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9)화 (60/237)

“음……. 잘 지냈어.”

장서관에서 끌려가 오늘 다시 풀려나기까지 보름간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회상한 프리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끝이에요?”

프리아의 짧은 대답에 실망한 유디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해 주세요. 생략 같은 거 하지 마시고. 자세히. 하나도 남김없이.”

죄수를 취조하는 심문관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한 유디스가 프리아의 전신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빠질 데가 어디 있다고, 그새 또 야위셨다. 내가 없었으니 누가 프리아 님을 챙겨드릴 수 있었겠냐고. 후궁의 수석 시녀로서 황제의 총애는 환영할 일이었지만 프리아 님의 몸이 축나는 것까지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디스, 그 이야기를 꼭 이렇게 서서 해야만 할까?”

형형한 유디스의 눈빛에 위축당한 프리아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장소를 벗어날 것을 요청했다. 어차피 들어야할 추궁이라면 마음 편한 제비궁에 가서 안락한 소파에 몸을 맡긴 채 듣고 싶었다. 황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코치코치 캐물을 것이 분명한데 하필 장소가 업무로 오가는 이들이 많은 본궁 앞이 아닌가.

“좋아요, 그럼 그간의 일들은 돌아가서 듣기로 해요.”

돌아가 뭘 좀 먹이면서 자백을 받아내기로 마음먹은 유디스가 관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제비궁 말인데요, 프리아 님. 저희가 없는 동안에 뭔가 수리라도 했나 봐요. 돌아온 건 며칠 전인데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저희는 그동안 별궁에서 머물렀거든요.”

“마차가 왜 오지 않지요? 설마 거기까지 걸어가라는 건 아니겠죠?”

제비궁이 수리를 하건 말건 새로 맞춘 드레스에 흙먼지 묻히기가 죽기보다 싫은 이사벨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시종장이 힘차게 걸어나왔다.

“프리아 님, 새 처소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새 처소요?”

“새 처소라고요?”

“처소를 옮기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시종장의 말에 놀란 프리아와 시녀들이 한마디씩 말을 꺼내놓았다. 말수 적은 올가도 뒤늦게 감탄을 보탰다.

“새 처소라니, 정말 기쁜 소식이네요.”

“드디어 장미궁을 저희가 빼앗게 된 것인가요? 시종장님?”

해묵은 원한을 잊지 않고 있는 유디스가 눈을 빛냈다. 잠시 멈칫한 시종장이 유디스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곧 알게 되겠지만 훨씬 더 좋은 곳이란다. 프리아 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차를 곧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장이 손짓하자 시종관이 빠른 걸음으로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화려하게 장식된 황실 마차를 탄 시종들이 나타났다. 첫 번째 마차에 프리아와 유디스 그리고 시종장이 오르자, 싫은 티를 역력히 내며 이사벨이 남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올가가 마차에 올라탔다.

큰길을 빠져나온 마차가 곧 샛길로 진입했다. 울창하게 우거진 자작나무 숲을 가리키며 시종장이 말했다.

“호젓하고 아름다워 산책길로도 명성이 나 있는 곳입니다.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겨울이 되어 눈으로 땅이 덮이면 더욱 아름답지요. 프리아 님의 처소 주위로는 출입이 제한될 것이니 편안하게 풍광을 즐길 수 있으실 겁니다.”

“갑자기 왜 처소를 바꾼 건가요? 제비궁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드디어 돌아가나 싶었더니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된 프리아가 의문 섞인 표정으로 시종장에게 질문했다.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다. 그저 폐하께서 프리아 님께 새 처소를 마련해 주시고자 벌이신 일입니다. 갑자기 결정하시는 바람에 저희도 준비하느라 바빴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지난 보름간을 떠올리며 시종장이 프리아의 질문에 답했다. 2주일 정도면 가능하지 않겠냐는 황제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던 자신을 원망하며 시종장은 노구를 끌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녀야했다. 오래 비워져 있던 별궁의 안팎을 손봐 그 짧은 기간에 황제에게 가장 총애 받는 후궁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바꾸는 일은 아무리 노련한 시종장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황제의 탄신연 준비까지 동시에 소화해내느라 코피가 터질 지경이었다.

겨우 준비를 마친 별궁을 황제에게 먼저 선보이며 시종장은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으나 황제가 건넨 짧은 칭찬에 그간의 피로가 다 풀리는 것을 느꼈다.

