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71)화 (72/237)

“프리아, 일어나. 이제 돌아가야지.” 

“……으응…….”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오웬의 손길에도 후궁은 잠투정만을 뱉으며 눈을 뜨지 않았다. 간신히 일으켜 앉혔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품에 안겨 고개를 오웬의 가슴에 파묻는다. 

장서관에서 소리쳐 깨웠던 단 한 번의 경험 외에는 후궁을 깨워 본 적이 없어 오웬은 당황하고 있었다. 몰래 빠져나왔으니 시녀들이 깨우러 오기 전에 돌아가겠다고 본인 입으로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놓고는 이렇게 눈도 뜨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지난밤 프리아에게 자신의 옷을 벗기라 농을 걸었던 대가를 오웬은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잠든 사람에게 옷을 입히는 일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자신은 허리를 들어주고 팔을 뻗어 올려 주기라도 했지, 게으름뱅이 후궁은 잠든 채로 손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프리아에게 침의를 입히던 오웬이 장식 고리에 묶인 주머니를 발견했다. 입구를 여민 끈을 풀러 내자 주머니 안에서 종이로 감싼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동그랗고 까만 작은 덩어리였다. 생긴 것은 이상하지만 간식을 좋아하는 후궁이 챙긴 젤리나 사탕 같은 것이려니 생각한 오웬이 종이로 감싸 다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프리아, 안 일어날 거야?” 

오웬 자신도 시종장이 오기 전에 서둘러 후궁을 후궁전까지 데려다주고 올 생각이었지만 이 상태를 보아하니 통로를 걷기는커녕 업고 가야 할 판이었다. 어찌할까 생각하던 오웬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프리아 님, 일어나셨습니까? 저희 들어가겠습니다.” 

이 시간에 일어났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디스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고한 후 침실의 문을 열었다. 

탄신제 기간이라 궁 안팎으로 이런저런 행사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오늘밤에 열리는 가장무도회가 유디스가 무척이나 고대하고 기다려온 행사였다.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나도록 프리아 님을 꾸며드린 후, 자신 또한 신나게 축제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후궁을 깨우러 내려왔던 것이다. 

“프리아 님, 오늘은 일찍 일어나셔야… 프리아 님?” 

눈앞에 보이는 빈 침대를 보고 놀란 유디스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벌써 일어나신 건가? 어딜 가셨지? 

화장실에 가셨나 기다려 보았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프리아를 찾으러 나간 이사벨과 올가도 소득 없이 내실로 돌아왔다. 

“이렇게 빨리 일어나신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유난도 참. 안달복달하며 발을 구르고 있는 유디스를 감흥 없이 바라보며 이사벨이 말했다. 

“산책이라도 가신 게 아닐까요?” 

“호수 쪽에는 계시지 않으셨어요. 숲으로 들어가신 걸까요?” 

그새 호수까지 다녀온 올가가 유디스에게 자신이 알아낸 것을 보고했다. 

“경비병 말로는 아침 교대 후 정문을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고 해요. 밤사이 보초를 섰던 담당을 깨우러 갔으니 곧 답이 올 거예요.” 

“그럼 한밤중에 나가셨단 말이에요?” 

밤에 대체 왜, 프리아 님은 어디를 가셨기에. 유디스의 얼굴이 초조로 얼룩졌다. 

“누굴 만나러 가신 게 아닐까요?” 

“누굴…….” 

얄밉게 입을 비죽이는 이사벨의 말을 반박하려던 유디스의 입술이 멈췄다. 때려죽일 벌레가 남긴 자국, 프리아의 피부 위로 남아 있던 순흔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아니다, 그건 순흔이 아니다. 벌레, 벌레가 문 자국이여야만 했다. 프리아 님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쉽게 몸을 허락할 리가 없어. 

‘폐하가 이 사실을 아시면.’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하얗게 비어가는 유디스의 머릿속으로 사형 선고와도 같은 시종의 말이 울려 퍼졌다. 

일순간에 서로를 쳐다본 수행시녀들이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백조성의 사용인이 모두 일손을 멈추고 달려나가 정문 앞에 도열했다. 웅장하고 화려한 황궁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담요에 싸인 커다란 무언가를 안고 있는 황제의 모습이었다. 

황제를 돕기 위해 나선 시종들을 고갯짓으로 물리친 황제가 유디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에게 말도 하지 않고 나왔다고 걱정을 하더군. 잔소리는 적당히 해 둬.” 

“예? 폐, 폐하! 프, 프리아 님께서!” 

얼어붙어 있던 유디스가 황제에게 후궁의 부재를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폐하, 프리아 님께서 간밤에 사라지셨……. 아니, 왜 거기 안겨 계시는데요? 

“시끄러운 인사는 생략하도록.” 

품에 안고 있는 후궁의 잠이 깰까, 저어하며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입을 열어 질문하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황제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한 유디스가 후궁을 안고 걸어가는 황제의 뒤를 따랐다. 

‘아침부터 없어졌다고 그 난리를 피우더니.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그럼 밤에 빠져나간 거야?’, ‘좋을 때다, 좋을 때야.’, ‘아주 불이 붙었네, 붙었어.’ 

