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68)화 (69/237)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에 조용했던 백조궁이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새로 충원되어 한 번도 황제를 직접 본 일이 없던 사용인들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먼발치라 하더라도 감히 황제를 올려다볼 수 없는 신분인 하녀들도 덩달아 흥분에 휩싸였다. 

역시 폐하께선 우리 프리아 님을 잊지 않으셨어. 그저 정무로 바쁘셔서 방문이 늦어지셨을 뿐이지. 폐하께서 내려주신 이 궁전을 두고 감히 이별 선물이라니. 당치도 않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사벨을 쳐다보며 유디스가 고개의 각도를 높였다. 

“그간 일이 바빠 찾아오질 못했다. 혹 섭섭하다 여기지 않았느냐?” 

잔뜩 골이 난 표정의 프리아를 앞에 두고 오웬이 마치 지금이 첫 방문이라는 듯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쩜, 다정하셔!’ 얼굴을 붉히며 서로 귀엣말을 하는 시녀들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정도 뻔뻔함은 갖추고 있어야 일국의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가 보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렇게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감격으로 목이 메일 지경입니다.” 

프리아 역시 황제의 방문에 설레하는 전형적인 후궁의 대사를 읊으며 눈앞의 철면피를 쏘아보았다. 또, 또 나를 약 올리려고 찾아왔지? 

“말과 표정이 다른 걸 보니 단단히 토라진 모양이로군.” 

말 몇 마디로 프리아를 황제가 찾아오지 않아 삐친 후궁으로 만들어 버린 오웬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없이 다정하게 수행시녀들을 향해 눈짓하며 명을 내린다.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물러가도록. 가능하면 아침까지 방해하지 않았으면 해.” 

폐하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다.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선 유디스가 양떼를 모는 것처럼 시녀들을 몰아 문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유디스의 성화에 쓸려가며 시녀들이 내뱉는 감탄사가 프리아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머 어머, 아침까지? 

“이제 좀 조용해졌군.”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은 오웬이 맞은편의 프리아를 쳐다보았다. 기가 찬 프리아가 한숨지으며 입을 열었다. 

“연기를 이렇게 잘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건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는데? 주치의인지 유모인지 알 수 없는 기르 씨?”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사람은? 

오웬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놀란 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이름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바이런에게서 듣고, 시종장에게도 듣고 그리고…….” 

너,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오웬이 프리아를 쳐다보았다.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프리아가 오웬에게 반문했다. 

“시종장님께서도요?” 

“바이런이 자신의 마음을 앗아간 정령 타령을 하도 해서 말이야. 정령인지 주치의인지 유모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자의 이름이 기르라고 하더군.” 

정령이라니, 하여간 그 느끼한 인간. 바이런의 버터 바른 혓바닥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진저리를 쳤다. 주치의까지는 자신의 사칭 때문이겠으나 유모는 어디서 나온 신분인지 모르겠다. 

“저를 키워주시고 돌봐주신 분입니다. 의술에 조예가 깊으시고요.” 

“그래서 주치의이자 유모라는 건가. 그 자는 왜 너와 함께 오지 않았지?” 

공국에서 데려온 사용인 몇 명 정도는 황제의 윤허를 받아 후궁전에 상주할 수 있었다. 함께 자란 시녀나 시종 하나 없이 단신으로 궁에 입성한 건 프리아가 유일했다. 

“안식년이라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르에 대해 물어보시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잠자리에서 부인이 애타게 부르는 사내의 이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 또한 무정한 일이겠지?” 

부인이라니. 오웬의 입에서 나온 능청스러운 단어에 당황한 프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예상치 못한 소동으로 약을 다 잃은 까닭에 기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는데 잠든 사이에 그만 입 밖으로까지 꺼내놓았나 보다. 

“제게는 스승이자 부친 같은 분입니다. 그런 억측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런 이유였다면 내가 양해하도록 하지. 자리를 만들어 줄테니 궁으로 부르도록 해.” 

아량이 넓은 군주처럼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자신이 그의 애첩이라도 된 것처럼 선물을 주고 품에 안고 잠자리에서 나온 이름을 추궁하기까지 하다니. 그리고 따질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잠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 건 황제가 먼저였다. ‘요난나’ 진정 증오하는 자의 이름이라면 그토록 탄식하며 입에 올릴 이유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마구 내젓는 프리아를 바라보며 오웬이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시종장에게 말을 높이는 이유는 뭐지?” 

시종장 역시 신분 높은 귀족이기는 하나 궁에서는 후궁인 프리아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하대가 익숙한 오웬이 늘 의구심을 갖고 있던 후궁의 태도를 지적했다. 

