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약이 없을 리가 없다. 무언가 잘못된 거겠지.
프리아는 책장의 책을 한 권씩 꺼내 뒤표지를 벗겨냈다. 비밀을 간직한 책은 단 한 권뿐이다. 있지도 않은 비밀공간이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다. 책들은 그저 빼곡하게 적힌 활자만을 꺼내 보여 줬을 뿐 프리아에게 답을 알려 주지 않았다.
‘유디스가 치웠나?’
그것이 뭔지도 모르는 유디스가 가져갔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프리아는 일말의 가능성을 잡고 매달렸다. 아끼는 수석 시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잔혹한 대답을 프리아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프리아 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해지셨어요.”
이제 약이 없다. 소지품 상자에 넣어 둔 한 알을 제외하고는. 아직 그리 춥지 않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린 한기가 올라왔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사람처럼 어지럽고 시야가 마구 흔들렸다. 이토록 가까이 있는데 유디스의 목소리가 멀리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프리아 님! 정신이 드세요? 많이 놀라셨나 봐요. 쥐가…….”
욱.
한순간에 오장육부가 뒤집혔다. 입을 막은 채 뛰어나가는 프리아의 뒤를 유디스가 놀란 표정으로 쫓아갔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난 올가를 향해 이사벨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비위 한번 되게 약하신가 봐요. 공주님이 따로 없네.”
타 공국의 공녀들을 제치고 승은 후궁이 된 것도 모자라 으리으리한 새 처소까지 하사받다니. 얼굴 좀 잘난 것 빼고는 그리 특별한 것도 없어 보이는데 신기한 일이었다.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셨는데. 저도 가 봐야겠어요.”
유난 떠는 사내 후궁과 수석 시녀가 사라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올가를 보며 이사벨이 쏘아붙였다.
“둘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요. 가 봤자 무슨 도움이 된다고. 정말 쥐라도 나오면 어쩌려고요.”
“제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단호한 표정으로 걸어가던 올가가 내실 입구에서 멈춰 섰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드는 동작에 이사벨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건 뭐예요?”
어느새 올가의 곁으로 다가온 이사벨이 금줄을 손가락질했다. 올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동그란 물체를 발견한 이사벨이 신난 표정으로 재촉했다.
“로켓이잖아요. 누구 거지? 어서 열어 봐요.”
표면에 박힌 보석의 빛과 크기만으로도 보통 물건이 아니란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궁안에 여인들은 많았으나 감히 중하급 시녀들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돌아갈 본가도 변변치 않은 올가의 것일 리 만무하고 자신의 것도 아니니 남은 것은 두 사람, 유디스와 후궁이었다.
황가의 문양을 보아하니 후궁의 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그렇게 끼고 돌며 아끼는 수석시녀에게 선물해 줬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로켓 안에서 숨겨둔 정인의 초상이라도 나온다면 신나게 품평해 줄 생각이다. 후궁이 따로 마음에 둔 사내가, 혹은 여인이 있다면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는가.
물끄러미 손바닥을 바라보고만 있는 올가를 보다 못한 이사벨이 로켓을 빼앗아들었다.
“주인을 알아야 찾아주죠.”
달칵, 잠금쇠가 엇갈리는 소리와 함께 벌어진 로켓이 제 속을 드러내보였다. 드디어 나타난 초상의 주인을 알아본 이사벨이 김빠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시시해. 재미없네요.”
후궁이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다면 재미있겠다 생각했는데 겨우 황제였다니. 이거 참 시시해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황제의 초상 따위 궁마다 걸려 있는 것을 뭐하러 목에까지 걸고다닌담.
이사벨도 한때는 황제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되는 신분 상승의 꿈을 야무지게 꾼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일이었다. 사내에게 빠진 황제 따위 이젠 이사벨 쪽에서 사양이었다. 적당히 들러리나 서다가 수행 시녀 자격을 내세워 좋은 혼처자리나 알아볼 생각이었다.
아무리 예쁘다 한들 사내인 것을. 사내에게 빠진 멍청한 황제의 초상을 홀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올가를 보며 이사벨은 기이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 여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이봐요, 사내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승산이 없다고요. 혹여 마음이 바뀐다 해도 누가 당신 같은 우중충한 시녀를 봐 준다고.
“제가 프리아 님께 가져다 드릴게요.”
“그러세요, 그럼.”
그새 흥미를 잃은 이사벨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으로 돌아가 일찍 쉬면 좋으련만 모시는 후궁이 저리 엄살을 떨어대니 먼저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소파로 돌아간 이사벨에게 묵례를 보낸 올가가 내실로 방향을 틀었다.
“프리아 님, 어떠세요? 어지럼증은요? 속 메스껍지 않으세요? 태의를 불러올까요?”
가벼운 구역질 증세를 보였던 프리아가 안정을 되찾은 후에도 유디스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달복달했다. 내실 의자 위에 몸을 누인 프리아가 괜찮다며 손을 저어보였다.
“내가 쥐를 정말 싫어해서 놀랐을 뿐이야. 이제 괜찮으니까 유디스도 가서 쉬어.”
“어떻게 그래요! 아까 얼굴 하얗게 질리시던 것만 생각하면……. 그 몹쓸 짐승이 나타나기만 하면 제가 잡아버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 오늘 프리아 님 옆에서 불침번 설 거예요.”
