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온 것일까.
오늘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기상이 늦은 프리아와는 다르게 황제는 늘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시작하곤 했다. 아침을 준비해 온 시종장이 이제 처소로 돌아가도 된다는 황제의 전언을 알렸다.
정말 이렇게 나가도 되는 것일까. 그동안 머물렀던 다락방과 내실을 돌아보며 프리아는 짧은 감회에 잠겼다. 원해서 그리 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름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함께 지낸 사이다. 마지막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인사 없이 처소 복귀를 명한 황제의 태도가 묘하게 그다워 쓴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자주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더니 왜 왔을까.
“폐하.”
몸을 일으키는 프리아를 오웬이 손짓해 제지했다. 난로의 불빛을 등지고 오웬이 침대로 걸어왔다. 그대로 새틴 이불을 들추고 침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태연하게 프리아가 베고 있던 베개 한쪽 끝으로 제 머리를 눕혔다.
“……폐하?”
더 자라는 것처럼 오웬이 손바닥을 들어 프리아의 눈을 가렸다. 이것은 꿈인가? 몽롱한 가운데 눈이 감기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방 안에는 프리아 자신뿐이었다. 황제가 누워 있던 옆자리가 선연해 내려다보았으나 텅 비어 있었다. 침실을 빠져나와 내실의 문을 열었다. 모여 있던 수행시녀들이 문 열리는 소리에 한꺼번에 뒤를 돌아보았다.
“프리아 님, 벌써 일어나셨네요? 그러지 않아도 막 깨워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유디스가 들고 있던 은종을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이며 걸어왔다. 흰 대야에 주전자의 물을 따르며 올가가 소리 없이 문안인사를 올렸다. 세탁한 아마포를 성의 없이 들고 있던 이사벨도 무릎을 굽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프리아 님?”
“폐하는 언제 돌아가셨지?”
프리아의 말을 들은 수행 시녀들이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는 아직 발걸음하시지 않았습니다.”
“안 왔다고?”
내가 헛것을 봤나. 꿈을 꾼 건가.
표정이 이상해진 프리아를 본 유디스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프리아 님. 이렇게 예쁜 궁도 내려주셨는데 곧 오실 거예요.”
“걱정이 아니라 어젯밤에 분명 본 것 같아서.”
“폐하께서 굴뚝을 타고 내려오셨거나 창문으로 올라오신 게 아니라면 저희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죠. 혹시 모르니 경비병에게 물어볼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프리아가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붙어 있었던 기간이 길긴 했나 보다. 그런 착각을 다 하다니.
“프리아 님도 어제 들으셨죠? 가장 사랑받는 후궁이 머물렀던 궁전이라고. 어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예쁘긴 하지만 규모가 작아서 인사치레가 아닐까 싶었는데요. 창들이 다 호수 쪽으로 나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주방이며 식당이며 접견실에, 작은 파티홀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더라구요. 오래 비워 뒀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방마다 해가 잘 들어와서 곰팡이 핀 곳 하나 없었어요. 욕실도 큼지막하니 층마다 여러 개 있어서 마음에 들었어요.”
어제 일찍 잠에 드느라 궁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프리아를 끌고 다니며 유디스가 칭찬을 늘어놓았다. 실내 장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툴툴거리더니 그새 마음이 바뀐 모양이다.
“다들 쓸 방은 정한 거야? 유디스는 어디를 쓰기로 했어?”
“저는 3층에 있는 가장 큰 방과 그 옆방이요.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정말 예쁘거든요. 이사벨은 복도 끝 방 세 개를 쓰기로 했고, 올가 님은 2층에 계시기로 했어요.”
프리아의 침실과 내실 그리고 응접실은 2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1층에는 접견실과 작은 파티홀이 있었으며 주방과 식당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의식주를 비롯해 생활 전반의 업무를 처리하는 시녀들은 2층과 3층에 나눠 배치되었고 허드렛일을 맡은 하녀들은 다락방을 숙소로 쓰고 있다고 유디스가 말했다. 프리아가 사내이긴 하지만 후궁의 신분인 까닭에 남자 시종들과 경비병들은 별도로 지어진 건물에 기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궁전 주위를 둘러싼 정원에는 꽃나무와 과실나무들이 오랜 세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곳곳에 세워진 정자 역시 외관이 아름다워 바깥 날씨를 즐기며 티타임을 가져볼 만했다.
무엇보다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호수였다. 푸른 물결 위로 흰 성이 반사되어 흘러가고 그 위를 백조 무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정원 안에는 대리석 조각으로 만들어진 분수대도 설치돼 있었지만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호수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호수와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은 아직 울창한 녹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성 이름이 백조래요. 백조 성, 제비에 비하면 크게 출세한 거죠? 그렇죠?”
혼자 프리아를 따라온 유디스가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수행 시녀들이 늘어난 이후에는 함께 어울려야 했으나 프리아는 오랜만에 본 유디스와 호숫가를 거닐며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리브론과 떨어지게 되어 섭섭하지?”
