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67)화 (68/237)

언제 깨어난 거지? 당황한 것도 잠시 오웬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프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나와 떨어지기 싫어?”

뭐? 오웬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이렇게 뻔뻔할 수가.

처음에는 정말 꿈을 꾼 것이라 여겼다. 보름 동안 내내 잠자리를 함께했던 까닭에 습관처럼 황제의 모습을 그리게 된 것이라고. 스스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추론이었지만 그 이유 말고는 밤마다 황제의 품에 안겨 잠을 자는 환상을 보는 연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서큐버스에게 홀린 것처럼 더욱 야릇해지는 꿈의 연속에 스스로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의심까지 하던 차였다.

목욕 후, 뚫어지게 거울을 바라보던 프리아가 유디스에게 말을 걸었다.

‘유디스, 이거 보여?’

프리아의 머리카락에 향유를 바르는 손길을 멈추지 않으면서 유디스가 대답했다.

‘네? 프리아 님? 무얼 말씀하시는 거죠?’

‘이거 말이야. 보여?’

프리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언저리를 가리켰다. 눈을 크게 뜨고 살핀 유디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간지러우세요? 프리아 님? 벌레에 물리셨나? 잠결에 긁으셨나 봐요.’

프리아 님의 침구는 매일 빨아 햇볕에 말리는데 벌레가 생길 이유도 없고. 벽 틈새를 타고 들어오기라도 한 걸까. 살짝 붉은기가 남은 자국을 쳐다보며 유디스도 생각에 잠겼다. 저 자국은… 혹시. 아니다. 프리아 님의 몸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폐하께서 프리아 님에게 남기시는 흔적은 저것보다 더 진하고 넓게 퍼져 있곤 했다. 폐하께서 다녀가시지도 않았는데 내가 무슨 상상을. 유디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꿈속의 황제가 입술을 가져갔던 자리에 남아 있는 희미한 흔적. 거울을 노려보며 프리아가 붉은 자국을 매만졌다. 오늘밤은 자지 않고 꼬박 새울 작정이다. 잠들지 않은 사람에게 몽마가 나타날 수는 없을 테고, 깨어 있는데도 나타난다면 그것은…….

“도대체 왜 이런 장난을 치신 겁니까?”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며 프리아가 오웬을 노려보았다. 역시 몽마가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범인은 바로 황제, 눈앞에 있는 뻔뻔한 인간이었다.

“안아 주기엔 시간이 부족한데 계속 잡고 있을 건가?”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향해 고갯짓한 오웬이 다시 고개를 숙여 프리아가 붙잡고 있는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보았다.

아니, 누가 안아 달라고 했다고. 황급히 손을 놓은 프리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오웬을 바라보았다.

“정말 왜 이러신 건데요? 이렇게 아무도 몰래 오셔야할 이유가 없지 않으십니까?”

“그대가 좋아하는 대로 했을 뿐인데?”

“제가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오웬의 태도에 기가 찬 프리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즐겨 읽던 책에 나오던 장면이지 않나. 꼭 어둠을 틈타 침실로 스며들던데. 그 기사들 말이야. 프레드릭과 엘번, 아이작과 엔드류였던가.”

프리아가 좋아하는 책에 나오던 기사들의 이름을 연이어 말하던 오웬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막심은 제외하고 말이지. 막심은 용기가 부족하더군.”

“제가 언제 책 내용을 재현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리고 폐하는…….”

“그래, 난 기사가 아니라 영주쪽이지. 그래서 아쉬워?”

능글맞게 말하던 황제가 침대 위로 다리를 올렸다. 자신의 위로 점점 몸을 기울이는 황제의 아래 깔리게 된 프리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시, 시간 없으시다면서요?”

“나를 보았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한 건 아니겠지?”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나.

“하긴 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각하니 새삼 억울하다. 아침마다 황제를 찾아대는 후궁이라니. 수행시녀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다행이긴 한데, 앞으로는 조심해야 할 거야. 비밀통로의 존재를 마구 퍼트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침입자가 발생한다면 반역자를 사랑하는 내 후궁 탓이 아닐까 의심하게 될 것 같거든.”

알지도 못했던 비밀통로의 존재를 자꾸만 알려 주는 사람이 누군데.

역시나, 비밀통로를 통해 오간 것이었어. 의문은 풀렸으나 억울함은 배가 된 프리아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장난을 치시려고 새 처소를 내려주신 겁니까?”

