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부님!”
어린아이 특유의 새된 발음을 흘리며 레온이 토끼처럼 뛰어와 오웬의 품에 안겼다. 이제 곧 여섯 살이 될 터인데도 체구가 작아 네댓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황손비는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앞서 진통을 시작했다. 열다섯 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태어난 아기는 사내아이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레온은 눈치라도 살피듯 또래보다 늦되게 자라났다.
유폐를 자청한 린드가르트 탓에 어미와 떨어져 자라난 레온은 늘 정에 굶주려 있었다. 황자궁이었던 레온의 거처를 오웬은 즉위 후 본궁으로 옮기라 지시했다. 같은 궁내에 있으면서도 업무가 바쁜 탓에 자주 찾아오지는 못했다. 오웬의 방문에 신이 난 레온이 참새처럼 종알거리며 그간의 일들을 보고했다.
“그래서 제가 있잖아요, 숙부님. 손을 이렇게 크게 들고 발을 두 번 굴렀더니 도망가 버렸어요!”
산책길에서 만난 너구리를 쫓아낸 경험을 이야기하며 레온이 눈을 반짝였다. 마상 대회를 참관한 후, 기사가 되겠다며 작은 일에도 쓸데없이 용맹함을 과시하게 된 것이었다.
“그랬구나. 무섭지 않았어?”
“무섭지 않았어요! 그런데요, 숙부님. 얼마만큼 크면 기사가 될 수 있어요? 이만큼?”
한껏 손을 뻗어 보이는 레온의 손위로 오웬이 장난스럽게 자신의 손을 더 높이 들어 보였다. 벌써부터 검술 훈련을 받겠다고 조르는 통에 유모가 골치를 앓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까지 크면?”
“하아, 오백 밤 자야겠다.”
발뒤꿈치까지 들어 보여도 닿지 않는 높이에 좌절하며 레온이 어른처럼 한숨을 쉬어 보였다.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눈앞에 생생한 아기 모습의 레온을 추억하며 오웬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왜 따로 두는 거지? 나중에 두고 먹으려는 건가?”
간식으로 준비된 과자와 케이크를 맛보던 레온이 빈 접시 종류별로 한 개씩 옮겨 담자 호기심을 느낀 오웬이 질문했다.
“마티… 아니, 친구랑 나눠 먹을 거예요.”
신중하게 맛을 보고 선별하며 레온이 대답했다.
“친구라고? 처음 듣는 이름인데.”
오웬이 레온의 뒤에 서 있는 유모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하께서 동물 친구들에게 나눠 주시려는 것 같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레온을 힐끗 바라보던 유모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동물 아니야! 천사야!”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레온이 유모의 말을 반박했다. 천사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다시 닿은 황제의 시선에 유모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오웬이 재차 물었지만 레온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흔들며 친구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았다. 예법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배웠다는 자세를 엄숙한 표정으로 재현하던 레온은 곧이어 장난감 말에 올라타 기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낮잠 시간이 다가와 졸음에 빠진 레온의 고개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반쯤 눈이 감긴 조카를 오웬이 안아 침대에 눕혔다. 눈을 감은 아이의 콧등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고른 숨결이 느껴졌다.
감기로 앓아누웠던 어린 시절 시종들 몰래 찾아왔던 아서가 오웬에게 하던 손짓이었다. 살아 있나 보러왔지, 장난스럽게 그리 말하며 웃던 형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 누구보다 강하고 상냥했던 아서는 고작 열여덟의 나이로 먼 하늘의 별이 되었다.
아서의 아이를 지키고 그에게 적당한 자리를 되찾아주기 위해 오웬은 황제가 되었다. 아서의 무덤 앞에서 약속한 맹세를 반드시 지킬 것이다. 오웬이 살아가는 이유는 그뿐이었다.
“이제 말해 봐. 천사니 동물 친구니 하는 소리는 다 뭐지?”
레온이 푹 잠이 들었음을 확인한 오웬이 유모에게로 몸을 돌렸다. 실의에 빠진 린드가르트 대신 태어나던 순간부터 레온을 키워온 유모였다. 레온을 아끼는 마음만은 혈육인 오웬에게도 지지 않았다.
