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 이틀째를 맞은 그레이트 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귀족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장무도회라고는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분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껏 차려입은 연회복에 깃털 장식, 혹은 보석을 덧댄 가면을 쓰는 것으로 구색을 맞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쪽 눈만을 가린 안대에서부터 눈 주변만을 가린 가면, 뺨 중간까지 내려오는 가면, 입술만 드러낸 가면, 턱 끝까지 얼굴 전체를 가린 가면 등 다양한 가면들이 존재했으나 정체를 완벽히 숨기기는 어려웠다. 들고 있는 쥘부채와 가슴에 매단 브로치를 통해 한껏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인들이 주변을 의식하며 부채를 흔들어 보일 때마다 수놓인 이니셜이 드러났으며 사내들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빛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껏 서로를 모른척하며 보장된 일탈을 즐기기 위해 연회장으로 모여들었다. 서로를 무명씨라 부르며 평소 마음에 두었던 이성에게 접근해 춤을 신청하고 낯간지러운 대화를 나누다 급기야는 빈 객실 혹은 풀숲으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홀 구석에서는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소녀들이 연회의 왕자, 연회의 카리스마, 연회의 연금술사 바이런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폐하께 근신을 명 받으셨다는 소문이 사실일까요?”
“무슨 잘못을 하셨기에 그리 친하시던 폐하의 노여움을 사시게 된 걸까요?”
“그 사내 후궁에게 홀리셨다는 소문이 있어요.”
“어머, 망측해라.”
“바이런 님께서 궁에 코빼기도 비추시지 못하는 동안에 폐하께서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만든 대저택을 후궁에게 하사하셨다고 해요.”
“저도 들었어요. 성 안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위에는 금과 은으로 조각한 곤돌라가 떠다닌다면서요?”
“시중드는 사람만 수백 명에 전용 재단사와 미용사까지 두고 있대요. 사비나 컬렉션의 최상위 라인이 시중에 풀리지도 않는 이유가 다 그 후궁에게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라지 뭐예요.”
“폐하께서 어찌나 총애하시는지 늘 안고, 업고 다니시는 통에 땅에 발을 디디지도 못한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어머나 세상에!”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소리가 나올 줄 알았어.
기둥 뒤에 숨어 소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궁에서는 아침나절에 재채기만 해도 저녁이면 부고가 되어 돌아온다더니, 별궁에 대한 소문은 한껏 부풀려져 이제는 그 크기가 본궁만 하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본궁 두 배만한 크기로 증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용 재단사에 전용 미용사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 요란스러운 백작 부인들 또한 그날 이후로는 마주칠 일도 없었다. 드레스를 입는 끔찍한 경험은 그날 하루만으로 족했다.
가장무도회만은 꼭 참석하셔야 한다며 수행 시녀들이 하도 잔소리해 대기에 와봤건만 시끄럽고 사람 많고 어딜 가나 자신에 대한 험담이 흘러나와 프리아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하기만 했다.
“아니, 왜 숨어 계시는 거야. 중앙으로 나가세요! 과감하게 진출하시는 겁니다!”
프리아가 한사코 거부하는 통에 준비했던 의상을 입혀 드리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쉬워 발을 동동 구르며 유디스가 한탄했다.
“부끄러우신가 보죠.”
화려한 공단으로 몸을 감싼 이사벨이 가문의 문양이 수놓인 부채를 우아하게 흔들며 대답했다.
“프리아 님이 부끄러우실 게 뭐가 있어요!”
발끈해 반박하는 유디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이사벨이 곱게 늘어뜨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어딜 가나 프리아 님 얘기뿐이잖아요. 대저택을 받았네, 폐하께서 바이런 님과 칼부림을 했네, 안 했네.”
“할일들도 참 없나 봐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릴!”
별궁에 남기를 자처한 올가와는 달리 무도회를 한껏 고대하고 있던 두 소녀, 유디스와 이사벨이 프리아를 졸라 연회에 참석했다.
“우리 프리아 님이야말로 미의 신 그 자체이신데······.”
자신들의 곁을 유유히 지나가는 귀족 소녀의 화려한 옷차림을 곁눈질하며 유디스가 중얼거렸다. 여신으로 가장한 소녀들이 더러 눈에 띄었지만 프리아 님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수준이었다.
“여기 있는 어떤 레이디보다 우리 프리아 님이 더 우아하고 아름답고 기품이 넘친다는 것을 폐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구요.”
탄식하는 유디스가 슬슬 짜증나기 시작한 이사벨이 눈을 흘겼다. 병이다, 병. 시녀가 아주 천직인가 보지?
“그래도 저는 지금 입으신 옷차림이 잘 어울린다 생각해요.”
유디스와의 실랑이를 거쳐 간신히 타협된 옷차림이 바로 눈처럼 흰 실크 연미복이었다. 가장무도회라 색이 옅은 가발을 착용한 사람들이 더러 있어 평소 눈에 띄던 밝은 금발머리도 오늘은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 섞일 수 있었다.
“그거야 당연하죠. 뭘 입으신들 어울리지 않으시겠어요?”
금사와 은사를 퍼부어 완성한 번쩍이는 연미복을 입혀 드리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흰 슈트 또한 프리아 님의 푸른 눈과 멋진 조화를 이루어내 고아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러고 서 계시니 낭만 소설에서 빠져나온 이국의 왕자님 같기도 하고.
“어련하시겠어요? 알았으니까 그만하세요. 저는 잠시 자리 좀 비울 테니.”
