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6)화 (77/237)

“폐하께서 여길 바라보고 계세요! 프리아 님이 여기 계시다는 걸 알고 계신 게 아닐까요?”

아래층에서도 역시 황제가 자신을 바라본다며 호들갑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갑옷을 걸치고 검은 말 위에 올라탄 황제의 모습은 기사 영웅담의 한 페이지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다. 투구 속 가려진 얼굴은 언제나처럼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꺄악거리는 소녀들의 환성이 더욱 커졌다. 눈처럼 흰 말에 올라탄 바이런이 수련관 쪽으로 고개를 들어 손키스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못 말리는 인간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프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촌이자 군신 관계에 놓인 바이런과 황제의 대결에 경기장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절친한 사이였던 두 사람의 관계에 소문의 사내 후궁이 끼어 있다는 뒷이야기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느린 속도로 경기장을 순회하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꽃비가 내렸다. 관람석 앞에 멈춘 바이런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모친 앞에 고개를 숙였다. 한숨을 쉰 대공 부인이 손수건을 내어주자 중년 시녀가 단상을 내려와 바이런 앞에 섰다. 이미 여러 여인들의 축복을 받아 남은 공간이 없는 장창 앞에서 시녀가 난색을 표했다. 시녀에게 손짓한 바이런이 투구를 벗어 손수건에 키스하더니 자신의 목에 빙 둘러감았다.

마상 창 시합에서 공격은 주로 상체 위주로 행해진다. 그중에서도 투구와 갑옷을 잇는 목 언저리는 한 번의 공격으로도 상대방을 말 위에서 떨어뜨릴 수 있어 선호되는 공격 부위였다. 간혹 부러진 창의 파편이 박혀 목숨을 잃는 일도 있어 가장 보호해야 할 부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곳에 여인의 소지품을 감는다는 것은 물건의 소유주에게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는 애정의 표현이었다.

정해진 규칙은 아니지만 적법하게 혼인한 부인 또는 정식으로 약혼한 혼약자만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모친의 손수건을 목에 감는 바이런의 행위는 아직 자신의 심장을 차지한 단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표이자 어머니에 대한 낭만적인 효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 바이런의 동작에 감동한 여인들이 이곳저곳에서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직 황후를 맞지 않은 황제가 과연 누구에게 축복을 청할까 그것 또한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후궁의 참석은 금지되었으나 이 자리에서 황제에게 축복을 요청받는 여인이 있다면 새로운 후궁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황제의 창끝이 관람석 중간에 멈추었다. 황제의 요청을 받은 린드가르트가 검은 리본을 건네자 신이 난 레온이 일어나 작은 손으로 끙끙거리며 매듭을 지었다. 한때 무성했던 소문을 떠올리는 자들과 태후가 부재중이니 서열상 린드가르트에게 청하는 것이 예법에 맞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수군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을 경기장으로 돌렸다.

“정말 아까워요. 프리아 님이 저기 계셨어야 하는데.”

유디스가 탄식하는 소리에 프리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보탰다.

“나도 아까워. 한 번쯤 참전해 보고 싶었는데.”

“프리아 님이요? 상상만 해도 심장 떨려서 안 돼요. 무서워서 어떻게 지켜보라고요?”

장창 끝에는 치명상을 막기 위해 끝을 뭉툭하게 만든 왕관 모양의 보호대가 부착되어 있었지만 부상자의 수는 끊이지 않았다. 앞선 경기에서 피를 흘리며 실려 간 기사들을 떠올리며 유디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흰 기사복을 입은 프리아 님의 모습을 보는 건 큰 유혹이지만 손끝이라도 다치시는 꼴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내가 참전하면 유디스에게 손수건을 달라고 할게.”

“그건 좋지만 그래도 안 돼요! 그리고 요청할 거면 폐하에게 하셔야죠.”

황제가 뚱한 얼굴로 손수건을 내어주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린 유디스와 프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경기 개시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목책을 사이에 두고 경기장 양 끝에 선 황제와 바이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팔소리와 함께 깃발이 내려지자 백마와 흑마가 땅을 울리며 달려나갔다. 동시에 치켜든 창끝이 서로를 겨누었다. 황제가 든 창끝이 바이런의 어깨에 부딪히자 비명을 내지른 여인들이 단상 위에서 기절했다.

“기절이 너무 빠르잖아요! 저 내숭쟁이들!”

누구보다 강심장인 유디스가 레이디들의 가식적인 태도를 규탄했다.

“그렇지 않아요? 올가 님?”

동의를 구하며 유디스가 옆을 바라보았다. 손을 모아 쥐고 경기에 집중한 올가에게선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죠? 프리아 님?”

