맞닿아 있는 다른 몸의 주인을 떠올린 오웬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프리아.”
풀밭에 눕혀진 몸이 무섭도록 창백하다.
미동도 없이 잠이 든 것처럼 후궁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뺨으로 가져간 손이 지나치게 차가워 순식간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갔다.
“프리아!”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오웬의 힘으로 옮겨 다니기만 할 뿐 늘어진 육체에 생기라곤 없었다. 오웬의 동작이 멈추면 후궁의 몸도 다시 고요해졌다. 힘없이 흔들리던 어깨가 젖은 땅으로 돌아갔다.
“프리아! 정신 차려! 일어나 봐!”
소리를 질러 보아도 대답이 없다. 급한 마음에 코끝으로 손가락을 대 보았지만 손이 온통 떨리는 통에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 오웬은 누워 있는 후궁의 가슴으로 귀를 가져갔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자신을 외쳐 부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한순간에.
오웬의 떨리는 손가락이 프리아의 턱 끝에서 미약하게 뛰고 있는 맥동을 잡아냈다. 살아 있다. 당연하다. 후궁이 이렇게 쉽게 세상을 등질 리가 없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는 오웬의 귀로 자신을 부르는 함성이 더 크게 들려왔다. 산책을 나간 황제와 후궁이 비가 내려도 돌아오지 않으니 수색을 나온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편히 살게 해 주겠다 말하자마자 맨땅에 눕히고 비가 내리는데도 멈추지 않고 거칠게 후궁을 안았다. 사람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탐하다니. 오웬은 스스로 한 짓임에도 자신의 행동을 믿기 어려웠다.
더 이상 증오하지 않는다 해도 후궁에 대한 마음은 단순한 욕정이어야 했다. 잠시 즐거울 수는 있지, 예뻐 보일 수도 있다. 대화를 나누고 놀리고 장난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후궁과 황제가 나눌 수 있는 범위 내의 행동이었다. 본질은 욕정이고 가장 쉽게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몸이기 때문이며 그러기에 이제는 익숙해져 서로의 몸으로 깊은 쾌락까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어디까지나 후궁으로서의 쓰임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내린 결론을 몸으로 증명하기까지 하려 했던가.
“폐하! 괜찮으십니까?”
“폐하!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폐하!”
“폐하!”
수색에 나선 백조궁의 호위병과 시종들이 자작나무 숲에서 황제를 발견했을 때 그는 나신으로 의식을 잃은 후궁을 감싸 안고 있었다. 황제가 벗은 옷들은 모두 후궁의 몸에 덮여 있었다. 황제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후궁의 얼굴만을 내려다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시종장 다음으로 황제를 가까이서 모신 시종관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어깨에 덮어 주고 나서야 그는 무서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