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3)화 (74/237)

발밑에서 젖은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텝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몇 번이나 서로의 발을 밟고 나서야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자 몸에 익은 자세대로 서로를 끌어가려고 했으니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후궁 노릇을 하고 있지만 여인의 위치에서 사내와 춤을 추어본 경험은 없는 프리아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멈춰 선 프리아의 손을 끌어 자신의 등 뒤로 가져간 오웬이 프리아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다음 동작을 재촉했다.

황제에게 여인의 포지션을 취하게 해도 되는 걸까. 누가 보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지. 고민에 빠진 프리아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오웬이 먼저 발을 움직이며 말했다.

“어렸을 때.”

얼떨결에 몸이 반응해 익숙한 스텝을 밟아가며 프리아가 오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서의 연습 상대를 해 주느라 익히게 되었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손위 형제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오웬이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린드가르트의 발을 밟으면 안 된다고. 연회가 있기 전날이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예행연습을 하기까지 했어. 그러니 너도 내 발을 밟지 않도록 하여라.”

벌써 여러 번 밟혔으니까.

그렇게 덧붙이는 오웬의 얼굴이 비로소 제 나이다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수려한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며 프리아가 오웬의 손을 맞잡고 걸음의 속도를 높여 갔다.

어디선가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수풀 너머에서 연인들이 속살거리며 밀어를 나누는 소리도 들려왔다. 잔잔한 왈츠곡에 맞춰 몇 번이나 정원을 맴돌았다. 한꺼번에 피어난 꽃들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향기를 뿜어냈다.

허공을 떠다니는 것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라고 프리아는 생각했다. 나무 그늘 아래, 아무도 모르게 황제가 그의 후궁과 춤을 추고 있었다.

“네 생일은 언제지?”

오웬의 물음을 들은 프리아가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어려운 질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한참 말이 없던 프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겨울입니다.”

돌아온 간단한 대답에 오웬이 다시금 구체적인 날짜를 되물었다.

“겨울이라 함은 언제를 말하는 것이지?”

“첫 서리가 내릴 때 즈음이기도 하고 가끔은 첫 눈이 내릴 때이기도 합니다.”

“첫 서리라 하면 머지않아 곧 내릴 터인데?”

“제국과는 기후가 다르니까요. 겨우내 눈 한 번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일도 잦습니다. 제 고향에 첫 서리가 내릴 때쯤이면 제국은 한겨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정확히 언제라는 거지?”

다시 돌아온 물음에 프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이자 어머니의 기일이 된 그 날짜를 프리아는 좋아하지 않았다. 몸의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게 된 후에는 죽음으로 가는 초읽기라도 하는 것 같아 더욱 피하고 싶었다.

“특별한 날짜를 기념하진 않았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한해를 잘 보냈다, 무사히 보냈다 하고 그때서야 기르와 축하하곤 했으니까요.”

프리아의 입에서 다시 나온 이름에 오웬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기념하지 않지? 그러는 게 알훼니아 풍습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 날짜에 생일을 챙기죠.”

“그러면 왜 그리하는 것이지? 이유를 말해봐.”

집요한 오웬의 질문에 프리아가 난처한 듯 웃어 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제가 태어난 날이 어머니의 기일이라…….”

그런 이유라면 이해할 수 있다. 오웬 자신에게도 아서의 기일은 그저 고통과 후회로 보내는 날일 뿐이었으니.

“그렇다면 이제부터 네 생일은 첫눈이 오는 날로 하지.”

기르라는 자와 같은 시기를 택하기보단 더 빠른 날짜가 좋았다. 제멋대로 통보하는 오웬의 발언에 프리아가 반문했다.

“예? 제 생일을요?”

“올해 받은 선물에 대한 보답을 크게 해 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황제의 말에 담긴 뉘앙스를 뒤늦게 깨달은 프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밤의 기억이 몰려와 귀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일 경기 출전이 있어 오늘밤은 안아 주지 못하니 아쉬워도 참아.”

아쉽긴 누가 아쉽다고. 얄미운 황제의 발언에 프리아가 실수인 척 오웬의 발을 세게 밟았다. 아야, 아쉬워서 그래? 오웬의 놀림에 프리아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번 건 진짜 아파. 그만!

까만 하늘 위로 불꽃이 솟아올랐다. 연회의 끝을 알리는 축포다. 빛의 분수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대지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 테라스로 몰려와 환호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빛의 잔해가 어지럽게 떠다닌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황제의 얼굴 위로 금빛 섬광이 흘러내렸다.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오웬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 위로 번지는 빛의 궤적을 프리아는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웬의 시선 아래 프리아의 머리카락이 오색빛으로 물들었다. 흔들리는 빛 속에서 오웬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숨결을 프리아에게 넘겨주었다.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가운데 입술을 맞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땅위로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 * *

“분명히 여기 두었는데 없어졌다니까요. 정말 프리아 님이 치우시지 않으셨어요?”

아침부터 분주히 옷이 담긴 궤짝과 옷장의 문을 여닫던 유디스가 프리아를 향해 물었다.