프리아에게도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과자의 크기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얼굴을 실룩이며 웃음을 지은 유디스가 시합 대신 더욱 재미있는 프리아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았다.

부러진 창을 교체하는 동안 바이런이 손을 흔들며 여인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다시 시작된 경기에서 이번에는 바이런의 창끝이 황제의 어깨를 겨누었다. 잠시 휘청이던 황제가 몸을 바로하자 숨죽였던 사람들이 환호를 터트린다. 투레질을 하며 말들도 흥분한 숨을 토해냈다. 이어진 황제의 공격을 바이런이 방패를 들어 막아 냈다. 뒤로 밀려나며 백마가 길게 말울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수련관 위층까지 들려왔다.

다시 경기장 양끝에 선 황제와 바이런이 나팔소리와 함께 달려나갔다. 거리가 좁혀지며 맞부딪히는 두 사람의 충돌을 숨죽인 채로 지켜보던 프리아가 눈을 감았다. 엄청난 환호가 관중석에서 터져나와 귀를 흔든다.

“폐하께서 승리하셨어요!”

조금씩 눈을 뜨자 바닥으로 떨어진 바이런이 몸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말 위에서 내린 황제가 한손을 내밀어 앉아 있던 바이런을 끌어올렸다. 더 큰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다.

황제가 투구를 벗어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가 이마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황제가 목에 매고 있던 천을 풀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여인의 것인가 싶어 수군거리던 관중들이 남성용임을 깨닫고 다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황제의 마음을 가져간 여인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이다.

“어? 저거!”

테라스 아래로 길게 목을 빼고 있던 유디스가 흥분하며 손가락으로 황제를 가리켰다.

“저거! 프리아 님 거랑 똑같은 거예요. 저 레이스! 저 자수 장식! 틀림없어요! 똑같아요!”

이럴 수가! 같은 디자인은 하나뿐이라고 했는데. 사기꾼 같으니. 프리아 님 저 사기당했나 봐요. 진품이 아니었다니. 장사꾼아치 놈 내가 가만두나 봐라!

유디스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프리아는 저 아래 환하게 웃음 짓는 황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가져갔으니 유디스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대체 언제 와서 가져간 거야.

“프리아 님? 더우세요? 얼굴이 빨개지셨어요. 여기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갈까요?”

유디스의 말에 섞여 들려오던 아래층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폐하께서 이쪽을 보고 계셔!”

“폐하!”

“바이런 님!”

일부러 그런 거라는 것. 언제나처럼 자신을 놀리려는 장난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대가 좋아하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제가 언제 책 내용을 재현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폐하는…….’

‘그래, 난 기사가 아니라 영주 쪽이지. 그래서 아쉬워?’

오늘만큼은 기사가 된 황제가 프리아를 올려다보며 소년의 미소를 짓고 있다. 장난인데, 장난이라는 걸 아는데.

‘가녀린 쥬느비에브의 꽃 같은 자태와 온유한 성품에 반한 막심이 홀로 연모하다 어느 날 쥬느비에브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줍게 되는데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감춰 둔 연모를 결국 마상대회에서 드러내게 됩니다. 그날의 우승자인 막심의 장창에 달린 자신의 손수건을 발견한 쥬느비에브의 가슴이 기쁨으로 떨리는 그 장면이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기사 영웅담의 한 페이지가 프리아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울려 퍼졌다.

‘사실 쥬느비에브도 막심을 연모하고 있었던 거죠.’

몸을 지탱하고 있는 철제 난간을 세게 움켜잡았다. 심장이 아플 만큼 뛰었다.

* * *

“프리아 님, 이제 괜찮으세요? 오늘 해가 너무 따가웠나 봐요.”

높이 떠오른 탓에 테라스 안까지 들어왔던 햇살을 원망하며 유디스가 자신의 손을 들어 프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이제 열은 좀 내리신 거 같아요. 저희는 물러갈 테니 푹 쉬세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설렁줄을 당겨 주시고요.”

침대 옆 촛대만을 남기고 방의 불을 모두 끈 유디스가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프리아 님 스카프는 어디로 간 걸까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있었던 거 올가 님도 보셨죠? 이사벨 님은 관심 없어서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뒤풀이 연회까지 참석하고 밤늦게야 백조궁으로 돌아온 이사벨을 쏘아보며 유디스가 다시금 의문을 제기했다.

“어딘가에서 나오겠죠.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손을 들어 나오는 하품을 가리며 이사벨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사촌의 소개로 알게 된 기사와의 대화가 너무 즐거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원래 급하게 찾을 때는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요. 내일 다시 찾아보세요. 나올 거예요.”

차분한 목소리로 올가가 대답했다. 내일 아침까지 스카프는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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