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65)화 (66/237)

“욕하면서 보려고요. 지루한 궁생활의 낙입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가슴을 펴며 레지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레지나의 태도에 기가 찬 프리아가 입을 벌렸다.

“아니, 그런 이유로 보시려고 하셨던 겁니까? 전 욕하지 않고 볼 겁니다.”

“정녕 애독자이신가 봅니다. 그럼 제가 기다릴 테니 바로 읽고 넘겨주시겠습니까? 저희 궁에 들어오면 시녀들이 돌아가며 다 읽을 때까지 바로 반납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 후궁에 그 시녀인 법. 마담 S의 신간을 기다리는 사람은 레지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남자주인공이 얼마나 막돼먹은 짓을 할 것인지 다들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제가 빨리 읽고 반납하겠습니다.”

순서를 양보해 주겠다는 레지나의 말을 들은 프리아가 반색했다. 대출 절차를 밟기 위해 급히 자리를 떠나려는 프리아를 레지나가 돌려세웠다.

“언제 반납하실지도 모르는데 매일 기다릴 수는 없지요. 장서관에서 읽으시고 바로 넘겨주십시오.”

“여기서요?”

반문하는 프리아를 향해 레지나가 서고 통로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책은 그다지 두껍지 않아 마음먹고 읽는다면 서너 시간이면 독파 가능한 분량이었다. 유디스가 빠르게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책을 다 읽고 다른 책을 고를 여유까지 생길 것이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빠르게 읽을 테니 기다려주세요.”

다른 책을 골라 벌써 읽기 시작한 레지나가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프리아는 빈 의자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것 말이더냐?”

백조궁 수석시녀 유디스의 질문을 들은 시종장이 느긋한 태도로 찻잔을 들어올렸다. 몇 달 전부터 수십 번도 넘게 들은 질문이었다. 황제의 환심을 사려는 대공들과 대신들, 각 후궁전에서 찾아온 시녀들까지 문턱이 닳도록 시종장의 집무실을 찾아들었다. 후계자의 신분이었으나 선황이 병중이었던 관계로 작년 생일은 조촐하게 치러야 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시종장은 올해 탄신제는 정말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시종장님. 좀 더 일찍 여쭈어야 했는데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새 처소로 옮기는 바람에 찾아뵙는 것이 늦었네요.”

“뭐, 그렇게 거창하게 준비할 것이 있겠느냐. 폐하께서는 성품이 청렴하시어 허례허식을 반기지 않으신다. 마음이 담긴 것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물론, 마음의 크기는 화폐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주워듣기로는 이국의 진기한 동물에서부터 금은보화, 기름진 경작지까지 다양하고 귀한 선물들이 황제에게 바쳐지기 위해 마무리 작업 중이라고 했다.

“프리아 님께서 무얼 드리신다 해도 폐하께서 기뻐하실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취향에 맞는 걸 준비하는 편이 서로가 좋지 않겠습니까? 시종장님 작은 귀띔만이라도 해 주세요. 간절히 부탁드려요.”

프리아 님께 흠뻑 빠지신 폐하시니 지푸라기를 드린다 해도 기뻐하시겠지만 그래도 제비궁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선물을 바치는 편이 좋았다.

“그렇다면 말이다. 너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유디스를 호출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제 발로 찾아왔으니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수고를 덜었다. 황제가 당부한 프리아의 뒷조사를 떠올리며 시종장이 은밀한 눈빛으로 유디스를 바라보았다.

“프리아 님의 교우 관계요? 후궁전 내의 일이라면 제가 빠삭하게 알고 있습니다만 제국에 오시기 전의 일은 따로 말씀하신 게 없었어요.”

지금도 장서관에서 프리아가 새 교우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유디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제국에 오시기 전의 일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 아니냐. 형제분들과의 사이는 어떠했는지, 친하게 지낸 벗이 있으셨는지, 프리아 님께서 편지라도 보내시지 않겠느냐.”

“알훼니아로 보내는 편지를 몇 통 쓰시기는 했지만 주로 형제분들께 보내시는 것 같았어요.”

“수신인 중에 기르라는 이름이 있지는 않았느냐?”

“기르요?”

기억을 떠올리던 유디스가 생각난 듯 외쳤다.

“아, 몇 번 있었어요. 형제분 이름이 아니셔서 제가 물어본 적이 있는데 프리아 님을 키워주신 분이라 들었어요. 유모님 이름이 아닐까요?”

“유모라고?”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기르 전하의 모습에 전형적인 유모의 이미지를 겹쳐본 시종장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괴팍한 어른이 유모라니 정말 끔찍한 상상이었다. 늘 이상한 연구에 빠져 식사도 거르며 연기를 뿜어내고 집을 태우고 급기야는 성을 날려먹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아이가 울면 달래기는커녕 시끄럽다고 부모에게 반납하거나 수면약을 먹여 재우고도 남을 사람이다.

“네. 사내 이름이긴 하지만 뭐, 알훼니아에서는 여자 이름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달리 친하게 지내시던 사내분은 없으셨다고 하더냐?”