“아유, 섭섭하긴요. 영 못 만날 것도 아닌걸요. 이젠 자작 부인이 될 거니까 프리아 님이 청해 주시면 언제든 궁에 놀러올 수도 있고요.”
“자작과 함께 방문하라고 편지를 보낼게.”
겨우 생긴 단짝 친구와 떨어지게 된 유디스가 신경 쓰였다. 그녀가 유디스와 같은 나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슬슬 유디스에게도 좋은 사람을 짝지워 줘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유디스는 어떤 사람이 좋아?”
“저요? 저는 프리아 님 같은 분이 좋아요.”
“나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일단, 예쁘고 착하고 성격 좋은 사람.”
“꼭 예뻐야 해? 예쁘다는 게 어떤 거야?”
“몰라서 물으세요? 물 위에 비친 프리아 님의 모습을 보시라고요. 이게 사람이야, 정령이야.”
예쁜 게 뭔지 모르겠다는 프리아의 말에 코웃음치며 유디스가 일렁이는 호수면을 가리켰다.
“유디스, 혹시 바이런하고 친해?”
뜬금없는 정령 타령에 프리아가 잠시 잊고 있던 절친을 떠올렸다. 프리아의 말을 들은 유디스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요. 소문처럼 바이런 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시죠? 저는 프리아 님을 그렇게 무서운 후궁으로 키우지 않았단 말입니다.”
“소문이 어떻게 났는데?”
“프리아 님이 바이런 님과 밀회를 가지시다가 폐하께 들켜 두 분께서 결투를 하셨는데 바이런 님이 크게 패하셔서 중상을 입고 자택에서 요양 중이시라고요. 그리고 질투에 눈이 돌아간 폐하께서 프리아 님을 끌고 침실로 들어가 짐승같이! 밤낮없이! ……대화를 나누셨다고.”
몸의 대화.
그 오고간 대화를 알고 싶다.
“소문이 그렇게 났어? 바이런은 멀쩡해.”
보는 눈이 많았던 탓에 바이런이 아무리 입단속을 했어도 소문은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바이런 님의 족제비처럼 미끈한 외모가 상하지 않은 건 다행이네요. 제가 외간 사내 그렇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는데. 프리아 님, 본인의 미모를 자각 좀 해 주세요. 이걸 보고 어떻게 안 반해?”
호수에 비치는 프리아의 모습을 다시 가리키며 유디스가 혀를 찼다. 유디스와 어울리는 착하고 성격 좋고 인내심 강한 귀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알훼니아의 큰 형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자국 내에서는 찾을 수 있겠으나 새 삶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먼 곳이었다.
이제 자주 볼 수 없고 감히 부탁을 할 상대도 아닌 황제에게 의논할 수는 없다. 인맥이 넓기로는 바이런과 시종장만 한 사람들이 없었다. 이상한 소문까지 난 마당에 바이런을 만날 수는 없으니 조만간 시종장을 다시 만나 이 문제를 꼭 의논해야겠다고 프리아는 마음먹었다.
“유디스! 유디스!”
저녁 식사 후, 혼자 책을 보겠다며 내실로 들어갔던 프리아가 수석 시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달려나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얼굴 위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응접실에 모여 있던 수행 시녀들이 놀란 얼굴로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올가와 이사벨이 수행 시녀가 된 후로 꽤 시간이 흘렀지만 저렇게 동요한 모습의 후궁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프리아 님! 무슨 일이세요? 혹시 쥐라도 나왔나요?”
하녀들에게 지시할 업무가 있다며 복도에 나가 있던 유디스가 프리아의 외침을 듣고 돌아왔다.
“쥐?”
갑자기 나온 미물의 호칭에 프리아가 오히려 반문했다.
“말도 마세요! 하녀들에게 들었는데 제비궁에서 짐을 옮기다가 쥐똥을 한 무더기 발견했다지 뭐예요?”
“쥐똥이요?”
유디스의 말을 들은 이사벨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불결한 곳에서 지냈다니 믿을 수가 없다. 하녀를 불러 내방부터 다시 청소하라고 해야겠어.
“……쥐똥을 어디서 봤는데?”
후궁 역시 쥐는 질색이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수석 시녀, 유디스에게 물었다.
“글쎄, 프리아 님의 짐을 옮기다가 부주의로 책장을 넘어뜨렸는데 책을 정리하던 와중에 바닥에서 쥐똥을 발견했대요! 그것도 한 무더기나! 정말 끔찍하죠? 그것도 얼마나 큰 놈들인지 똥이 토끼 똥만 했대요. 그렇게 매일같이 청소를 했는데 어떻게 쥐가 다 살고 있었는지 몰라요. 여기는 더 오래된 궁전이니까 혹시 모른다고 이번엔 샅샅이 다 뒤지면서 청소했다고 안심해도 좋다고는 했는데 혹시 쥐를 보신 거예요?”
그건 쥐똥이 아니다.
비상약을 넣어 둔 책을 꺼냈는데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무게가 가벼웠다.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프리아는 천천히 책의 뒤표지를 벗겨 숨겨진 공간을 확인했다. 동그랗고 까만 환약들이 담겨 있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