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9)화 (80/237)

“아니, 당연히 제비궁 주인의 마음이야 변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폐하.”

불쾌의 원인을 넘겨짚은 바이런이 황급히 사과하며 무릎꿇는 시늉을 해 보였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오웬에게서는 빠르게 서명하는 펜촉 소리만이 들려왔다.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바이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수련관 자리를 배정해 준 건 그저 순수한 호의로, 이왕 네가 참전하는 경기니 좋은 자리에서 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리 한 것이고 그걸 빌미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어. 나 때문에 싸운 건 아니지?”

종이에 긁힌 펜촉을 쏘아보며 오웬이 시종장에게 고갯짓했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여벌의 펜을 가져와 새것으로 교체했다.

“경 때문에 내가 후궁과 다퉜을 거라고?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지?”

“……제가 또 실언을 했습니다. 다투지 않으셨다니 다행이네요.”

원래도 살갑게 구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까칠하다. 얘 왜 이래?

오웬의 뒤에서 대기 중인 시종장을 향해 바이런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의문을 표했다. 시종장이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답답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애초에 다투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지 않나. 나는 후궁을 취할 권리가 있고 후궁은 나를 섬길 의무가 있으니.”

이건 또 뭔 소리야. 경악하는 바이런의 표정에 시종장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러는 거지? 첫사랑에 빠진 소년같이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후궁 여럿 거느린 하렘의 왕처럼 군단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야? 나 없는 사이에 선황제 영혼이 들어가기라도 했어?”

“아이고,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다 하십니까. 바이런 님.”

아무도 없는 빈 내실이지만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종장이 목소리를 죽였다. 오웬이 회의에 들어가자마자 바이런이 시종장을 무섭게 재촉했던 것이다.

“프리아랑 사이 좋은 거 아니었어? 새 별궁도 내려주고 한동안은 자기 침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했었다며?”

“소문이 좀 과장되긴 했지만 대체로는 맞습니다. 한동안 꽤 오붓하셨지요.”

“그럼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 내가 하는 실없는 농담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니잖아?”

실없는 건 알고 계셨군요.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이런을 올려다봤던 시종장의 얼굴이 곧 어둡게 바뀌었다.

“저도 이유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연회 마지막 날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셨거든요. 다음 날 아침에 시중을 들려고 들어갔는데 방 안 공기부터 아주 싸늘한 것이, 북풍한설만큼이나 매서웠답니다. 얼굴은 또 어찌나 굳어 계시던지 시종들이며 대신들까지 아주 진땀을 뺐답니다.”

그저 늘 하던 아침 문안을 올렸을 뿐인데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종장이 어깨를 떨었다.

“프리아하고 싸운 거 아냐?”

“프리아 님이 어디 폐하와 싸우실 분이던가요.”

그렇게 폐하를 좋아하시는데. 시종장이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웬이 일방적으로 화를 냈을 수도 있지.”

“저도 이상하다 싶어 백조궁 아이를 불러 물어보았는데 폐하께서 발을 끊으신 지 오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요즘 프리아 님도 기운 없이 방 안에서만 지내신다 합니다.”

“그래?”

자신을 따라 어두워진 바이런의 표정을 바라보던 시종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행여나 찾아뵈실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십시오. 저야 바이런 님이 불경을 저지르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알지만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쪽은 사랑스러운 내 친구고 다른 한쪽은 소중한 내 외사촌인데 다들 무슨 억측을 하는 거야? 그저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라고.”

“아니, 언제 또 두 분이 친구가 되셨답니까. 바이런 님께서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니고요?”

“착각이라니. 궁 안에서 제일 가는 절친인데. 나중에 오해 풀리면 시종장도 나에게 사과해.”

백조궁에 알현을 청할까 마음먹었던 바이런이 시종장의 거센 반대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사촌은 다 자란 몸과는 달리 제 마음도 모르고 있을 연애 초보 풋내기에 불과하다.

다만 그 풋내기의 손에 제국을 좌지우지할 엄청난 권력이 쥐여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무얼 제 손에 쥐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 함부로 휘두르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그 날카로운 날이 예쁜 제 친구를 향해 휘둘러지지는 않을까, 바이런은 그것이 걱정스러웠다.

* * *

“이걸 내 친구가 보냈다고?”

화려한 금박이 입힌 양장본을 펼쳐들며 프리아가 눈앞의 하녀를 향해 물었다. 아직 아이티를 벗지 못한 소녀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예, 프리아 님. 제국에서 가장 멋진 사나이라고, 그렇게만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고 하셨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내에게 물건을 받아왔다며 하녀를 추궁하던 유디스를 프리아가 제지했다. 정식으로 알현을 청하지도, 시종의 손을 빌리지도 않은 조공품을 어찌 프리아 님께 드릴 수가 있겠느냐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화를 내는 유디스의 목소리가 열어둔 창문을 통해 2층까지 들려왔던 것이다.

