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69)화 (70/237)

“매일 이 길을 걸어오셨던 겁니까?”

말소리가 울려퍼져 더욱 스산해지는 분위기에 목소리를 한껏 낮춘 프리아가 오웬에게 물었다.

“익숙해지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아.”

분기점이 나올 때마다 막힘없이 프리아를 이끌어가며 오웬이 대답했다. 황금으로 치장한 대로만 걷는다 해도 충분히 시행 가능한 황제가 왜 이런 비좁고 어두운 공간을 오갔던 것일까. 이유는 하나뿐이다. 자신을 골리기 위해. 나이가 어린 탓일까. 이해할 수 없는 황제의 기행을 나이 탓으로 치부한 프리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프리아의 행동을 두려움 때문일 것이라 짐작한 오웬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높은 곳은 무섭지 않다면서 낮은 곳은 두려워하는군. 보통은 반대가 아니던가?”

한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목숨이 위험한 외벽은 잘도 타고 오르면서 고작 어둠을 무서워하다니. 후궁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어린애도 아닌데 이깟 어둠을 두려워하겠습니… 으악!”

등불에 비친 벽의 흔적을 보고 놀란 프리아가 소리를 지르며 오웬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벽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흰 뼈가 드러나 있었다. 수십 년 전, 혹은 그보다 먼 과거에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을 작업공의 흔적이다. 벽과 한몸이 되어 버린 탓에 치울 수 없던 것이다. 익숙해진 길이라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 오웬과는 달리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던 프리아의 눈에 뜨이게 된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자리를 벗어난 후, 프리아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오웬에게 물었다. 정작 놀란 것은 본인이면서 왜 이런 질문을 하지? 의아한 시선으로 오웬이 프리아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이지?”

“사람이 죽는 게 싫다고…….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싫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지붕 위에서 오웬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덧붙였다.

“이미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내 눈앞에서 죽어간 게 아니니까.”

“……그렇군요.”

“죽음 그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야.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세상을 뜨고 있을 텐데.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보는 게 싫어.”

하루하루 생명이 꺼져가던 형의 마지막 나날과 절벽 아래 붉은 꽃처럼 피어 있던 요난나의 시체를 떠올리며 오웬이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곁에선 누구나 건강해야겠어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며 프리아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마지막을 알면서 죽을 자리로 낯선 제국의 후궁전을 택했던 자신이 이기적이었다. 프리아 역시 가족들에게 건강한 모습만을 기억하게 하고 싶어 길을 떠나왔다.

“그래, 그러니까 아프지 말도록 해.”

최근 들어 앓아눕는 일이 잦았던 자신의 후궁을 바라보며 오웬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대답이 없던 프리아가 여러 갈래의 길 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길은 어디로 향하나요?”

“워낙 미로처럼 얽혀 있어 나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호수 옆 숲으로 이어지는 길도 있고, 사냥터로 이어지는 길도 있지. 다음에 한번 가 보도록 하지.”

“정말 제가 첩자에게 알리면 어쩌려고 이렇게 다 알려 주시는 겁니까?”

다음번 외출을 기약하는 황제의 말에 프리아가 질문했다. 큰형님 성정에 이런 기밀을 안다 해도 반역을 일으킬 일은 없지만 정말 위험한 자들의 수중에 이런 정보가 들어간다면 위협이 되지 않겠는가.

“고작 이런 통로 몇 개쯤 새어나간다고 호락호락 당할 내가 아니야.”

자신만만한 얼굴로 프리아를 바라보며 오웬이 답했다. 반역을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만들고 설계자와 인부까지 죽여 버린 선대 황제들의 만행에 동참할 생각은 없다. 오웬에게 있어 비밀통로들은 지름길이자 에움길이며 어린 시절 형과 뛰어다니던 숲속 놀이터의 연장일 뿐이었다. 함께 놀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오웬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프리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힘없이 끌려오는 후궁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오웬을 올려다볼 뿐이다.

