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5)화 (76/237)

부상자가 속출하는 마상 창 시합을 보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의젓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기 규칙에 서투른 탓에 연신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질문하는 어린 조카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황제와 어머니인 린드가르트를 번갈아 올려다보는 아이의 표정에는 자부심과 설렘이 담겨 있었다.

검은 베일로 가려져 있어 린드가르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흥분한 레온이 팔을 붙잡고 말을 걸어와도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늘 차분한 자신의 수행시녀를 떠올린 프리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합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묵묵히 관람석에 시선을 고정한 올가의 모습이 보였다.

“린드가르트 님은 어떤 분이셔?”

언젠가 유디스에게도 물었던 질문을 프리아가 올가에게 되풀이했다.

“정말 좋은 분이세요. 저는 그분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어두워지는 그녀의 표정을 본 프리아가 차마 사연을 묻지 못하고 시선을 경기장 쪽으로 돌렸다. 연이어 승리를 기록한 젊은 기사가 관중의 환호에 답례하고 있었다.

알훼니아에서도 마상 창 시합은 자주 열리는 행사였으나 이토록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기사들의 실력 또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장창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사의 솜씨를 보며 프리아가 감탄을 토해냈다. 후궁의 천진한 얼굴과 관람석에 앉은 린드가르트의 검은 베일을 번갈아 바라보며 올가가 쓴웃음을 지었다.

남작의 서녀로 그녀가 태어났을 때 이미 집안의 재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열아홉이 되자 부친에 의해 궁으로 보내졌다.

황제를 위로할 순결한 처녀가 필요하다는 먼 친척의 제안에 그는 아끼던 적녀 대신 서녀인 그녀를 떠올렸다. 여성 편력이 심하던 황제의 정부 자리로 제 딸을 밀어 넣으면서 금방이라도 출세가도가 열릴 것이라 기대한 어리석은 남자였다. 그 많은 귀족 처녀들을 제치고 적녀도 아닌 서녀인 올가에게 기회가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는 몰랐을 것이다.

비공식적인 정부를 후궁으로 승격시켜 줄 황제는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으며 다리 사이에서 악취를 풍기는 물건 역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잠든 노인의 탕파로 쓰일 뿐인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문안인사를 올리고 돌아가는 젊은 황태손과 하루 한 번 스쳐지나가는 그 시간만이 그녀에게 유일한 삶의 기쁨이었다.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자 남작은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신분을 보장받으라 종용했다.

기억조차 희미해지기 시작한 황제는 매일 그녀의 이름을 묻고 다음 날이면 존재조차 잊어버렸다. 이름이 무어냐. 보석을 주마. 내 너를 황후로 삼을 것이다. 내 아들을 아느냐? 아론은 왜 오지 않느냐. 이름이 무어냐. 춥다 추워. 몸이 떨리는구나.

공인된 신분이 아니었기에 기록에도 남지 못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정부로도, 시녀로도 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체류 허가를 받지 못해 집에 돌아가야 했으나 더 지독한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궁 안을 유령처럼 떠돌던 그녀를 구원해 준 사람이 린드가르트였다. 인적이 드문 유폐궁에 숨어들어 부엌을 뒤지다 도둑으로 몰려 끌려가던 그녀를 린드가르트가 구해 주었다. 올가는 그녀 앞에 엎드려 울며 매달렸다. 정부도 남작의 서녀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궁 안에 머물고 싶을 뿐이었다. 하루라도 더 황태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된 그를 지켜볼 수 있도록.

그녀의 발칙한 소원을 린드가르트가 들어주었다. 먼 친척으로 소개해 신분을 세탁해 주고 처소의 시녀로 임명해 있을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존재감이 없던 탓일까, 황궁의 그 누구도 선황의 어린 정부를 기억하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답기만 한 이 사내에게 황제가 정말 마음을 주었을까. 올가의 냉정한 시선이 프리아의 이마로 향했다. 황제만을 생각하며 수놓았던 손수건이 없어졌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깨달았다. 머물렀던 자리를 샅샅이 뒤지며 거슬러 올라간 끝에 후궁의 내실에 다다랐다.

