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66)화 (67/237)

한때는 황제에게 무심하던 프리아 님의 태도가 아쉽기도 했었다. 폐하께서는 다른 후궁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프리아 님만을 찾고 계시니 언젠가는 프리아 님의 마음도 폐하를 향해 열리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새 처소를 하사한 폐하의 배려에 프리아 님의 마음도 조금 움직이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금’ 움직인 정도가 아니라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니. 언제 이렇게 폐하께 관심이 생기게 되신 걸까. 보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옷은 무채색 계열을 좋아하시고, 음식은 기름진 것보단 담백한 걸 선호하신다고 하시고요, 학술서와 철학서 읽기를 좋아하신대요. 선물 고르는 데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 정보였어요.”

심지어 원하는 건 전부 갖고 있기까지 하다. 무얼 준비한다 해도 황제가 이미 소유한 것보다는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일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유디스. 다른 궁에서 준비하는 걸 보고 우리도 대충 구색만 맞추자.”

“다른 궁에서는 이미 반년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갔대요. 흥, 그래봤자 폐하께서는 눈길도 주지 않으실 텐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냥 우리는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걸 찾아보자.”

“미리 준비했어야 했는데 제 잘못이에요.”

반년 전엔 황제가 찾아오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황제의 방문 이후에는 매일 닥치는 상황에 대처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새 시녀들이 합류하고 행궁에 다녀온 뒤 바로 휴가가 이어졌기에 다른 궁의 동태를 살필 시간 여유도 없었다.

“역시 프리아 님의 초상을 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초상에 아직 미련이 남은 유디스가 프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목탄화는 올가가 그려 준다고 했지만 로켓에 들어갈 에나멜화나 벽에 걸 유화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궁정화가의 손길이 필요했다.

“시간에 맞출 수도 없을 텐데. 그리고 난 초상 그리기 싫어.”

“왜 그렇게 초상을 싫어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물론 실물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우신 프리아 님의 모습을 그림으로나마 오래 간직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못내 아쉬워하며 유디스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상보다는 실물을 보면 되지. 유디스는 항상 내 곁에 있을 거잖아? 그렇지?”

그런 유디스를 달래는 것처럼 프리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젠가 헤어지는 날이 온다 해도 프리아는 유디스가 초상을 보며 눈물짓기보다는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리며 미소 짓기를 바랐다.

“당연하죠. 전 프리아 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혼인은 하지 않을 거야?”

“아이 참, 프리아 님이 제 아버지세요? 왜 자꾸 혼인타령이세요. 그리고 혼인한다 해도 프리아 님의 수석 시녀 자리는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을 테니 그리 아세요.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거라고요.”

프리아에게로 바싹 몸을 붙이며 유디스가 말했다. 못 믿겠다는 듯 웃으며 걸음을 빨리하는 프리아의 뒤를 쫓으며 유디스가 종알거렸다. 진짜라니까요. 왜 자꾸 웃으세요. 진짜예요.

* * *

일교차가 커지고 있다. 통로를 걸어오느라 식었던 몸을 벽난로 앞에서 데우며 오웬은 고요한 후궁의 침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차분한 색상의 벽과 적재적소에 배치된 단아한 가구들. 메인 컬러의 배치를 묻는 시종장에게 적당히 대답해 주었는데 꽤 마음에 드는 내실로 완성되었다. 쾌락을 위한 후궁의 침실임을 알리는 것처럼 요란하게 꾸며져 있던 제비궁의 침실이 오웬은 내심 편치 않았다.

사위는 아직 어두워, 밤 꾀꼬리의 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커다란 창 너머로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손톱달이 물 위를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깊은 밤에 찾아오고 이른 아침이면 떠나가는 정부처럼 오웬은 아무도 모르게 후궁의 침실을 찾았다.

품안에 잠든 이를 오웬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촛대의 노란 불빛이 금빛 속눈썹 아래 두 뺨으로 떨어져 일렁이는 음영을 자아내고 있다. 후궁은 여간해서는 눈을 뜨지 않는다. 한참 꿈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중일 것이다.

사방이 해자로 둘러싸여 정문과 연결된 다리를 제외하고는 침입자가 들어올 틈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본궁이었으나 개미굴처럼 파내려간 땅굴과 종횡으로 연결되어 외부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도처에 존재했다.

‘아무도 믿지 말라’, 선대의 황제들이 그 누구도 모르게 만들어 두고 다시 회반죽을 발라 폐쇄하기를 수 없이 반복하던 불안과 두려움의 흔적들이다. 설계자이자 작업공이었을 사람들의 백화된 유골이 복원과 보수 작업을 거치는 기간 내내 흰 벽에서 쏟아져 나왔다.