왜 직접 보여 드리지 않으시냐는 시종장의 물음을 황제는 그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빠져나갔다. 이렇게 큰 선물을 준비하고도 생색조차 내지 않으려 하시다니. 부끄러우신 게지. 황제의 행동을 제멋대로 해석한 시종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본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마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경사진 언덕에 흰색으로 빛나는 궁전 하나가 나타났다. 규모는 제비궁과 비슷한 아담한 별궁이었으나 주위로 작은 정원을 품에 안은 돌담이 둘러져 있어 한층 아늑하고 정감 있어 보였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성 위로는 청색의 지붕이 얹혀 있었는데 그 모습이 호수에 반사되어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

“너무 예뻐요! 프리아 님!”

“멋진 곳이네요.”

수행 시녀들의 감탄에 시종장이 뿌듯한 표정으로 수염을 매만졌다. 별다른 말 없이 멈춰선 프리아의 어깨를 유디스가 흔들며 반응을 재촉했다.

“프리아 님, 너무 기쁘셔서 말이 나오시지 않는 거죠?”

기쁘기보다는 두렵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앞선다. 다 쓰러져가는 폐궁이나 출입이 불편한 탑 같은 곳으로 안내할 줄 알았는데 이건 너무 제대로 된 별궁이 아닌가. 그림에서 빠져나온 듯한 별궁의 모습에 프리아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역대로 가장 사랑받는 후궁이 머물렀던 궁전입니다. 선대 폐하께서도 자주 찾으시던 곳이었지요.”

총애하는 후궁이 자주 바뀌었던 탓에 궁의 주인 역시 해를 다투어 바뀌곤 했다. 궁을 둘러싸고 다툼이 잦았던 까닭에 골치 아파진 선황이 폐쇄를 명하자 아름다웠던 궁은 곧 제 명성을 잃었다.

오웬은 정무 외에도 적극적으로 궁의 살림을 살피는 한편 버려진 성이며 방치된 땅에도 관심을 보였다. 사소한 영토 분쟁은 있었으나 침략받는 일은 없어 오래도록 평화가 유지되어 온 제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불안 증세를 보이던 어느 황제가 기술자를 불러 자신만이 숨을 수 있는 대피소와 아무도 모르게 궁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대피로를 여러 곳 만들어 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몇 대 전의 흔적을 더듬던 오웬이 어느 날 별궁을 발견해냈다. 대피로 중 하나가 별궁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 이 별궁을 차지해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길이 없는 프리아가 자신이 왜 이 궁을 하사받게 된 것인지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뒷걸음쳤다.

마차 소리를 들은 시녀들이 달려나와 새로운 궁의 주인을 환영했다. 제비궁에서 일했던 시녀들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있었다. 내외부 수리를 맡은 일꾼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사이, 그녀들은 시종장의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묵은 먼지를 닦아내고 낡은 양탄자와 커튼을 새것으로 교체한 뒤 가구를 재배치했다. 제비궁에서 옮겨온 짐의 정리 또한 그녀들의 몫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시종과 시녀들이 프리아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표했다. 인원을 늘렸는지 낯선 얼굴들도 보였다.

처음 보는 가구들과 새 커튼, 방 안을 장식한 고급품에 시선을 빼앗긴 수행 시녀들이 들뜬 얼굴로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녔다. 러플과 레이스로 뒤덮이지 않은 침실을 본 프리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프리아를 따라 들어온 유디스가 가구 표면을 장식한 금동을 쓰다듬으며 프리아에게 말을 건넸다.

“누가 꾸민 건지 몰라도 영 심심하네요. 골드와 크림색을 주로 배치한 건 세련되어 보이긴 한데 너무 안이한 선택으로 보이고. 가구들도 지나치게 중후하달까. 로맨틱함이 없잖아요. 화사하게 배경부터 산호색으로 싹 갈아엎는 게…….”

유디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리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이 좋아.”

“더 반짝반짝하고 사랑스럽게 바꿀 수 있을 텐데요. 여기 있는 것들 혹시 시종장님이 고른 거 아니에요?”

유디스의 소녀 취향대로 따르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릴 판이다. 몇 대를 내려온 별궁이라더니 고전적인 분위기가 프리아는 딱 마음에 들었다.

“유디스? 꾸며주신 성의가 있으니까 당분간은 이대로, 이대로 지내자. 유디스 방은 유디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반짝반짝하고 사랑스럽게 바꿔도 되니까.”

간신히 유디스를 설득하자 피로가 몰려왔다. 그저 마차를 타고 짧은 거리를 이동한 뒤 옷 갈아입은 것 외엔 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졌다. 이른 저녁을 먹은 프리아가 새 처소의 침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뜨자 한밤중이었다.

벽난로에서 나무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침이 오려면 한참 남았거니, 몸을 뒤척이던 프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벽난로 불빛이 비치는 벽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유디스?”

프리아의 물음에 그림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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