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4)화 (75/237)

귀부인들은 이날을 위해 미리 드레스를 맞추고 꽃과 손수건을 준비해 관람석에 올랐다. 뛰어난 실력과 체력을 갖춘 신진 기사들이 자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여인을 찾기 위해 관람석으로 그 뜨거운 눈길을 돌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미리 눈여겨 두었던 여인에게 다가가 행운의 부적을 부탁했으며 그녀들은 못이기는 척 수줍음을 연기하며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머리 리본을 풀어 기사들의 창에 묶어 주었다. 빼어난 외모를 지닌 레이디의 경우 여러 명의 기사에게 호명되는 일 또한 잦았기에 마상대회는 참가한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인들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명예를 한껏 드높일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수 미터에 달하는 장창을 수평으로 들고 경기에 임하려면 근력 또한 필수였기에 기사들은 수련 또한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공격당한 상대방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기권을 선언하기 전까지는 시합이 끝나지 않았다. 

부러진 나무창에 찔려 치명상을 입는 경우도 있어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심약한 숙녀들이 기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녀들은 유모의 다급한 부채질과 병에 담긴 암모니아의 냄새를 맡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사기네! 사기야!” 

갈색 머리를 곱게 땋아올린 한 레이디의 기절에 분노한 유디스가 난간 밖으로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깡이 어찌나 센지 쟤가 떴다하면 다 큰 남자애들까지 도망갈 정도였다고요. 기저얼? 내숭도 정도껏 떨어야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안 그래요? 프리아 님?” 

“유디스, 그러다 떨어지겠어.” 테라스 바깥으로 몸을 내민 수석시녀의 허리를 잡아 의자에 앉히면서 프리아가 뿔난 그녀를 도닥였다. 동갑내기 앙숙의 출현에 발을 동동 구르던 유디스가 다시금 불만을 터트렸다. 

“이건 불공평해요. 그렇게 위험하고 잔인하면 저 여자들도 다 보지 말라고 했어야죠. 저 여자들은 전용 관람석까지 따로 마련해 주고서는 우리들 보곤 참석하지 말라니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요? 저기 보세요. 어린 애들도 있다니까요?” 

과거, 마상대회에서 기절한 후궁이 황제의 관심을 끌어 총애를 받게 되자 그 이후 후궁들이 앞다투어 기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심약하고 가녀린 후궁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상대회 참석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관례라는데 어쩌겠어. 그리고 여기서도 아주 잘 보이는 걸.”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구요. 이사벨은 저기 앉아서 보고 있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 유디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사촌이 출전한다잖아. 앞에서 응원해 줘야지.” 

“폐하도 출전하시잖아요. 사촌 때문에 예외라면 프리아 님은 더더욱 예외로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장 전망이 좋은 특별관람석은 황족과 고위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어 일반석에 앉을 수밖에 없다며 이사벨은 투덜거렸지만 자리조차 잡지 못하고 경기장 바깥에서 깨금발을 딛고 선 관중들이나 나무 위에까지 올라간 아이들에 비하면 호사나 다름없었다. 

“여기도 좋아. 해도 피하고 바람도 피하고 먹을 것도 있잖아?” 

단내가 풍겨 나오는 과자를 한입 베어 문 프리아가 다른 과자를 집어 유디스의 입에 넣어주었다. 우물거리면서도 뾰로통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유디스가 홍차 잔을 들어 냉수처럼 들이켜다 켁켁거린다. 

황후가 아닌 후궁의 참석은 관례상 금지되어 있다며 미안해하던 시종장이 시종관을 통해 알려 준 장소가 바로 이곳 수련관이었다. 탄신제 기간에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지만 평소에는 수련장으로 쓰이는 무투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다만 숨겨진 명소라 조용하고도 쾌적하게 관람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시종장의 말과는 달리. 

“꺄악! 세드릭 백작님!” 

“백의 기사니임!” 

“안즈 후작님 좀 보셔요. 작년보다 더 멋있어지셨어요!” 

“제 행운을 드릴게요오! 르완 자작니임!!” 

각 층에 위치한 테라스는 이미 몰려든 소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어쩜, 바이런 님 수척해지신 것 봐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그리 마음 아파하셨다더니.” 

“저러다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려고 폐하가 부르신 게 아닐까요?” 

“연적을 해치우려고요? 어머나, 세상에!” 

“폐하께서 창끝에 독을 발라놓으라고 몰래 일러놓으셨다는 얘기가 있어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녀들의 잡담에 이번엔 프리아가 난간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꺅꺅거리는 소녀들의 대화가 숨 쉴 틈 없이 이어진다. 

“그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도 시키지 아니하시고 손수 바르셨다고 해요.” 

“전갈 열 마리의 꼬리를 잘라 만든 맹독이라지요?” 

“저도 들었는데, 제가 들은 건 다른 거예요. 우승자에게 내리는 포도주. 거기에 타 넣으실 계획이라고 들었어요.” 

“그게 다 그 사내 후궁이 뒤에서 조종을 해서 그렇다잖아요.” 

“그렇게 남색을 싫어하시던 분이……. 저주에 걸리신 게 틀림없어요.” 

뒤를 이어 화제가 흑마술사 후궁에게로 흘러가자 그러면 그렇지, 피식 웃음을 지은 프리아가 고개를 들어 축복을 받다 못해 레이디들의 꽃비를 맞고 있는 바이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수척해지긴. 삼시 세끼를 보양식으로 먹었는지 얼굴에서 빛이 난다, 빛이. 