황제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에게 내리던 궁전, 백조성의 주인이 된 프리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게 왜 이러는 걸까. 정말 총애하는 후궁이라도 된 것처럼.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한참을 뿔난 망아지처럼 대들더니 금세 기운이 빠져 버린 프리아를 내려다보며 오웬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화를 풀어주어야 할까. 선황의 후궁들처럼 원하는 걸 바로 말해 주면 좋을 텐데. 책이라도 가져다 안겨 주어야 하나.

“시간 없으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곧 시녀들이 들어올 시간입니다.”

제몸에서 떨어지라는 것처럼 후궁이 자신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황제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정무는 조금 늦게 시작해도 되고 시녀들이 자신을 본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일반 귀족의 성에도 비일비재한 비밀통로 따위 존재하다는 걸 알아봤자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오가는 방법만 알게 하지 않으면 될 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건 그저 후궁을 골려주기 위해서였다. 심통 난 아이처럼 오웬이 자신의 입술을 프리아의 목 아래로 가져갔다.

“폐하, 시간이… 아! 흣.”

쇄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프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황제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후궁의 침의자락을 걷어올릴까 잠시 생각하던 오웬이 얌전히 자신의 몸을 떼냈다. 후궁을 안는 건 자신의 당연한 권리였으나 어쩐지 그가 싫어할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다시 오지.”

웬일로 성질도 부리지 않고 얌전히 물러난 황제가 다음 방문을 예고하며 일어섰다. 벽난로 옆까지 걸어간 황제가 우아한 동작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벽장식이라고만 생각했던 대형 패널이 돌아가며 숨겨 두었던 통로를 열어 주었다. 통로로 사라지는 황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프리아 님, 일어나셨습니까? 저희 들어갈게요.”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프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빗기던 유디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프리아 님, 혹시……. 어젯밤에도 폐하가 다녀가셨나요?”

또 헛것을 보신 걸까. 기가 이렇게 약해지시다니.

“아니, 안 왔어. 생각해 보니까 다 내 착각이었던 것 같아.”

속으로 이를 갈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시녀들도 황제의 모습을 보았다면 내 말을 믿어 주었을 텐데. 국가기밀이라니 함부로 발설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그렇죠? 프리아 님. 갑자기 잠자리가 바뀌어서 잠을 설치신 탓일 거예요.”

오늘은 다행히 폐하를 찾지 않으신다. 유디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요즘 잠자리가 매우 불편했던 것 같아.”

불편하긴커녕 황제의 품에 안겨 매일 밤 숙면을 취했다. 그런 자신에게조차 화가 나 뿔난 표정으로 프리아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혹시 어젯밤에도 벌레에 물리셨어요? 안 되겠어요. 침구를 싹 갈고 소독을 하든지 해야지. 겉만 그럴싸하면 뭐해요. 쥐가 나오질 않나 벌레가 있지 않나.”

있지도 않은 쥐와 벌레가 창궐하는 곳으로 오해받은 백조성의 천장을 노려보며 유디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프리아 님께서 벌레에 물리셨나요?”

자신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올가가 하는 질문에 유디스가 씩씩거리며 프리아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여기 좀 보세요. 이 예쁜 피부에 빨갛게……. 어머, 프리아 님 어제도 또 물리셨군요. 이번엔 좀 큰…….”

벌레인가, 사람인가. 이건 아무리 봐도…….

갑자기 조용해진 유디스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프리아가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오웬, 이 자식!’

눈을 씻고 쳐다봐도 순흔이다. 들키면 안 된다더니 사람 몸에 이딴 흔적을 남겨놓으면 어쩌란 말인가. 얼굴이 빨개진 프리아와 반대로 창백해진 유디스를 바라보며 올가가 차분하게 말했다.

“정말 큰 벌레가 있었나 봅니다. 유디스 님 말처럼 대대적으로 소독을 해야겠어요.”

프리아 님의 침실에 숨어든 낯선 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격에 빠진 유디스가 거세게 머리를 흔들며 올가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요! 벌레! 다 죽여 버려야지. 제가 때려잡고 말겠어요.”

그날 저녁 때려죽일 벌레, 아니 황제의 방문을 알리는 시종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밤에도 도둑처럼 숨어들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정식 방문을 해 왔다.

“프리아 님! 폐하께서 오셨어요! 폐하께서 오셨다고요!”

신이 난 유디스와는 달리 시큰둥한 표정을 한 프리아가 황제를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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