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의견에는 동의한다. 꽃 이름 아니면 새 이름이 고작이라니 누가 명명했는지는 몰라도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 틀림없다. 고개를 끄덕이던 프리아가 규정대로라면 이곳에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는 레지나의 출현에 곧 의문을 품었다.
“레지나 님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계시는지요? 폐하께 따로 허락을 받으셨습니까? 장서관은 후궁의 출입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요.”
질문을 들은 레지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프리아를 쳐다봤다. ‘그 사내 후궁’이 또 왔다며 쑥덕거리는 사서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참이었다. 바람둥이로 유명한 바이런과 간도 크게 장서관에서 밀회를 나누다 황제에게 들켜 피바람이 불었다며 목숨이 아깝거든 그냥 못 본 척 해야 한다는 것이다.
궁 안에 사내 후궁이라고는 단 한 명, 알훼니아 출신의 남총뿐이었다. 황제가 끼고 사는 것이 납득될 정도로 요사스러운 미모를 지닌 사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다회에는 관심이 없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늘 불참했지만 궁의 시녀들은 쓸데없이 이런 저런 소문을 듣고 와 레지나에게 전달해 주곤 했다.
그에 더해 사서들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절로 호기심이 들었다. 얼마나 굉장한 미인이기에 황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건지. 장서관에 와 있다고 하니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마침 레지나 앞으로 눈에 띄는 미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과연, 황제의 총애가 한눈에 납득되는 미모다. 소문과는 다르게 요사스럽다기보다는 청순한 외모였으나 성격을 표현한 말일수도 있겠다. 그림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독보적인 미모를 지닌 금발 벽안 사내의 내면이 사악하다면 그건 그것대로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장서관에 휘몰아쳤다는 피바람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장서관을 즐겨 찾는다는 것을 보면 지략가 타입일까? 청순한 외모에 못된 내면이라니 레지나의 가슴이 기대로 뛰었다.
일단은 눈앞의 미남자가 소문의 사내 후궁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던컨’이라는 이름을 댄 청년이 레지나를 먼저 알은체해 왔다. 포섭의 목적인가. 후궁전을 들먹이는 레지나의 발언에 청년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장서관 출입 자격에 대한 딴지를 걸어온다. 다른 후궁과 다르게 자신은 황제에게 장서관 출입을 허락받았다는 총애의 과시인가?
“뭐 하러 허락을 받습니까? 시녀라고 하니까 그냥 들여보내 주던데. 시녀는 출입이 가능한데 후궁들은 못 오게 하다니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레지나의 반박에 청년이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귀하신 분들이라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장서관이 뭐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고요. 이 궁에서 건질 거라곤 후원과 장서관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명목뿐인 후궁이니 전 이렇게 해서라도 즐겨야겠습니다.”
맞는 말이다. 프리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이 궁에서 건질 거라고는 후원과 장서관, 그리고 하사받은 새 처소밖에 없었다.
“그래도 들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누가 나한테 신경을 쓴다고요. 누가 봐도 시녀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정문을 거쳐 들어와도 아무도 잡지 않았다. 레지나를 두고 시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후궁보다 수행 시녀들이 더 이쁘다고 쑥덕거리는 거 알고 있습니다. 뭐 사실이니까. 크게 상관없어요.”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레지나 님은 기품 있으시고 매력이 넘치시는걸요.”
그 미모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다니. 자신의 외모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고 신경 쓰지 않는 레지나였지만 사내 후궁의 말을 들으니 조금 빈정이 상했다.
“후궁은 외모가 전부지요.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시니 사내 후궁을 총애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레지나의 말을 들은 청년의 표정이 흔들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폐하가 아니니 단언할 수는 없지요. 뭐, 후궁이란 게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꽃처럼 피어 있고, 황제가 내키면 꺾어다 취하는.”
“……그렇군요.”
떠보듯 말한 레지나의 대답에 청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이 반응은 뭘까, 실은 황제의 총애를 원하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황제가 외모만이 아닌 내면까지 봐주길 원한다는 건가. 풀죽은 표정도 저리 고우니 바쁜 황제가 어디 후궁의 내면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있겠는가. 일단 품에 안고 봐야지.
잠시 수심에 잠겨 있던 청년이 책을 슬금슬금 빼가는 레지나의 동작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제가 먼저 신청한 예약 도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저도 신청한 예약 도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던컨 님께서는 다른 책을 고르시지요.”