“있는 줄도 몰랐는걸. 그냥 다른 걸 쓰면 안 돼?”

“어쩌면 따로 자리를 내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거금을 내고 구해 온 귀한 물건인데 하필 지금 사라지다니요. 다른 궁의 첩자가 와서 훔쳐간 게 아닐까요?”

“다른 궁에서 가져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여인들 물건도 아닌데.”

“그러니까요! 미치고 팔짝 뛰겠어요!”

간신히 며칠 전에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악센다르산 장식 스카프다. 일급 장인이 손수 제작한 것으로 우윳빛 나는 실크 원단에 테두리를 섬세한 레이스 장식으로 마감했으며 한정 넘버링 자수까지 놓여 있는 최고급품이었다.

어젯밤 프리아의 의복시중을 들면서 다시금 맞춰보느라 드레스룸에서 상자를 꺼내왔는데 그 이후에 어떻게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것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거늘 그 물건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어제 매어드릴 것을 그랬어요. 무도회도 좋지만 주목도는 오늘이 더 높으니까 아껴두었던 것인데……. 꼬장꼬장한 할배 같으니! 그놈의 관례가 뭐라고!”

하녀들을 들볶던 유디스의 분노가 시종장에게로 향했다. 황제의 참가가 예정된 오후 마상시합의 특별관람석은 모두 배정이 끝나 있어 제아무리 총애 받는 프리아 님이라 하여도 따로 자리를 내어줄 수 없으며 관례상 후궁의 관람석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는 말을 이제 막 시종관에게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시합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수련관의 테라스를 귀띔받기는 했지만 다른 후궁들도 이미 소문 듣고 몰려가 있는 수련관에 좋은 자리가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행방불명된 장식 대신 두 번째로 값나가는 레이스를 프리아의 목에 두르며 유디스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명중이오!”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도끼의 번쩍이는 날이 붉은 색으로 칠해진 가장 안쪽의 원에 꽂히자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도끼날에 새겨진 가문의 문장을 다시금 확인하며 심판관이 점수를 소리 높여 외치자, 승리를 확신한 참가자가 서너 살 먹은 아이의 머리통만 한 팔 근육을 자랑하듯 흔들어 보였다.

황제의 탄신제 그 셋째 날을 맞이한 제국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궁 안팎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개방된 대정원의 분수대에서는 실시간으로 연주되는 악단의 음악소리에 맞춰 높낮이를 달리한 물줄기가 창공을 향해 솟아올랐으며 경치가 좋기로 소문난 장소들마다 티 테이블이 빼곡하게 놓여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이 의자를 챙겨든 시종들과 피크닉 바구니를 품에 안은 시녀들이 제 주인들의 뒤를 따랐으며 나무그늘 아래에서는 연극적인 어조로 소네트를 낭송하는 음유시인을 둘러싸고 감탄을 연발하는 귀족여인들의 과장스런 제스처가 화답하듯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시작하려나 봐요! 프리아 님.”

난간 아래쪽을 향해 길게 목을 빼고 내려다보고 있던 유디스가 프리아를 소리쳐 불렀다. 마상경기에 앞서 진행되었던 투부投斧대회의 참가자들이 대개 근육질을 자랑하는 거한들이었던 까닭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소녀들도 단숨에 창문가로 몰려들었다. 마상 경기 결승전이 시작된 것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기사들이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경기에 참전했으며 그 숫자는 수천 명에 달하였다. 단체전을 거쳐 그 수가 걸러진 기사들이 본선경기에 참가했고 이윽고 그 수가 수십으로 줄어들자 장소를 바꿔 셋째 날 오후에 수련장에서 결승을 치르게 된 것이다.

경기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승자가 호명될 때마다 해당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방패가 깃대에 걸려 제 주인의 승패에 따라 상승과 하강을 함께했다.

경기장 바깥에 세워진 수십 개의 천막 앞에는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깃발이 명패처럼 꽂혀 있었으며 기사의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온 시동과 시종들이 기싸움을 벌이며 자기들 나름대로의 전투를 이어갔다. 문장관도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먼 지방에서 온 무명의 기사들은 대개 단체전에서 탈락하기 일쑤였으나 선전을 거듭해 본선까지 진출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에 기사들은 엄청난 여행경비를 감내하며 수도로의 진출을 꿈꾸는 것이었다.

귀족 소녀와 그 어미가 사교계 데뷔를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것처럼 기사들 또한 상품의 갑옷과 투구, 무기 마련에 온갖 힘을 쏟았다. 빼어난 준마뿐 아니라 준마에게 입힐 장식 안장 또한 필요했다. 값비싼 자수로 수놓은 장식 안장은 그 길이가 말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젊은 날의 영광을 회상하며 영주들은 자신들이 거느린 기사들의 참전을 적극 권유했고 아낌없이 지갑 또한 열어보였다. 각 가문의 자존심을 건 대리전이나 다름없었기에 마상경기가 끝나면 과장을 섞은 무용담이 먼 시골의 선술집에까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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