오웬이 후궁에게 준 별궁 또한 복잡하게 얽혀 있던 외부 탈출로 중의 하나였다. 처음엔 그저 재미있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었으나.

‘어쩜 이리 둔하단 말인가.’

본궁의 처소를 빠져나와 후궁의 침실에 숨어들기를 수차례, 수 일이 지났어도 그는 오웬의 방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등불을 든 채 긴 통로를 걸어오느라 식어 버렸던 몸은 후궁의 온기로 데워진 이부자리 속에서 노곤하게 풀어졌다. 세상모르고 잠든 몸을 끌어안자 한기를 느낀 프리아가 진저리를 치며 오웬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가끔은 눈을 감은 채로 잠꼬대인 듯 오웬의 질문에 몇 마디 대답을 하는 일도 있었다.

“새 처소는 마음에 들어?”

눈을 감은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이자 간지럼을 느꼈는지 몸을 더욱 움츠렸다. 꼭 답을 듣고 싶다. 오기가 생긴 오웬이 질문을 반복하며 연한 살결 아래 제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

드디어 열린 입술은 너무도 작아 밤벌레도 듣지 못할 대답만을 꺼내놓았다. 놓칠세라 귀를 가까이 댄 오웬의 귓가로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다시 깨우는 수밖에. 적당히 가해지는 압력이 흰 피부 위로 연분홍 꽃잎을 피워낸다. 아침이면 사라져 희미한 흔적만을 남길 정도의 가벼운 울혈이었으나 오웬은 피워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폐하가 다녀가시지 않은 게 맞아?”

백조궁의 수행시녀들 사이로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벌써 며칠째인가. 후궁이 아침이면 저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직 폐하께서는 발걸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답답하다는 듯 이사벨이 나서 입을 열었다. 후궁이 실성이라도 한 것인가. 오지 않은 사람을 왜 자꾸 보았다고 하는 것인지. 이제 보니 황제가 후궁에게 빠진 것이 아니라 후궁이 황제에게 흠뻑 빠진 게 아닌가 싶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황제의 초상을 들여다보지 않나, 오지도 않은 황제를 아침마다 찾아대질 않나. 보름동안 저리 집착해대서 황제에게 버림이라도 받았나?

어제 오후, 시녀들끼리 모여 황제가 발걸음을 끊은 이유를 쑥덕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정부에게 싫증난 선황들이 이별 선물로 성과 영지를 내리지 않았냐는 이사벨의 말에 유디스가 쌍심지를 켜들었다.

‘무슨 그런 망발들을 하십니까! 프리아 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하셨다가는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곧 오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프리아 님.”

“아니, 걱정이 아니라……. 정말 봤는데. 어젯밤에도…….”

자고 갔단 말이야. 곱게 잠만 자고 간 것도 아니고 사람을 물고 빨다 갔다. 옷을 벗어 보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신기하게도 아침이면 흔적이 사라져 있기까지 해서 더욱 환장할 노릇이었다.

처음엔 정말 꿈을 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생생해지다 못해 목소리뿐 아니라 감촉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백번 양보해 꿈이라고 해도 이상하다. 내가 왜 황제 꿈을, 그것도 야시시한 꿈을 꾸어야 하는 건데? 몽정을 시작한 소년도 아니거늘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프리아 님…….”

시종장님의 말이 정말이었어. 폐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셨다더니 며칠 뵙지 못하셨다고 헛것이 보이실 정도라니.

프리아 님 어쩌다가 이렇게 되신 거예요. 폐하께서 젊고 미남이고 몸매도 탄탄하시고 그것도 크시고 앞날이 창창한 최고 권력자에 돈이라면 썩어날 정도로 많이 갖고 계시기는 하지만 저는 우리 프리아 님이 아까워요! 두 분이 잘되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프리아 님이 폐하를 더 좋아하시기보다는 폐하가 프리아 님을 더 좋아하시길 바랐단 말이에요.

이 모순된 감정은 뭘까. 눈물이 글썽해진 유디스가 프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어느새 푹 잠이 들었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시끄럽게 귓가를 울리고 있다. 늘 날이 밝기 전에 후궁의 침실을 빠져나왔는데 오늘은 창밖으로 환한 빛이 대지 가득 떠올라 있었다.

다락방에서 함께 지낸 기간 동안 후궁이 깨어나면 늘 보고를 받았었다. 날이 밝았다고는 하나 아직 깨어날 시간이 아니었다. 오웬은 이불을 들어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천천히 다리부터 바닥에 내려놓으려는 순간, 뒤에서 뻗어온 손이 오웬의 허리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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