“저하께서 꿈을 꾸셨는지 천사를 만났다고 하시더군요. 비밀이라며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하셔서 저도 잠결에야 여쭈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만나러 올 거라며 간식을 모아 두기도 하시고 하염없이 창밖만을 바라보시기도 합니다.”
“창문으로 천사 친구가 날아온다는 건가?”
“큰 새를 보고 착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어리시니까요.”
아이다운 상상력이다. 오웬의 유년기에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었던 아서가 늘 곁에 있어 주었다. 형제 없이 홀로 황자궁에서 자라난 레온이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상상의 친구까지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니 더없이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신분이 확실한 귀족의 자제를 모아 함께 공부하도록 하지. 놀이 친구가 생기면 상상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거야.”
친족이나 고위 귀족의 자녀 중에서 또래를 선발해 함께 놀게 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믿을 수 있는 측근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았다. 유모의 정중한 배웅을 받으며 오웬은 아이의 방을 빠져나왔다.
어째서 사내 후궁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 연연하고 있었을까. 오로지 레온을 위한 일이었음에도 어느새 후궁에게 마음이 쏠려 정작 조카를 살피지 못하고 있었던 스스로를 비난했다. 어지러운 감정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었다.
한동안 뜸했던 황제가 다시 백조궁을 찾았다. 들뜬 궁인들는 달리 응접실의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유디스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프리아 님, 날이 좋으니 야외에 다과를 준비할까요?”
폐하와 함께 정원에 나가셔서 가을 장미도 보시고 호수 경치도 감상하시면 참 좋을 텐데 말이에요. 뒷말은 그저 속으로만 삼켰다. 간절한 유디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처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른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날씨가 좋기는 뭐가 좋아. 덩달아 분위기에 짓눌리고 있던 이사벨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사이가 좋은 황제와 사내 후궁을 보는 건 눈꼴시러웠지만 이렇게 어둡다 못해 숨이 막힐 것 같은 상황은 더욱 싫었다. 오랜만에 황제가 방문했는데도 불구하고 기쁜 기색이 없는 후궁과 그런 그를 차갑게 쳐다보는 황제를 수십 분째 수발들고 있자니 냉랭한 공기에 손끝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래, 날씨가 좋든 좋지 않든 차라리 밖으로 나가주었으면. 황제가 얼마나 머무를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은 저녁 메뉴 확인을 핑계로 주방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다과는 됐고 바깥바람을 좀 쐬도록 하지.”
비구름이 몰려오는 창밖을 올려다보며 황제가 비웃듯이 말했다. 말을 꺼내놓고도 후회하던 유디스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앞서 걸음을 옮기는 황제의 뒤를 차분한 표정을 한 프리아가 따라간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우장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후궁이 산책이라도 간다니 환영할 일이었지만 어쩐지 이대로 나갔다간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다. 발을 동동 구르는 유디스를 황제가 턱짓으로 제지했다.
“잠시 밖만 둘러보고 올 것이니 그리 소란 떨 것 없다. 다들 거슬리니 따라오지 마.”
자신의 뒤를 따르는 시녀와 시종들에게 경고하듯 말한 황제가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꽃들이 꺾이듯 고개를 숙였다.
호수 위로 낙엽이 떨어졌다. 궂은 날씨를 예감한 백조들이 호수 기슭으로 몰려들었다. 흔들리는 수면을 노려보던 황제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명령을 거역하지 못해 멀찌감치 서 있는 시종들이 멀어지는 황제와 후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주변은 나무뿐이다. 빽빽하게 자란 자작나무가 온통 시야를 덮었다. 몸통 가득 패인 흉터가 멀리서 보면 마치 짐승의 눈 같았다. 노란 물이 들지 않아 아직 푸른 나뭇잎이 흐린 하늘을 가렸다.
사람이 죽어 나간다 해도 수색하기 전까지는 발견되지 않을 깊은 숲이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깎아지른 절벽이 나왔고 그 위에서는 황궁의 입구까지 내려다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여전히 말이 없는 황제의 등을 프리아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날 아침 차가운 얼굴로 사라진 황제는 보름이 넘도록 프리아를 찾아오지 않았다. 밤을 틈타 다녀가는 일도 없었다.
울창한 나무 숲, 높은 가지 사이를 작은 새 한 마리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다. 마치 동행이라고는 없는 것처럼 프리아를 무시하고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너를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