되돌아온 침실에서 시작된 잠자리가 새벽이 되어 끝날 때까지 후궁은 유순한 태도로 오웬을 받아주었다. 정사 후, 기절하듯 잠이 든 프리아를 내려다보며 오웬은 생각에 잠겼다. 통로를 왕복하느라 지친 탓일까.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 약해 보인다. 알훼니아에 사람을 보내 그 기르라는 주치의를 데려오기라도 해야 하는 걸까. 잠을 깨워 평소처럼 뿔난 표정으로 대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오웬 역시 눈을 감았다.

* * *

1년 중 가장 큰 축제의 날, 황제의 탄신제 그 첫 번째 밤이었다.

황족과 대신들, 각 공국에서 보내온 조공단과 타국에서 온 사절들, 식구들까지 대동해서 올라온 지방귀족들까지, 몰려온 손님들로 인파가 북적였다.

거리에는 사탕과자가 뿌려지고 적선을 받기 위해 마차의 뒤를 따라다니는 거지와 아이들로 인해 크고 작은 사고까지 발생하는 날이었다. 술집마다 공짜 술이 넘쳐흐르고 술잔을 높이 든 주정뱅이들은 황제 폐하 만만세를 외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황궁에서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탄신연이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음악소리와 함께 등장한 아름다운 무희와 광대들이 오색 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일곱 개나 되는 대연회장마다 수백 개의 거울이 들어서고 루비와 에메랄드와 사파이어, 금은으로 장식한 샹들리에가 천장을 수놓았다. 초대된 손님들이 수군거리며 설치된 조형물의 가치를 가늠하고 있을 때 중앙의 무대로 올라온 가수들이 한목소리로 제국의 영광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신께 영광을! 제국에 광영을! 수천 년을 이어온 고귀한 핏줄이여!

연회장마다 꽃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들과 수꿩처럼 멋을 부린 사내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얗고 긴 목에 영롱한 보석을 박은 목걸이를 늘어뜨리고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부채를 받쳐 든 여인들이 분수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사내들의 시선을 끌었다. 오늘을 위해 준비한 오팔 귀걸이와 루비 목걸이, 진주로 장식한 코사주를 빛나게 하기 위해서 거울 앞에서 오래 연습했던 동작대로 입을 가리고 허리를 젖히며 유혹적으로 웃어 보인다. 부채와 부채 사이로 은밀한 눈길이 오가고 미리 약속된 수신호에 따라 대정원의 숲으로, 후원으로 사라지는 연인들이 있었다.

그레이트 홀에 모인 귀족들이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회장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오늘만은 소문의 사내 후궁을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높은 단상 위,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홍안의 황제 옆에는 기대하던 사내 후궁 대신 모후인 선태후가 앉아있었다. 차갑고 아름다운 모자의 모습을 눈요기하며 그들은 부지런히 입을 놀리고 사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축제의 당사자면서도 무감동한 눈길로 연회를 지켜보던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만류하는 귀족들을 손짓 하나로 물리친 오웬이 피곤한 표정으로 그레이트 홀을 빠져나왔다. 공들여 연회를 준비했던 시종장이 오웬의 눈치를 살피며 뒤를 따라왔다.

“폐하,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하지. 남은 일정이 어떻게 되지?”

“낮에는 마상 경기 예선전과 함께 폐하의 탄신을 축하하는 연극이 상연될 예정입니다. 정찬 이후에는 오페라를 관람하시고 가면무도회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결승전이 언제지?”

황제의 참전이 예정된 결승전의 스케줄을 묻는 질문에 시종장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대답했다.

“그 다음날 오후 2시부터입니다.”

“처음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우거지상인 시종장의 표정을 지적하며 오웬이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전에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귀한 신분이셨지만 지금은 더하시니까요.”

우승자를 치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리를 빛낼 수 있건만 기어코 경기 참가를 결정한 오웬을 시종장은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

내실에 이르러 시종장의 옷 수발을 받으며 오웬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참전도 말릴 생각인가.

“노인의 존재 이유랍니다. 폐하도 나이 드시면 제 마음을 이해하실걸요.”

“오늘 수고 많았어.”

탄신제를 준비하느라 노심초사 식사도 거르며 뛰어다녔던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는 황제의 한마디에 시종장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침실로 걸어가는 황제의 뒷모습에 허리를 숙이며 시종장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가 있다.

침대 아래로 비어져나온 흰 다리를 바라보며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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