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웬의 얼굴 위로 남아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은 분명 이 사내를 싫어했다. 경멸했다. 목적을 위해 이용하리라, 짓밟아주리라 마음먹었다. 그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황제가 사내 후궁에게 빠져 정신없다 여겨질 수 있도록. 이것은 그저 연극일 뿐이지. 모두를 속이기 위한.
정적이 흘러갔다. 창밖의 하늘은 차츰 밝아져 어느새 꺼져버린 촛불 대신 방안을 어슴프레 비추고 있었다. 후궁의 얼굴이 오웬에게 보이는 것처럼 오웬의 표정 역시도 고스란히 후궁에게 드러나 보일 것이다.
오웬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이불 위로 떨어진 흰 손을 오웬은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잠시 꾸었던 꿈처럼, 환각처럼 후궁은 다시 잠들어있었다.
* * *
“대체 발이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사라진…. 아니 이게 왜 여기….”
귀신에게 홀렸나. 유디스가 자신의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들어 양쪽 눈을 비볐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아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물건을 손가락을 들어 조심스럽게 찔러보았다. 이 매끄러운 실크 원단의 감촉, 섬세한 레이스의 짜임, 자수로 놓인 넘버링까지 하루전에 사라져 백조궁을 발칵 뒤집어 놓은 그 물건이 틀림없었다.
“혹시 이사벨 님이 가져가셨던 건가요?”
이건 필시 누군가의 장난이다, 그리 단정한 유디스가 유난히 비협조적인 수행 시녀 이사벨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청소와 빨래, 잔심부름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수행 시녀의 허락없이 함부로 후궁의 내실에 들어올 수 없었다. 난데없이 그것도 후궁의 물건을 대상으로 장난질을 친 범인으로 의심받게 된 이사벨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제가 왜요? 그깟 스카프 얼마나 한다고? 본인이 잘 찾아보지도 않고 이제와서 누구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원.”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고가의 물건임을 알면서도 이사벨은 허세를 부리며 유디스에게 맞섰다. 저 얄미운 수석시녀와 사내 후궁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어린애 장난질을 칠 마음까지는 없다. 그리고 내가 했더라면 이렇게 돌려놓지도 않았겠지.
“저한테만 물어보지 말고 올가 님에게도 물어보세요. 혹시 아나요? 프리아 님이 감추셨을 수도 있잖아요?”
“프리아 님이 왜요?”
“낸들 알아요? 그럴 이유가 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올가 님, 올가 님이 가져가신 거 아니에요? 어제 분명 다시 찾으면 나올 거라고 했잖아요?”
조용히 후궁의 아침 세안을 준비하던 올가에게로 화살이 쏟아지자 유디스가 두둔하고 나섰다.
“그렇게 말한 건 이사벨 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의심할거면 공평하게 하라는 소리예요. 의복 수발 담당은 본인이면서 자기가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나에게 물어요?”
요즘들어 부쩍 친해진 올가와 유디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사벨이 언성을 높였다.
“그만해.”
내실에서 들려온 소란에 잠이 깬 프리아가 침실에서 걸어나왔다. 후궁을 본 수행 시녀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췄다.
“그거 내가 가져갔었어. 유디스 그러니까 그만해.”
지친 표정을 한 프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유디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프리아 님이요?”
대체 왜. 영문을 몰라하는 유디스에게 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어. 미안.”
의상과 장신구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지언정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으셨는데. 당황한 유디스의 시선이 프리아가 입고 있는 침의에서 다시 멈췄다.
“프리아 님, 침의를 갈아입으셨어요?”
어젯밤 자신의 손으로 입혀드렸던 침의가 아니다. 침의도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걸까.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유디스의 얼굴을 본 프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뭘 쏟아서 그랬어. …밤중에 갑자기 포도주가 마시고 싶어져서.”
구석에서 대야에 담긴 젖은 침의를 발견한 유디스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래서 갈아입으셨던 거구나. 많이 드셨어요?”
프리아는 의외로 주량이 센 편이었다. 과실주를 즐겨 마시는 후궁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유디스가 평소보다 가라앉은 프리아의 태도를 숙취 때문이라 판단했다. 한층 냉랭한 표정을 한 이사벨이 자신을 의심했던 유디스를 쏘아보았다.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프리아에게로 세숫물이 담긴 사기 주전자를 든 올가가 걸어왔다.