“예? 그건…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불만이시라면 앞으로 말을 낮추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자세를 낮춰야 하는 건 나 하나뿐이야. 대공이 무슨 교육을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네 스승이라는 자가 예법이 부족한 것만은 확실하군.” 

이름 없는 뜨내기일 것이 분명하니 궁중예법 따위 들어본 적도 없겠지. 오웬은 그 사내를 불러 예절 교육부터 시킬 참이었다. 

“기르는…….” 

기르는 뭐든지 알고 있고, 엄격하듯 따뜻하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꼬마를 내치지 않고 보살펴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지켜주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소년 시절에 이미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후궁이 되어 버린 자신을 본다면 그는 뭐라고 할까. 화를 내겠지만, 분명 화를 내겠지만 기르만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옆을 지켜줄 것이다.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말을 이었다. 

“신분 높은 대귀족은 아니지만 저에게 필요한 것은 다 가르쳐 주었어요. 폐하께서 보실 때는 부족한 사람일 수 있으나 저에게는 소중한 분입니다.” 

또다시 애틋한 표정이 된 프리아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오웬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을 향해 걷기 시작한 그가 프리아에게 명령했다. 

“따라와.” 

프리아는 잠자리 시중을 예상하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침대를 지나친 오웬이 벽난로 앞에 멈춰 섰다. 벽에 장식된 나무 패널의 튀어나온 조각을 누른 그가 프리아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한참 걸어야 하니 겉옷이 필요할 거야.” 

멍하니 열린 통로를 바라보던 프리아가 오웬의 말에 황급히 내실로 향했다. 대충 걸치고 나온 망토의 단추를 여며주며 오웬이 말했다. 

“네 스승이라는 자가 온다고 해도 이 통로는 절대 알려 주지 말도록.” 

두 명을 감시하는 것보다는 한 명이 편하니까. 처리하기도 쉽고. 그렇게 말한 오웬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아니, 왜 원치도 않는 비밀은 자꾸 알려 주고선 이렇게 협박을 해대는지. 억울해하는 자신의 표정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것도 모르고 프리아는 어두운 통로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등불을 손에 든 오웬이 남은 손을 프리아를 향해 내밀었다. 손을 잡으라는 건가? 애도 아닌데. 망설이던 프리아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에 흠칫 놀라며 빠르게 오웬의 손을 붙잡았다. 

직선이던 통로는 곧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과 연결되었다. 여러 층을 걸어 내려오자 사방으로 연결된 커다란 빈공간이 나타났다. 그중 한곳으로 프리아를 이끈 오웬이 벽에 표시된 문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본궁 방향을 가리키는 표식이다. 잘 기억해.” 

익숙지 않은 공간에 긴장하고 있던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갈래의 공동에서 기이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무언가 뛰쳐나올 것 같아 프리아는 잡고 있는 오웬의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방향을 헷갈리면 백골더미와 만나게 될 거야.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숫자가 꽤 되거든.” 

이야기를 과장하며 오웬이 음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밀이 새어나가는 걸 원치 않았던 선황들은 인부들을 살해했으나 발견된 백골은 이미 오웬이 아랫것들을 시켜 깨끗이 치워두었다. 제대로 프리아를 놀려줄 생각이었던 오웬은 평소 켜두었던 길잡이 등을 모두 꺼두도록 지시했다. 횃불 하나로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오웬과 프리아를 발아래 길게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쫓아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본궁 지하와 연결된 통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엔 닫혀 있지만 장치를 움직이면 해자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통로는 물에 잠기고 위에서 쇠창살이 내려와 침입자를 오도 가도 못하도록 가둘 수 있었다. 높은 천장 아래 매달린 뾰족한 창살을 올려다보며 프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렇게 무서워하면서 기사 영웅담은 잘만 읽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걸음을 멈춘 오웬이 눈앞에 보이는 통로의 계단을 가리켰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개인 정원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나와. 그 다음은 알아서 올 수 있겠지?” 

그럼, 이제 돌아갈까? 그렇게 말하며 오웬이 방향을 틀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잡힌 손에 의해 끌려가며 프리아가 코앞에서 멀어지는 본궁 입구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내실이 나올 텐데. 약을 숨겨둔 다락방으로 갈 수 있는 기회인데. 

자꾸 뒤를 돌아보는 프리아를 의아하게 쳐다보며 오웬이 말했다. 

“올라가고 싶어? 지금 올라갔다가는 아침에 나오기 힘들 텐데.” 

그러면 사람들에게 들킬 테고 말이야. 잠자리를 암시하며 오웬이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아.” 

가긴 누가 간다고. 절대 안 간다. 딱 한 번만 빼고. 딱 한 번만 갈 거야. 그 한 번의 이동을 기약하며 프리아가 길을 외우듯 주변을 바삐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웬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