“사내분이라뇨, 왜 그런 걸 물어보시죠? 지금 우리 프리아 님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이어진 시종장의 질문에 유디스가 발끈 화를 내며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아이고, 그런 거 아니다. 그냥 프리아 님에 대해 더 많이 알면 두 분께서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예리한 유디스의 질문에 움찔한 시종장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폐하께서 프리아 님의 과거를 알고 싶다고 하셨나요?”

“아니다, 그냥 내가 주책맞게 궁금해서…….”

“하긴 폐하께서 우리 프리아 님께 흠뻑 빠져 계시니까요. 과거까지 다 알고 싶어지셨겠죠. 이해합니다. 그래도 과거는 지나간 일이잖아요?”

“아니, 그럼 과거가 있으셨더란 말이더냐.”

“어휴, 과거가 있긴 뭐가 있어요? 있지도 않지만 있다한들 다 지나간 일이라는 소리잖아요. 수상한 편지 한 통 오가는 거 본 적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아니, 어디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우리 프리아 님을! 기분이 불쾌해진 유디스가 시종장을 향해 도끼눈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다행한 일이다. 이 늙은이가 노파심에 경솔한 말을 했어. 네 말이 옳다. 상사병을 앓고 계실 정도로 프리아 님께서 폐하를 저리 은애하고 계시는데 과거가 있다 한들 무엇이 대수겠느냐.”

“아니, 과거가 없다니까요. 잠깐, 시종장님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상사병이요? ……폐하께서 그러시단 말씀이시지요?”

시종장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화들짝 놀란 유디스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종장이 잘못 말한 거겠지. 어쩐지 이상한 걸 다 묻는다 싶었다. 폐하께서 프리아님을 좋아하시다 못해 과거 인연까지 질투하시는 거였어.

“아니, 폐하가 아니라 프리아 님께서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신다. 너는 프리아 님의 최측근이니 알고 있는 것이 좋을게다. 본궁에 계실 때도 며칠을 앓아누우셨어. 지금은 떨어져 계시게 되었으니 상태가 혹 심해지시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구나.”

“프리아 님이 아프셨다고요?”

살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푸석해진 것이 그 때문이었나?

“프리아 님께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하시는 통에 폐하께서 집무 보시는 시간 외에는 늘 함께 계셔 주셨단다. 일하시는 중간에도 짬을 내셔서 다녀가시고 정무가 끝나면 바로 프리아 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셨지.”

“그건 그냥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보고 싶으셔서 그러신 게 아니시고요?”

더 마음이 큰 쪽이 어쩐지 지는 것 같아, 프리아가 황제를 사모하다 못해 상사병에 걸렸다는 시종장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유디스가 반박했다.

“프리아 님의 마음을 폐하께서 헤아려 주신게지. 이 늙은이가 거짓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프리아 님께서 폐하의 어린 시절부터 다 알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황실 기록화를 보여 드리고 설명을 해 드렸다. 또 폐하의 초상을 갖고 싶다고 하셔서 몇 점 가져가시지 않으셨느냐? 몸에 걸치고 항시 보시겠다며 로켓도 받아가셨단다.”

“그럼 그 로켓이…….”

황제의 초상이 들어간 로켓을 떠올린 유디스가 중얼거리자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선 참으로 다정하시지. 곧 프리아 님의 마음도 알아주실 게다.”

“시종장님, 어제 프리아 님께서 로켓을 잃어버리실 뻔 하셨는데, 금세 다시 찾기는 했는데요.”

“아이고, 잃어버리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로켓의 가격대를 잘 알고 있는 시종장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제야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보석이 달린 그 조그만 목걸이 하나가 웬만한 귀족의 성 한 채 값이었다.

“프리아 님께서는 잃어버리신 줄 알고 쓰러질 뻔 하셨어요. 방에 계시다가 갑자기 나오셔서는 창백한 얼굴로 애타게 저를 부르셨지요.”

어제 저녁 구토 직전까지 갔던 프리아의 상태를 떠올린 유디스의 얼굴도 덩달아 창백해졌다. 황제의 하사품이라고는 하나 반응이 격하시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그 이유가…….

“프리아 님께서 많이 놀라셨겠구나. 안정과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태의가 말했으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게야. 무슨 일이 있거든 나를 찾아와 고하도록 하고. 알겠느냐?”

프리아 님께서 정말 상사병에 걸리신 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유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관 입구에 서 있던 유디스가 프리아를 발견하고 뛰어 달려왔다.

“이리 주세요, 프리아 님.”

프리아가 들고 있던 책더미로 손을 뻗으며 유디스가 말했다. 몇 권 되지도 않는 책이라 여린 소녀에게 짐을 들게 하기 싫은 프리아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무거워, 내가 들고 갈게.”

“그래도 주세요. 제 일이에요. 누가 보면 욕한다고요. 후궁은 짐 들고 시녀는 빈손인 게 말이 되나요.”

유디스의 주장에 할 수 없이 절반의 책을 허락한 프리아가 어두운 표정을 한 유디스의 얼굴을 살폈다.

“유디스, 본궁에 간 일이 잘 안 되었어? 시종장 만난다더니 안 계셨어?”

“계셨어요.”

“그래서 폐하가 뭘 좋아한대?”

유디스의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한 프리아의 질문에 수석 시녀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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