오늘에서야 황궁 출입을 허락받게 된 바이런이 경기장에 나타나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근신 기간 동안 남는 체력을 외모 치장에 쏟아 부었는지 전보다 더욱 미끈해 보이는 바이런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수련관을 알려 준 것은 시종장이지만 시야를 가리는 나무들 하나 없이 넓고 쾌적한 최상층의 객실을 마련해준 것은 바이런이었다. 테라스에 놓인 안락의자와 테이블 위의 과일 바구니, 고급스러운 티 푸드 역시 또한 바이런의 솜씨였다. 

말을 전하러 온 시종은 감사를 표하는 프리아에게 그분께서는 우정의 표시로 입맞춤한 행커치프만을 원한다 하였다. 유디스의 결사반대로 입은 맞추지 않았지만 자주 쓰는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그 손수건은 현재 저 뺀질거리는 면상의 오른 손목에 묶여 있다. 

바이런의 장창은 이미 뭇 여인들이 앞 다투어 선사한 손수건과 리본으로 인해 경기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곤란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 모습마저 섹시해 미쳐 버리겠다며 가슴을 쥐어뜯는 소녀떼들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그냥 친구 사이이신 거 정말 맞는 거죠? 그야 저는 프리아 님을 믿지만 바이런 님은 통 믿을 수가 없어서. 저 분이 어떤 분이시냐면…….” 

삼각, 사각, 오각, 팔각, 십이각으로까지 이어지는 바이런의 염문을 늘어놓던 유디스가 눈을 빛내며 프리아에게 손짓했다. 

“저기 좀 보세요, 프리아 님. 폐하가 오셨어요!” 

황제의 등장에 기립했던 귀족들이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는 광경이 내려다보였다. 일찍부터 경기 참가를 공언했던 만큼 황제는 검은 무예복을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단상을 향해 오르는 황제의 걸음마다 흠모를 담은 눈동자와 흥분에 가득 찬 속삭임이 뒤따랐다. 

황제의 매력적인 용모와 훤칠한 몸매에 대한 아래층 소녀들의 감탄사를 흘려들으며 프리아가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시녀에게 손짓했다. 어느 자리에서건 사양하듯 뒤로 몸을 숨기는 습관이 있는 올가였다. 내어준 옆자리에 망설이던 그녀를 성질 급한 유디스가 눌러 앉혔다. 

“올가 님은 너무 음전하세요. 축제잖아요. 어제도 방 안에서만 계셨으니. 오늘은 좀 즐기세요. 이렇게 많은 기사님들을 볼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요? 마음에 드는 분이 계시면 저에게 말씀만 해 주세요. 뒤풀이 연회에서 살짜쿵 연결시켜 드릴 터이니.” 

수줍은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황제를 발견한 눈동자에 어리기 시작하는 이채가 소녀다웠다. 황제의 걸음을 따르던 올가의 눈이 한 지점에서 멈췄다. 

“린드가르트 님이세요.” 

황제의 자리 좌우로 마련된 상석에는 프리아가 본궁에서 만나 우정을 맹세했던 꼬마 레온과 검은 옷의 상복을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그녀가 레온의 손을 잡고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자 관중석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공식 행사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전 황손비 린드가르트가 수년 만에 관중 앞에 선 것이다. 

화려하게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들과는 달리 소박한 검은 상복을 갖춰 입은 그녀의 차림새와 의연한 태도가 외려 관중들의 눈길을 끌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는 그녀의 묵묵한 애도에 눈물을 훔치는 중년 여인들도 있었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뿔피리 소리가 울려 시합 재개를 알렸다. 

“불세출의 영웅 호른의 영주 워릭이 출전합니다!” 

“그에 맞서는 젊은 피 퀴린의 기사 로저의 등장입니다!” 

문장관의 호명과 함께 등장한 두 명의 기사가 느린 속도로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여인들의 축복을 받았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든 시종이 경기장 양 끝에 서 힘껏 깃대를 흔들며 응원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영주 부인을 대신해 관람석에 자리한 젊은 딸이 아비를 응원하며 영주의 장창에 리본을 매주었다. 기사 로저는 자신이 모시는 노년의 백작부인에게로 가 손수건을 청했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대결이었다. 연륜과 패기, 젊음과 관록이 충돌한 대결은 기사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승자는 패자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단 하나의 소원을 요구할 수 있었으나 대개는 상대의 갑옷과 준마, 약간의 배상금을 받아가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상식이었다. 패배를 인정한 영주가 기사에게 악수를 청하기 위해 다가서자 젊은 기사가 돌연 한쪽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곧이어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영주가 관람석을 향해 손짓하자 그의 젊은 딸이 나는 듯이 달려와 기사의 품에 안겼다. 관중들이 좋아하는 해프닝 중 하나로, 연인의 시련과 행복한 결말의 쟁취였다. 

그보다 더 좋아하는 눈요기로는 지금 눈앞에 펼쳐지듯이. 

“형님의 원수! 오늘이야말로 갚아 주마!” 

“누가 할 소리! 건방진 네놈의 상판을 보기 좋게 갈아 주마!” 

“오늘부로 네놈의 가문은 패배자의 증명이라 불릴 것이니!” 

“이노옴! 3년 전 마들린에서의 사기도박을 기억하느냐!” 

“내 누이를 희롱한 죄 죽어 마땅하니! 덤벼라!” 

“내 집 문에 오줌을 갈긴 것이 네놈이렷다!” 

가문의 원수, 불륜이 얽힌 치정, 해묵은 또는 사소한 시비가 곁들여진 요란한 싸움판이었다. 누가 잘했네, 잘못했네 관중들은 끄덕거리며 어느 한 쪽을 응원했고 주머니를 풀어 판돈을 내걸었다. 하나의 경기가 끝날 때마다 판돈을 표시하는 종잇조각이 관람객 사이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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