“제가 먼저 볼 테니 레지나 님께서 조금 더 기다리시지요. 제가 사정이 급해서 그럽니다. 시간 여유가 없어요. 레지나 님께서 그동안 심심하지 않으시도록 제가 다른 책을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책장을 빠르게 훑어본 프리아가 다른 책을 몇 권 꺼내 레지나에게 내밀었다. 보름 내내 다락방에 갇혀서 온갖 책이란 책은 다 보았다. 아무리 악센다르 후궁이 낭만소설에 정통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프리아의 기대를 코웃음치며 레지나가 말했다.
“취향이 참 평이하시네요.”
“그런가요? 나름 꽤 다양하게 보는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배경이 어디냐, 금발이냐, 적발이냐, 흑발이냐, 공주냐, 귀족의 딸이냐, 상대는 왕이냐, 황제냐, 드래곤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한결같이 같은 내용입니다.”
레지나가 프리아가 꺼내놓은 소설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자존심 빼면 시체인 까칠한 미인. 하지만 집안은 몰락 귀족이거나 적국에 점령당한 불운한 공주겠지요. 그녀는 필연적인 이유로 돈 많은 세도가의 남자와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차갑고 오만하여 돈에 팔려 온 주인공을 멸시하고 괴롭힐 거란 말입니다.”
책을 손가락질하며 레지나가 말을 이어갔다.
“결국 남자는 술이나 미약에 취해서, 혹은 질투에 미쳐서, 혹은 오해 때문에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주인공과 동침을 하게 되겠죠. 처음엔 반항하겠지만 그녀는 어느덧 육체의 쾌락에 눈뜨게 되고 몸도 주고 어느새 마음도 주고, 그러면서 남자에게 휘둘려 가슴만 콩닥콩닥, 그의 진심이 뭘까, 날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내 육체만 취하는 걸까, 가슴앓이를 하게 되는 거죠.”
“…….”
그런가? 내가 읽었던 내용이 다 그런 내용이었던가? 묘한 설득력을 가진 레지나의 비평에 프리아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책도 봐요. 우리가 서로 보겠다고 다투는 마담 S 신간에서도 주인공은 정략결혼을 하게 될 겁니다. 낯선 곳에 시집와 외로움에 시달리며 꽃을 키우거나 고향에서 함께 온 동생 같은 시녀에게 의지하며 힘든 나날을 버틸 거고요. 그리고 차가운 성격의 남편은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있을 거예요. 몸만 겹치는 관계, 어긋나는 마음, 계속되는 갈등과 번민, 오해! 남자는 주인공의 몸을 맘대로 탐하고, 처음엔 그것이 싫기만 했던 주인공도 결국 남자에게 맘까지 허락하게 되고 말겠죠.”
“정말… 정말 그렇게 될까요?”
불안한 표정으로 프리아가 되물었다.
“물론이죠.”
“주인공이 성질 나쁘고, 오만하고, 남 배려할 줄 모르고, 심지어 초반에는 강압적이기까지 하고, 가진 건 돈과 권력뿐인데다 잊지 못하는 과거의 누군가도 있고, 사람 무시하고 감금하고, 허락 없인 어디 가지도 못하게 하는! 그런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고요?”
“감금까진 말씀 드리지 않았는데 이미 파악하고 계시는군요.”
레지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왜 그렇게 쉽게 상대방을 용서해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험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상대가 한 번 약한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어느새 제 품을 내어주고 있어요. 아프다고 하면 밤새워 간호해 주기나 하고.”
“아니 그것도 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닐까요?”
켕기는 데가 있는 프리아가 자신 없는 태도로 주인공을 두둔했다.
“그럴 만한 이유라면 어두운 과거, 유년기의 학대, 배신으로 얻은 상처, 인간에 대한 짙은 불신, 군주의 고독, 설마 이런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보지 않아도 훤합니다. 그게 주인공의 탓도 아닌데 왜 감싸 줘야 하나요.”
“맞아요, 그렇네요.”
레지나의 열변에 감탄한 프리아가 손뼉을 쳤다.
“그렇지만 뭐, 그런 재미로 읽는 책이기도 합니다. 답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둘이 행복해지기를 기대하게 되는 법이니까요. 현실에서는 그 반대의 결말만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렇네요.”
쓸쓸한 얼굴로 레지나의 의견에 동의하던 프리아가 다시 떠오른 의문을 꺼내놓았다.
“그럼 레지나 님은 뻔하다고 하시면서 왜 굳이 빌려 가시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