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의 위치를 바꾸며 한참을 뒤척이던 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밤은 깊어가건만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내려갔던 열이 다시 올라 두 뺨을 달구고 있었다. 장작불이 너무 뜨거운 탓일 것이다. 벽난로 앞으로 다가간 프리아가 철막대를 들어 불 붙은 장작을 서로 떼어놓았다.
한참을 쑤석거려도 불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창문을 여는 것이 낫겠다 그리 판단한 프리아가 침실을 가로질러 창문 앞에 섰다. 덧창이 닫혀 있어 창밖이 보이지 않는다. 걸쇠를 내려 덧창까지 밀어젖히자 차가운 밤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제짝을 찾기 위해 소리 높여 노래하는 가을 벌레 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운다.
고요한 방 안은 어느새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나무 그늘 아래로 바뀌었다. 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절로 발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황제의 검은 머리칼을 흩날린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몽롱한 기억 속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생일은 언제지? 그렇다면 이제부터 네 생일은 첫눈이 오는 날로 하지.
어둠을 가로지르며 터지는 불꽃. 대지는 다시 빛으로 물들고 사람들의 함성은 더욱 커져 프리아를 한낮의 경기장으로 데려간다. 흑과 백, 두 필의 말이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황제가 벗어 든 투구를 시종이 받아들었다. 흠뻑 땀에 젖은 얼굴 위로 어리는 시원한 웃음. 내 장난을 어떻게 받아칠 생각이지?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웃으며 프리아를 올려다본다. 심장이 뛰었다.
내가 왜 이러지?
퍼뜩 정신을 차린 프리아가 창문을 다시 닫아걸었다. 풀벌레 소리가 사라진 방 안에 장작 타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벽난로 옆 숨은 통로를 열어 주는 나무 패널 위로 프리아의 시선이 멈췄다. 저 벽을 열고 나가 한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곳.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세차게 고개를 저은 프리아가 내실의 문을 열었다. 들고 온 초의 불을 옮겨 촛대를 여러 개 밝혔다. 간신히 글자를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만들어진다. 요즘 지나치게 낭만 소설을 많이 읽은 탓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제에게 가고 싶다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떠올릴 리가 없지.
이것도 낭만 소설, 저것도 낭만 소설. 연애담을 피하기 위해 책장을 분주히 오가던 프리아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모험과 열정과 의리가 넘치는 기사 영웅담. 저 책을 읽으면 어지러운 머릿속도, 그 속을 떠나지 않고 있는 황제의 얼굴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미쳤나 봐.”
큰일이다. 군주를 위기에서 구해낸 프레드릭도, 용을 무찌르고 공작 부인을 구해낸 앨번도, 적과 싸워 왕국을 구해낸 아이작도, 동료를 위해 목숨을 버린 엔드류도 그리고 마상대회에서 우승한 막심까지 모두 황제의 모습으로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미친 영주의 손아귀에서 쥬느비에브를 구해낸 막심은 오직 단 한 번의 입맞춤만을 나눈 채 눈을 감는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나의 쥬느비에브. 핏방울이 떨어져 다음 문장을 붉게 물들였다.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막심의 철자가 피에 잠겨 사라진다.
“아.”
페이지 위로 번져가는 핏방울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 것임을 깨달은 프리아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피가 흘러나오는 코를 막은 손바닥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 감각을 잊고 있었다. 날이 차가워지면 몸의 독성이 더욱 날뛰었다. 알훼니아보다 먼저 겨울이 찾아오는 제국이라 발작이 찾아오는 시기가 앞당겨진 것 같다. 그래도 아직 가을인데 진행이 너무 빠르다. 제국에서의 지난 계절을 무사히, 발작 없이 보낸 대가를 이제 치르는 걸까. 남은 약은 한 알뿐. 기르의 도착은 장담할 수 없다.
거울 앞에 선 얼굴은 창백하고 인중 아래는 피가 번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전자의 물을 대야에 따라 더러워진 얼굴을 닦아 내고 침의를 벗었다.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가슴언저리에 번져 있었다. 피는 찬물에 씻겨 내려갔으나 얼룩은 마저 남아 있었다. 핏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프리아는 지친 고개를 소파 위로 기대었다.