쑥덕거리던 사용인들이 유디스의 노려봄에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축제로 인해 북적거리는 궁 안에 또 흥미로운 소문 하나가 더해질 예정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수석시녀로서 프리아 님을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나가시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죄, 처벌을 청합니다.” 

침대 위로 프리아를 내려놓은 황제가 담요를 벗긴 후, 이불 속으로 몸을 넣어 살뜰히 여며주고 있는 광경을 넋 놓고 지켜보고 있던 유디스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눈치를 보며 서 있던 수행시녀들도 따라서 자세를 낮췄다. 

“내 후궁이 잘못한 것이지. 네 죄가 아니다.” 

“아닙니다, 폐하. 이제부터는 밤사이에도 수시로 챙겨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자애롭게 웃어 보이며 황제가 잠든 후궁의 이불 위를 도닥였다. 어쩜 이렇게 다정하실까. 큰 경을 치르고도 남을 일을 넘어가 주시고 프리아 님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후궁전까지 안아서 데려오시다니. 유디스는 감동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신 걸까. 각층마다 보초를 서는 시종이며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의 눈을 어찌 피할 수 있었단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진 유디스의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이 황제가 시선을 창문가로 돌렸다. 

“창문을 타고 오르내리는 재주가 있더군. 다칠까 염려되니 안전장치를 해 두는 게 좋겠어.” 

“창문 말씀이십니까?” 

황제의 말에 놀란 유디스가 창문 앞으로 달려갔다. 창문을 열어 그 아래를 살피더니 까마득한 높이를 실감하고 쓰러질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째서 이렇게 위험한.” 

이유가 뭐겠어. 사랑 때문이지. 

한없이 인자한 표정으로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로 옮겨 다니는 이상한 꿈을 꾼 것도 같지만 그래도 깨지 않고 푹 잘 잤다.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뜬 프리아가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기상하셨습니까? 프리아 님.” 

옆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석시녀의 얼굴이 있었다. 

“유디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프리아 님.” 

다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유디스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걸 깨달은 프리아가 눈을 굴리며 자신이 뭘 잘못했나, 헤아리기 시작했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응?” 

“어제 어디서 잠이 드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시나요?” 

“어제?” 

당연히 침실에서… 아니, 이 침실이 아니라 황제의 침실에서 잠이 들었지. 이게 어찌된 일일까. 아침 일찍 일어나 돌아오고서는 또 잠이 든 건가? 하도 비몽사몽간에 움직여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폐하께서 데려다주셨어요.” 

“뭐?” 

“폐하께서 직접 프리아 님을 안아서 마차에 태워서, 다시 안아서 이 침실까지 친히 데려다주셨다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기억이 나지 않으실 테죠. 주무시고 계셨으니까.” 

“내가?”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프리아 님을 깨우려고 침실에 들어왔는데 침대는 텅 비어 있지, 어디에도 계시질 않으시지, 정원이며 호수며 다 찾아봐도 보이지 않으셔서 제 속이 타들어 갔다고요!” 

내 발로 걸어온 게 아니었구나. 황제 이놈 자식. 그냥 깨울 것이지. 요란스럽게 마차는 뭐고, 사람을 왜 굳이 안아서 데려다준단 말인가. 힘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놀리려고 그런 것이 분명하다. 프리아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것도 저 창문을 타고 내려가셨다면서요? 프리아 님이 첩자예요? 광대예요? 아니, 한밤중에 그리 하시다가 오인 받아 공격이라도 받으셨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대체 왜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신 거예요?” 

창문을 손가락질하며 탄식하는 유디스의 말에 프리아가 놀라 다시 눈을 떴다. 

“그러게요. 프리아 님이 잘못되셨으면 저희도 크게 경을 쳤을 텐데 너무 위험한 행동을 하셨어요.” 

이사벨이 싫은 얼굴을 하며 유디스의 편을 들었다. 황제와 연분이 나건 말건, 둘이 닭살을 떨며 금지된 연인 놀이를 하건 상관이 없지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폐하께서 크게 염려하셨어요. 저희도 걱정했답니다.” 

늘 조용하던 올가마저 합세했다. 

“폐하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으면 저희를 깨우셨어야죠. 한밤중에 위험하게 혼자 걸어서 본궁까지 가셨다니. 생각만 해도 겁이 나 몸이 달달 떨려요. 숲에서 들짐승이라도 만나셨으면 어떻게 해요?” 

상상만 해도 무섭다는 듯 유디스가 몸을 떨었다. 시녀들의 말을 듣고 사태를 파악한 프리아가 자신이 처한 엄청난 상황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황제가 보고 싶어 한밤중에 창문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 숲을 가로질러 혼자 본궁까지 달려간 사랑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맙소사. 

“어제가 처음이 아니시죠?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말씀해 보세요. 몇 번이나 그러신 거예요?” 

프리아의 몸에 순흔을 남긴 범인이 다른 사내도, 여인도 아닌 황제였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유디스가 확신을 갖고 캐물었다. 역시 그랬어. 프리아 님에게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폐하가 아무리 좋으셔도 그렇지. 어휴 정말, 못 말리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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