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자 후궁의 몸에 서린 찬 기운이 사라지고 점차 체온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
후궁의 입술이 달싹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오웬은 속삭임이 들려오는 입술로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기르.”
기르? 낯선 단어의 의미를 추측하기 위해 생각에 잠긴 오웬의 귀로 프리아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보고 싶어. 기르 보고 싶어.”
누굴 떠올리는 것인지 잠든 표정마저 애틋하다. 자신의 후궁이 보고 싶다 여길 만한 것은 세 가지 정도여야만 했다. 첫 번째는 황제 자신, 두 번째는 그렇게 좋아하는 이야기 책, 세 번째는 알훼니아의 가족.
“기르가 누구지?”
잠든 사람이 대답할 리 없겠으나 오웬은 프리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대답해, 프리아.”
꿈속에서 용케 목소리를 들었는지 후궁이 다시 입을 달싹였다.
“……는. 세상에서 가장…….”
세상에서 가장,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후궁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굳히던 오웬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에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뭐가 있지?”
황제의 의복수발을 들던 시종장이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그리고 다음 말 말씀이십니까? 폐하?”
“그래. 그 다음으로 들어갈 적절한 말을 떠올려 봐.”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세상에서 가장 큰, 세상에서 가장 높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정도가 아닐까요?”
시종관이 들고 있는 상자에서 그날의 여밈 단추를 고른 황제가 시종장에게 다시 물어왔다.
“또 다른 건 없나?”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그런 말도 있겠지요. 편지에 쓰실 문구라도 고르시는 건가요?”
친족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의 문구를 떠올리는 것이라 생각한 시종장이 적극적으로 협력해 왔다.
“세상에서 가장 흠모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
“기르라는 이름 들어 본 적 있나?”
자신의 말을 끊은 황제가 던진 질문에 시종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폐하, 지금 기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는 사람인가? 궁 안에 있나?”
“예전에 계셨었죠. 지금은 아니 계시지만. 폐하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에 궁을 떠나셨는데 그 이름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그자가 제국인이라는 건가?”
“그자라니요, 폐하. 폐하의 작은 할아버지 되시는 황실 어르신입니다.”
시종장의 말을 들은 오웬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긋나는 대화를 지적했다.
“그분을 말하는 게 아니야. 알훼니아의 대공 가문에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있는지 알아봐.”
“예? 프리아 님의 가족 되시는 분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후궁이 키우던 강아지나 망아지 같은 게 있었는지도 알아봐. 교우 관계나 특별히 가깝게 지낸 사내가 있었는지도.”
“그런 거라면 프리아 님께 직접 여쭤보시는 편이…….”
빠를 것 같은데요……. 설마 지금 프리아 님의 뒷조사를 하시려는 겁니까? 폐하? 차마 대놓고 그렇게 묻지 못한 시종장이 아침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젊은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바이런 님도 기르 전하에 대해 물어 오신 적이 있습니다.”
“바이런이?”
“예, 폐하. 그런데 바이런 님께서도 기르 전하는 아니시라고, 알훼니아 출신의 미인 주치의를 찾는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제가 아는 바로는 아직 그런 분은 입궁하신 적이 없습니다.”
바이런이 찾던 알훼니아 출신의 미인 주치의라면 후궁 본인이었다. 아는 사람의 이름을 적당히 둘러댔던 것인가.
“주치의하고 그렇게 친한 관계가 될 수 있나?”
“예? 폐하? 감히 듣지 못하였습니다. 외람되지만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웬이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한 시종장이 반문했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은 오웬이 시종장이 입혀 주는 재킷을 입기 위해 양팔을 들었다.
* * *
“올가 님, 그 빗 좀 건네주시겠어요?”
유디스의 요청을 들은 올가가 열린 서랍에서 상아빗을 꺼내들었다. 지척의 거리에서 굳이 올가라는 한 단계를 거쳐 위엄을 세우는 유디스를 보며 프리아가 웃음을 삼켰다. 기상 의식 후, 가벼운 세안을 거쳐 이어지는 아침 단장 시간에는 유디스를 제외한 나머지 수행 시녀들은 자리를 물리는 것이 지금까지 유디스가 정한 원칙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부터 올가가 그 자리에 함께한다는 것이다.
“둘이 단짝되기로 한 거야?”
프리아가 묻는 말에 멈칫한 유디스가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올가 님도 좋은 분이시고, 저도 슬슬 차석 시녀 후보를 정해야 할 것 같아서요.”