벌써 잠들었나.
오웬은 등불을 들어 어두운 침실을 찬찬히 살폈다. 벽난로도 꺼져 있어 서늘한 방 안에 불빛이라고는 오웬이 들고 있는 등불 하나뿐이었다. 불빛이 먼 침대를 비추자 잠들어 있는 후궁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님들이 오웬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주군을 지척에서 보게 돼 흥분한 마상대회 참가자들과 의례적인 안부와 축하 인사를 건네는 친족들, 자신의 딸과 조카들을 데려와 소개하는 귀족들이 오웬을 끊임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지난 이틀의 연회 동안 자리를 일찍 떠났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서야 오웬은 홀을 떠나올 수 있었다. 시종장의 밤 시중도 거절하고 서둘러 걸어왔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가져온 장식 스카프를 꺼내 다시 상자에 넣어두었다. 이 둔한 후궁이 그것이 본인의 물건이라는 걸 눈치채기나 했을지. 잠든 후궁을 깨워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오웬은 간신히 억눌렀다.
바이런이 귀띔한 위치를 올려다보았지만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 높은 곳에 있는 후궁의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은 확실한데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오웬은 어린아이로 돌아가 형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재잘대며 자신을 봤냐고, 내가 이겼다고, 어떻게 보였느냐고 귀찮게 연신 캐묻고 싶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지 벌써 자는군.”
잠든 후궁의 곁에 누워 오웬은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자신을 좋아한다면서도 후궁은 가끔 그에게 매정하게 굴곤 했다. 가장무도회 밤의 일만 해도 그렇다. 지루한 탄신연 내내 틈이 날 적마다 후궁의 동선을 살폈던 오웬과 달리 후궁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기만 할 뿐 단상 위로 짧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오웬이 그의 뒤를 쫓아 정원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연회의 마지막 춤곡임을 알리는 시녀장의 외침소리가 그레이트홀 안쪽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생일이 언제냐고 묻는 오웬의 질문 역시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먼 불꽃에 마음을 빼앗긴 듯 한동안 말이 없던 후궁이 짧은 밤 인사를 남기고 멀어져갔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폐하. 그 이후 나타난 시종장에게 끌려 종친들과의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다 새벽이 되어서야 별궁에 숨어들 수 있었다.
아침이면 돌아가야 하니 후궁이 깨지 않는 이상은 오늘 마상대회의 감상을 들을 수 없다.
“정말 자는 거야?”
귀에 대고 속삭여 보았지만 후궁에게선 낮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수업하러 간 아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어린 날처럼 오웬은 프리아가 깨기만을 기다렸다.
꺼진 벽난로의 불을 지피고 내실에 나가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으며 무료함을 달랬다. 책장 가득 채워진 낭만 소설의 제목을 살피며 피식 웃음을 짓던 오웬이 바닥에 떨어진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다락방에 있던 내내 후궁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던 기사 영웅담이었다. 이걸 또 읽었단 말인가. 정말 어지간히 좋아하는군.
책장의 하단을 물들인 핏자국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웬이 미소 지으며 빈자리에 꽂아놓았다.
덧창만을 열어두고 창문을 다시 닫았다. 온통 검었던 밤하늘에 푸른 물이 들기 시작하는 광경을 오웬은 침대에 누워 지켜보았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처소로 돌아가야 했다.
시종장이 안다한들 무슨 일이 있겠냐마는 오웬은 이 장난스런 밀회를 누구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반응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웠으나 오후에 다시 짬을 내 들르면 될 것이다. 몸을 일으키는 오웬의 팔을 뻗어온 흰 손이 붙잡았다.
“폐하.”
짓궂은 오웬의 시선이 프리아의 얼굴로 향했다. 잠이 어린 표정이 슬픈 듯, 기쁜 듯 모호하다. 그래도 얼굴은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룻밤 동안 내내 기다렸는데 이제 일어나는군. 불손을 밥 먹듯이 하는 후궁이야.”
오웬이 기다렸던 감상 대신 다른 말이 후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 저를 싫어하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