“쥐를 잡아 보긴 했어?”
“……아뇨. 쥐가 뭐 별건가. 내리치면 죽겠지요.”
작은 주먹을 암팡지게 흔들어 보이는 유디스를 보며 프리아가 미소 지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었는데 찬물을 좀 마시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쥐가 얼마나 빠른데. 유디스 손에 잡힐 정도면 엄청 먹어서 강아지만 한 사이즈가 되어야만 할걸?”
“상상하니까 너무 징그러워요! 경비병을 불러올까요?”
“그러지 마. 나도 쥐 못 봤어. 아까는 뭘 좀 잃어버린 줄 알았거든. 그래서 그런 거야.”
“뭘 찾으시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물건 위치가 제멋대로 바뀌어 있어서 한소리 하려던 참이었어요. 제가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꼭 이런다니까요. 휴가 같은 거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부모님이랑 형제들 얼굴도 보고 좋았지? 더 있다 와도 되었는데.”
“뭐, 맨날 보던 사람들이었는데요. 새삼스럽게. 저는 프리아 님 얼굴 보고 싶어서 울었어요!”
“나 말고 내 얼굴만 보고 싶었어?”
“분리할 수 없잖아요. 프리아 님의 핵심! 프리아 님의 결정체! 프리아 님의 완성이라고요.”
“정말 얼굴이 중요하구나. 그걸 1순위로 찾아볼게.”
“중요하죠. 그런데 저는 프리아 님이 다른 얼굴이었어도 좋아했을 거예요. 꾸며드리는 재미는 덜했겠지만.”
있지도 않은 쥐를 잡겠다고 경비병까지 데려올 기세인 유디스를 말리며 프리아는 한층 더 안정을 찾아갔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다. 시기만 조금 앞당겨졌을 뿐.
남은 약은 한 알, 그리고 또 한 알이 더 있었다. 다락방 침대 밑 마루 틈새에 한 알을 숨겨놓고는 그만 깜박하고 놓고 왔다는 게 생각났다. 우선 상자 속에 넣어두었던 한 알을 먹고 보름을 버티면서 다락방에 다시 들어가 남은 약을 가져올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 약을 무사히 찾은 뒤 또 보름이 지난다면…….
“쥐는 제가 잘 잡을 수 있어요. 부르시기만 하면 달려오겠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기척도 없이 어느새 올가가 프리아의 내실에 들어와 있었다.
“올가 님은 쥐를 잡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유디스의 질문에 올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집은 하녀의 수가 부족했거든요.”
“저에게도 방법을 알려 주세요. 강아지만 한 크기만 아니라면 저도 함께 할게요.”
어린 시절부터 기르와 산과 들을 다니며 식량이 부족할 때면 작은 동물을 잡아 먹어야했다. 처음에는 불쌍하다며 고기도 먹지 않으려했지만 기르는 모든 것이 자연과 순화되어 하나가 되는 과정이라며, 사람 역시 언젠가 들짐승에게 제 몸을 내어주는 날이 온다고 가르쳐 주었다.
정작 사냥의 달인이 여기 있는데 프리아를 지켜주겠다며 여린 여인들이 쥐잡기 결의에 나섰다. 이제 더 이상 쥐똥을 보는 일은 없을 텐데 말이다. 조용히 웃으며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아에게 올가가 다가와 손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프리아 님, 떨어뜨리신 물건입니다.”
올가가 내민 손 안에는 황제에게 받은 로켓이 들어 있었다. 옷 갈아입을 때 유디스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되어 목에서 빼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경황이 없어 그만 떨어뜨린 모양이다.
“프리아 님 물건이라고요? 처음 보는데요?”
프리아의 물건이라면 장신구에서부터 양말 한짝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유디스다. 처음 보는 엄청난 장신구의 등장에 유디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 고마워. 올가.”
유디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손안에 숨기려고 했던 프리아의 계획은 영롱한 보석의 빛에 홀려버린 유디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게 뭐예요? 어디서 나신 거예요?”
“……응. 별거 아냐.”
“별건데요! 충분히 별건데요! 이 심상치 않은 크기! 이 영롱한 빛! 황가의 문양이 이렇게 크게 존재감을 빛내고 있는데 별거 아니시라니요. 누가 보아도, 저 멀리서 보아도 폐하의 하사품! 티가 팍팍 나는 물건이잖아요. 폐하께 받으신 거 맞죠?”
“……응.”
프리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유디스의 의욕이 또 불타오르고 있다.
“잃어버리셨다는 물건이 이거였구나. 프리아 님, 열어봐도 될까요? 열어 보게 해 주세요! 제발!”
“그래. 열어 봐.”
열어 보게 해도, 열어 보지 못하게 한다 해도 유디스의 닦달을 피할 수는 없었다. 프리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로켓을 열어본 유디스가 등장한 황제의 초상에 환호했다.
“이럴 줄 알았어요! 제가 이럴 줄 알았다고요. 로켓 교환이라니! 꺄아! 로맨틱해!”
개 목걸이야.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프리아에게 유디스가 눈을 더욱 빛내며 물었다.
“서로 교환하신 거 맞죠? 그렇게 초상은 싫다고 하시더니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신 건가요? 프리아 님도 답례하신 거 맞죠?”
아니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