유디스의 말을 끊은 이사벨이 이제야 도착한 사촌 오라비의 모습을 발견하고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뛰쳐나갔다.
“유디스!”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대는 느낌에 내려다보니 트루바니아 공녀 마가렛이었다. 핑크색 드레스 차림에 눈 주변만을 가린 레이스 가면을 쓴 마가렛이 고개를 갸웃하며 유디스에게 프리아의 행방을 물어왔다.
“프리아 님은 어디 계셔? 유디스?”
저기 계세요. 저 기둥 뒤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가렛이 유디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숨어 있는 프리아를 잡아끌어 연회장 안쪽으로 데리고 나오더니 앙큼하게도 손을 내밀어 자신과 춤을 추어 달라 청한다.
때마침 음악이 바뀌자 가벼운 몸놀림으로 춤을 추기 시작하는 마가렛과 프리아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인형처럼 차려입은 꼬마 아가씨가 아닌, 늘씬한 몸에 백조처럼 흰 예복을 차려입은 금발 청년 쪽이었다.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공단 가면으로 인해 푸른 눈동자와 붉은 입술, 유려한 선을 자랑하는 턱선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예사 미모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청년의 이마를 덮는 모습을 여인들이 경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어린 소녀만을 향하고 있는 모습에 소녀들이 질시의 눈빛을 보낸다. 길게 뻗은 다리와 곧은 자세에서 흘러나오는 우아한 동작에 뭇 사내들의 시선도 고정되었다.
“어쩜, 우아하기도 해라.”
“어느 나라에서 온 왕자님이실까요?”
눈앞의 청년이 소문의 사내 후궁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저 타 공국에서 온 신분 높은 사절이려니 생각한 사람들이 진심 어린 감탄을 프리아에게로 보냈다.
냉랭한 표정으로 단상 아래를 둘러보던 젊은 황제의 시선이 홀 구석에 멈추었다. 그의 후궁이 나이 어린 공녀와 짝을 맞추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웬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져나갔다. 어두운 가면 속에 가려진 그 웃음을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가렛에 이어 유디스와의 춤을 끝낸 프리아가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런 프리아의 어깨를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돌아선 프리아의 눈앞에 남장을 한 레지나의 모습이 보였다. 한껏 차려입은 다른 후궁들과는 다르게 평민의 복색이었다. 일꾼? 사냥꾼? 자신의 거친 옷차림에 정체성을 파악하느라 골몰하는 프리아를 보며 레지나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헤파이토스요. 절름발이 대장장이죠. 아름다우신 남편님에게 영감을 받아 꾸며봤어요.”
저 멀리 단상 위의 황제를 향해 고갯짓하며 레지나가 속삭였다. 황제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취급하는 레지나의 발언에 프리아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소박맞은 지 오래라 오늘은 처음으로 실물을 보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보람이 없네요.”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답답한 가면을 벗어던지며 레지나가 하는 말에 프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레지나 역시 황제를 연모하는 후궁들 중 하나였을까.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자리를 부당하게 빼앗고 있다는 생각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떠보기 위해 한 말에 프리아의 표정이 굳자 레지나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입니다. 저로서는 거들떠봐 주지 않아 고마울 따름인걸요. 평생 수절해도 좋으니 관심가져 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몇 달 전의 자신과 똑같은 말을 하는 레지나의 발언에 프리아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황제와는 마주치는 일 없이 안온한 삶을 보내기만을 바랐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춤을 잘 추시던데 다리에는 문제가 없으신가 봐요?”
“예?”
뜬금없는 레지나의 질문에 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안겨 다니거나 업혀 다니신다고 해서.”
“아니 그건 헛소문입니다! 딱 한 번 업힌 거고 오늘 아침엔 잠들어 있어서 그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몰랐어요!”
떠도는 소문을 레지나의 입에서까지 들을 줄 몰랐던 프리아가 소리 높여 항변하다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런 들켜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건가.
“언제부터 눈치채신 거죠?”
“처음부터요. 그나저나 던컨은 어디서 나온 이름입니까? 제가 본 책에서는 나오지 않던 이름인데요.”
“조카 이름입니다. 말 안 듣는.”
사칭이 들통난 프리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제 동생 이름은 디아나예요. 말 참 지지리도 안 듣죠. 다시 정식으로 인사할까요? 프리아 님?”
레지나가 시원스럽게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으며 프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인기 많은 여동생 덕분에 연애상담이 주특기인데 언제든지 상의하셔도 좋습니다.”
“어휴, 그런 거 아닙니다.”
온 궁 안이 오해밭이로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젓는 프리아를 바라보며 레지나가 웃음 지었다.
밤이 깊었다. 여인들은 피곤한 발을 쉬게 하기 위해 응접실에 모여 앉아 부채를 흔들었고 사내들은 내일 있을 마상 창 시합 결승전으로 화제를 옮겨 출전이 예정된 기사들의 전적을 헤아리며 승자를 점치고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몸을 숨긴 프리아가 눈을 감았다. 손님들이 절반 이상 빠져나간 연회장에서는 아직도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성의는 보인 것이니 그만 별궁으로 돌아가도 될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끊이지 않을 것 같던 음악소리가 잦아들자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져 고개를 들었다. 홀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누군가 가리고 있었다.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이 호선을 그었다. 뒤이어 바닥으로 벗긴 가면이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회복을 입은 황제의 실루엣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자신의 눈가가 울렁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수 초 후에나 알 수 있었다.
프리아의 앞으로 걸어온 황제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겹치고 나서야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 연주 소리에 그것이 춤을 청하는 동작이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