정원에 떨어진 나뭇잎을 청소하던 하녀 앞에 나타난 매우 잘생긴 사내가 제비궁 주인에게 전해 달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고 했다. 먼 친척의 소개로 들어온 신입 하녀라 궁의 규칙을 완벽히 숙지하지 못한 채 사내의 얼굴에 홀려 전해 드리겠노라 약속하고 말았다. 2층 출입을 허락받지 못하는 말단 하녀인지라 기회만 엿보다 선배 하녀에게 상담하고 그 하녀가 하녀장에게 고해 유디스의 귀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첫 장을 펼치자마자 나타난 펜글씨에 프리아의 얼굴위로 미소가 서렸다. 다른 서명 하나 없이 넘버원이라는 단어 하나만 적혀 있던 것이다. 우정의 테두리 안에서는 자신을 1순위로 삼아 달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친구 바이런이었다.

“프리아 님!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걸요! 그렇게 막 펼치시다가 책장에 독이라도 묻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유디스가 호들갑을 떨며 프리아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들었다. 프리아를 따라간 장서관에서 빌려온 괴담책에 흠뻑 빠져 있는 탓인지 요즘 들어 사소한 물건까지 의심해 대고 있었다.

“독 없는데?”

책장을 넘겼던 손가락을 프리아가 입에 넣어 빨아보였다. 꺄악, 비명을 지른 유디스가 책을 집어던졌다. 두꺼운 양장본이 바닥에 떨어지며 앞뒷면의 표지를 내보였다. ‘당신의 배꼽을 빠지게 할 백한 가지 유우머’, ‘얼음 미녀의 심장까지 녹여 드립니다. 그녀에게 말을 거시오.’

“제목부터 진짜 썰렁하다.”

그렇지? 유디스?

간만에 시원스럽게 웃음 짓는 프리아를 바라보며 유디스가 맞장구를 쳤다.

“정말 진짜 썰렁해요. 다 한물 간 개그잖아요?”

두 번째 장에 적힌 목차에는 개그담의 제목이 적혀있었는데 어르신들이나 좋아할 법한 오래된 우스개모음이었다. 우습지도 않은 소동극을 읽으며 프리아가 웃음을 터트린다.

“아니, 그게 그렇게 웃기세요? 알훼니아 스타일이에요?”

뭐 이런 옛날 개그를 읽으시냐며 구박하면서도 유디스가 프리아를 따라 웃었다. 황제는 갑자기 발길을 끊었고 후궁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 넌지시 물어오는 시종장의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사내를 봤다는 하녀에게 황제의 초상을 보였으나 그녀는 아니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프리아 님이 웃으시니 그걸로 되었다. 책을 선물한 사내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불 꺼진 침실에 누워있던 오웬이 몸을 일으켰다. 밖은 어둡고 선반에 놓인 시계는 아직도 오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면이 다시 오웬을 찾아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이어졌다. 무엇을 먹고 마셔도 감흥이 없었으며 시선이 닿는 것마다 불유쾌한 감정을 일으켰다. 아서의 죽음 이후 이어지던 지루한 일상은 익숙했으나 머릿속을 갉작이는 이런 불쾌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날이 좋으니 오후 차는 밖에서 드시는 게 어떠하올지요? 백조궁 정원에 꽃이 만발했다 하니 연통을 넣겠습니다.’

대답 없이 노려보자 한숨을 내쉰 시종장이 언제나처럼 응접실에 준비하겠노라 말을 바꿨다. 한 사람 몫만 준비된 찻잔은 싸늘히 식어갔다. 식은 찻물이 버려지고 다시 준비된 후에도 찻잔의 수위는 낮아지지 않았다.

좁은 공간을 억지 부려 처소로 삼았던 터라 오웬 혼자만으로도 가득 차는 공간이었다. 혼자여서 편하고 좋았던 다락방이 언제부턴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공간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넓고 휑한 느낌이 들었다.

이부자리도 편치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타인의 몸체를 손발이 더듬고 있었다. 빈 자리를 쓰다듬는 손끝에 서늘한 한기만이 맴돈다. 아무리 눈을 떴다 감아보아도 여전히 하늘은 어둡고 아침은 쉬이 오지 않는다.

이곳으로 후궁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눈 닿는 곳마다 후궁이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오웬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느덧 시간은 오전 2시. 오웬이 침대를 벗어나 내실문 앞에 섰다. 익숙해진 길을 따라 걸음이 저절로 어두운 통로로 향한다. 휘오오오. 길잃고 공동을 맴도는 바람이 오웬의 눈 속에 먼지폭풍을 일으킨다. 등불이 꺼졌다. 지하에 묻혀 죽은 자들이 저마다 손을 내밀며 황제의 발목을 붙들었다. 너도 죽어, 여기서 죽어. 함께 있자.

바닥을 더듬느라 생채기가 난 손이 나무판을 짚었다. 판이 옆으로 돌아가며 오웬 앞에 그가 찾아 헤맨 사람을 보여주었다. 촛불 하나만이 켜진 침실을 걸어가는 오웬의 긴 그림자가 마치 괴물 같다.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돌아선 그림자가 바닥을 붙들었지만 오웬은 뿌리치고 걸어가 다시 긴 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동트기 직전, 서늘한 땅 위로 이슬이 내렸다. 눈을 뜬 프리아가 이불속으로 몸을 밀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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