소파 밑에 떨어져 있는 손수건을 발견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때, 침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이 든 후궁은 여간해서 깨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몸이 불편한 것일까. 올가는 침실의 문을 비스듬히 열어 안을 엿봤다.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가 방 안을 희붐하게 비추었다. 키 큰 사내의 뒷모습이 올가의 눈 속에 떠올랐다. 수십 번을 뒤돌아 한참을 바라보았던 그 모습이다.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방 안을 뒤지던 황제가 상자를 열어 레이스 장식이 달린 스카프를 꺼내들었다. 햇살 아래 스카프를 펼쳐 비춰보다가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올가에게로 황제가 걸어왔다. 몸이 굳은 그녀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을 때 황제가 방향을 틀어 침대맡으로 향했다. 잠든 후궁의 이마에 입을 맞춘 황제가 벽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올가는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져 줄까?”

갑옷을 착용하기 위해 천막으로 들어간 오웬의 뒤를 바이런이 따라왔다. 능글맞게 웃으며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오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근신은 어제까지였을 텐데. 황명을 잘도 어기는군.”

“아, 봤어? 아는 척 하지.”

정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익명인 가장무도회의 장점을 살려 어제부터 황궁에 와 있었던 바이런이 능청을 떨었다.

“춤 추느라 발이 땅에 붙어 있을 새가 없더군.”

“그 정도는 봐주십시오, 폐하. 한 달간 자택 연금 신세였지 않습니까. 좀이 너무 쑤셔서 죽을 뻔했다고요.”

“집에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애인이 그렇게 늘었어?”

시종장이 일러바친 소문을 들어 바이런의 근황을 파악하고 있던 오웬이 끊이지 않는 염문을 지적했다.

“아니, 찾아오는 사람까지 막을 수는 없잖아. 면회까지 금지시키면 이 사촌 죽습니다.”

누구보다 건강한 얼굴로 엄살을 떨어 대는 사촌 형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오웬이 시종의 갑옷 시중을 받았다. 전 대회 우승자인 바이런과 황제의 시범 경기가 곧 수련장에서 펼쳐질 예정이었다.

“져 주지 않아도 내가 이겨.”

자신만만한 사촌 동생의 태도에 바이런이 과장된 동작으로 놀란 시늉을 해 보였다.

“그 얘기 진짜였구나. 맹독을 쓰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폐하께서 이 가련한 바이런을 전갈의 독을 이용해 없애려고 하신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이고, 무서워라.”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너무 무섭다. 기권해도 돼?”

시범 경기에서 암살이라니. 이 무슨 터무니없는. 오웬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염문의 대가이자 엄살의 대가인 사촌 형과 얽힌 덕에 어느새 파렴치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형님은 감탄했다. 마냥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넘치는 정력도 과시하고 연애하느라 온 궁 안을 들었다 놨다 하고.”

박수까지 쳐가며 감탄하는 바이런의 말에 오웬이 쓰고 있던 투구를 들어올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도 몸 좀 생각하면서 해. 네 몸 말고 내 친구 몸. 순수하게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야. 나는 이제 아무런 사심이 없어요.”

자신을 노려보는 오웬의 시선에 바이런이 손사래를 쳤다. 질투가 가끔은 연심의 도화선이 되어 줄 때가 있다. 장서관에서의 사건이 얼음 같던 사촌동생의 마음을 깨부수었건, 녹였던 간에 관계를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어 준 것만은 분명하다.

“내 후궁의 몸을 왜 경이 걱정하지?”

다시금 삐딱해진 오웬의 말투에 등골이 서늘해진 바이런이 천막 밖으로 뒷걸음쳤다.

“제국의 한 사람으로서, 결백하고도 참된 우정의 지기로 황실의 귀하신 분을 걱정할 수도 있죠. 부디 전갈만은 내려놓으시고. 정의롭게 시합에 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폐하.”

천막 입구로 사라졌던 바이런이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실 이걸 말하려고 온 건데. 제비궁 아니 이제 백조궁 주인은 수련관 맨 위층에 계십니다요.”

그걸 왜 형이 아는데?

다시 차가워지는 오웬의 시선을 받으며 바이런이 자신의 천막을 향해 줄행랑쳤다. 준비를 마친 오웬이 천막을 빠져나왔을 때 장창을 든 시종들이 서로 창 끝에 닿지 않으려 애쓰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전갈은 아니더라도 간지러움을 불러오는 나무 진액이라도 발라놓을 것을. 오웬이 뿔난 얼굴로 수련관 위층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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