“누가 가져갔는지 알고 계신거죠?”
상자에서 다시 꺼낸 스카프를 펼쳐 찬찬히 살펴보며 유디스가 말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후궁의 물건을 가져갔던 범인은 밤을 틈타 제자리에 돌려놓은 모양이다. 장인의 솜씨를 흉내낸 모조품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이 스카프 한 장이면 한 가족이 족히 몇달을 버틸 식량을 살 수 있었다.
“프리아 님이 감싸셨으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궁에 들어오는 물건은 다 기록되니까 하나라도 없어지면 아랫것들이 경을 치르거든요.”
보석 장신구라도 없어졌다간 궁을 다 뒤집어엎어서라도 찾아내야 했다. 이사벨이 가져갔다면 그저 장난이었을 테지만 다른 사용인이었다면 벌써 궁밖 으로 팔려나가 찾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마음을 바꿔 돌려놓았지만 다음에는 더 귀한 물건을 가져갈 수도 있다.
두통을 핑계로 다시 침대에 누운 프리아가 유디스가 들고 있는 천조각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목에 둘려 함께 시범경기를 치르고, 땀에 젖은 얼굴을 닦는데 쓰였던 스카프는 깨끗하게 세탁되어 다림질까지 마친 채로 돌아와있었다. 황제가 손수 했을리는 없으니 시종들의 손이 닿았을 것이다. 황제는 무슨 마음으로 저것을 가져가 자신에게 보이고 다시 돌려놓았을까.
‘이제 저를 싫어하지 않으세요?’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 버린 물음이다. 그 말을 들은 황제의 얼굴은 어떠했던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지던 얼굴.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날로 돌아간 것처럼 황제는 냉랭한 얼굴로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말보다 분명하게 그 표정이 대답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의 냉대보다 함께 지냈던 그 한 달간의 날들이 따뜻해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 자신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의 기저에는 깊은 경멸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잊고야 말았다.
다른 후궁들을 멀리하고 사내인 자신만을 가까이한 이유를 그날 밤 레온을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어린 마티아를 위해 후궁을 자처했던 것처럼 황제는 자신의 미래를 희생해 죽은 황태손의 아들인 레온을 후계자로 올리려 하고 있었다. 평생이 지나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만이 그와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이 고작해야 몇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온 궁 안에, 온 제국에, 먼 나라까지 알려지도록 그는 프리아에게 푹 빠진 것처럼 행동했다. 진정 후궁을 아끼는 황제가 된 듯 굴었다.
어째서 둘만 있는 공간에서도 다정하게 대하지? 왜 그런 말을 하고 왜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가. 왜 밤마다 찾아오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즐거워 착각하고 말았다. 이제 더는 나를 싫어하지 않을지도 몰라.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 황제가 자신을 아낀다면 자신 또한 그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는 자신이 죽는다 해도 그리 슬퍼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사람이 죽는 게 싫어. 내가 죽이는 것도 싫지만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죽은 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싫다. 그러니 내 앞에서 오해할 짓을 하지 마.’
죽음이 싫다는 그에게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후궁의 신분으로 궁에 갇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서서히 죽어갈 뿐.
황제의 탄신제를 치러내느라 밤낮없이 들썩였던 궁은 축제가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조용해졌다. 근신에서 벗어나 다시 집무실 출입을 허락받은 바이런이 황제의 일을 돕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폐하? 제비궁 주인 생각?”
수분째 서류의 높이가 줄어들지 않는 황제의 책상을 지적하며 바이런이 입을 열었다. 돌아오는 오웬의 눈매가 북풍처럼 서늘하다.
“더는 사심이 없다고 말했을텐데. 그만 좀 용서해주라. 제가 져드리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과장된 표정으로 울상을 지어보이면서 바이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말과는 달리 방심하다 패하게 된 것이지만 이렇게 말하면 지기 싫어하는 사촌 동생이 발끈하는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다. 바이런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오웬은 냉랭한 시선을 서류 앞으로 되돌렸다.
“사랑 싸움이라도 했어? 프리아가, 아니 제비궁 주인께 문전박대라도 당했나? 마상대회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날 보고 마음이 바뀌기라도 하셨나?”
검토가 끝난 서류를 바이런에게 넘기며 오웬이 차갑게 말했다.
“그런 식의 불쾌한 농담 더는 듣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