혼인을 위해 사임한 리브론을 제외하면 남은 수행 시녀라고는 올가와 이사벨밖에 없거늘 그 안에서 또 ‘후보’씩이나 정한다니 웃지 않으려 해도 유디스가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유디스 님을 도와드리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유디스 앞에도 겸손하게 말하는 올가를 프리아가 따뜻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유디스 외에도 챙겨야할 시녀가 둘이나 있었는데 그간 자신이 너무 무심했었다. 본가로 돌아갔던 다른 시녀들과는 달리 궁에 머물렀다는 그녀를 생각하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올가는 린드가르트 님의 궁에 있었다고 했지?”
“예, 프리아 님.”
“린드가르트 님의 처소에 아이가 놀러오기도 해?”
“아이라면 레온 저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린드가르트 님에게 아이가 있었다고 들었거든. 혹시 본 적이 있나 해서.”
“가끔 유모님과 함께 방문하십니다만 저는 먼발치에서만 뵈었을 뿐이에요.”
레온과 그 어머니의 사이는 어떠한지, 레온은 행복해 보였는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남들이 보기엔 일면식도 없는 자신이 물어볼 사안이 아니었다.
“프리아 님, 지금 다른 분 안위까지 신경 쓰실 때가 아니에요. 폐하의 탄신일이 이제 9일밖에 남지 않았다고요. 폐하께만 집중해 주세요.”
다정이 병인 상전을 단속하며 유디스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본궁 시녀들은 프리아 님 수발을 어찌 든 건가. 보름새에 머릿결이 이리 푸석해지셨을 줄이야.
“아무래도 시종장님에게 가서 여쭤봐야겠어요. 폐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니까 무얼 좋아하시는지도 잘 알고 계실 테죠.”
다른 궁에 질 수 없어! 결의를 불태우는 유디스를 보며 프리아 역시 마음의 안식처를 떠올렸다.
“유디스, 본궁에 갈 거면 나도 따라갈래. 오랜만에 장서관에 가 봐야겠어.”
“프리아 님은 책이 그렇게 좋으세요? 좋아요, 함께 가요. 오늘은 늦으시면 안 돼요. 오늘 저녁부터 집중관리에 들어갈 거니까요.”
황제의 탄신일을 목표로, 매일 저녁 유디스의 집중 뷰티살롱이 펼쳐질 예정이다. 뭔지 몰라도 벌써부터 하기 싫어진 프리아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제가 먼저 골랐습니다만.”
녹색 장정으로 된 양장본을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으면서 눈앞의 여인이 프리아에게 말했다. 프리아 역시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레이디, 이 책은 제가 신청한 예약 도서입니다.”
여인이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저도 신청했습니다. 신사분께서는 양보의 미덕을 되새겨 보심이 어떠하신가요?”
“제가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빠르게 보고 반납하겠습니다.”
많고 많은 책 중에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은 것은 눈물콧물 빼는 신파로 유명한 마담 S의 신작 낭만소설이었다.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전작에서는 사랑이냐 신분이냐를 놓고 결국 사랑을 택한 여주인공의 선택을 두고 신분 사회를 뒤흔드는 문제작이라며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는 고발이 잇따르기도 했다.
품귀 현상을 빚어 암시장에서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던 인기 작가의 신작이 오늘 장서관에 입고되어 서가에 막 진열된 참이었던 것이다. 그 신작을 놓고 젊은 여인과 프리아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책을 빌려 가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자유로운 한 손으로 서가를 뒤져 한 권의 책을 꺼내 든 프리아가 책 제목을 여인에게 들어보였다.
“신간입니다.”
“이미 읽었습니다. 뒷심이 부족하더군요.”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독서가임을 알아본 프리아가 여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렇긴 합니다. 초기작은 괜찮았습니다. 특유의 몰아치는 분위기가 있달까요.”
“신사분도 그렇게 느끼셨나요? 남자 주인공의 짐승 같은 매력이······.”
“휘몰아치죠.”
독서가는 많지만 취향마저 일치하는 동료를 찾기는 어려운 법. 한동안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던컨입니다.”
더는 주치의 신분을 가장할 수 없게 된 프리아가 기르에 이어 두 번째로 만만한 장조카의 이름을 내놓았다. 던컨이라는 이름을 들은 여인이 빤히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레지나입니다.”
악센다르 출신의 레지나 공녀. 이름뿐이긴 했지만 프리아는 이미 그녀를 알고 있었다. 프리아보다도 큰 키, 표정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돌처럼 단단한 얼굴, 얇은 입술은 양 끝이 아래로 늘어져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미모의 차녀를 아낀 악센다르의 대공이 차녀 대신 보내왔다는 소문의 후궁이었다.
“혹시 목련궁의 레지나 님이십니까?”
확인을 위해 프리아가 묻자 레지나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도 불리지요. 난 그 궁 이름 정말 싫습니다. 후궁전에 꽃 이름을 붙이다니 뻔하고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