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8)화 (59/237)

“마티아!”

혹시나 방에 유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살펴보기 위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민 프리아의 시선 속으로 환하게 미소 짓는 레온의 얼굴이 들어왔다.

“매일 매일 기다렸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다시 찾아와준다는 천사의 약속을 믿었기에 레온은 매일 밤 유모를 쫓아내고 창문 앞에 서서 마티아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잘 있었어? 신나게 뛰어놀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프리아의 질문에 레온이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응! 아버지가 하라고 하신 거, 나 잘 지켰어!”

“잘했어!”

창틀을 붙잡고 방 안으로 내려온 프리아가 소년의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아이의 몸에서 달콤한 설탕과자 냄새가 풍겨왔다.

“방금 간식을 먹었구나?”

“어떻게 알았지?”

금세 눈이 동그래지는 아이의 천진함이 사랑스럽다.

“내가 뭐하는지 다, 다 알 수 있어?”

“그럼.”

이제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이 흘러나온다. 오웬과 레온, 같은 핏줄이나 성격은 정반대의 두 사람 앞에서 프리아는 다른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레온이 날 생각할 때면 나도 레온을 볼 수 있어.”

“그래서구나! 아까 과자를 먹으면서 마티아가 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같이 먹고 싶었거든.”

“맛있는 과자였어?”

“응! 그런데 미안해. 내가 다 먹어 버렸어.”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레온의 머리를 프리아가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괜찮아. 레온이 많이 먹고 쑥쑥 자라면 돼. 그런데 양치는 했어?”

“…아니.”

“양치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빨 요정이 레온의 앞니를 훔쳐 달아날 거야!”

어린 시절 기르에게 들었던 엄포를 그대로 레온에게 전달하며 프리아가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안 무서운데! 이빨 요정이 오면 내가 다 무찌를 수 있어!”

의기양양한 표정을 한 레온이 턱을 내밀며 양 팔을 접어 옆구리에 갖다 댔다.

“레온은 용감하구나. 나는 어릴 때 이빨 요정이 무서웠는데. 그래서 이를 열심히 닦았지.”

“천사보다 이빨 요정이 힘이 더 세?”

겁이 나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레온이 프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무서워졌어?”

“아니!”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레온은 입을 크게 벌려 앞니가 잘 있는지 손가락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아랫니를 확인하고 윗니를 만지던 레온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큰일 났어! 마티아! 이가 빠지려고 해!”

“이가 흔들거려?”

“흔들거려! 이빨 요정이 화가 났나봐!”

내가 볼게. 잠시만.

몸을 숙인 프리아가 입을 크게 벌린 레온의 앞니를 잡아 흔들리는 정도를 확인했다. 바로 빠지지는 않겠으나 점차 흔들림이 커져 조만간 잇몸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 것이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꼭 유모에게 말해 줘. 유모는 이빨 요정이 화나지 않게 이를 제거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거든.”

“유모가?”

유모에게 말하면 그녀가 태의를 불러올 것이다.

“그리고 빠진 이를 창문 앞에 놓아두면 이빨 요정이 헌 이를 가져가고 대신 선물을 내려줄 거야.”

“선물도 줘? 그런데 이빨 요정이 오면 침대 밑의 괴물이 먹어 버리지 않을까?”

아이다운 상상력을 발휘하며 레온이 물어왔다. 벽에 붙은 레온의 침대로 걸어간 프리아가 고개를 내려 어두운 바닥을 응시했다.

“보여? 거기 있어?”

프리아의 등 뒤로 찰싹 붙은 레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침대 밑, 옷장 안, 내려진 커튼 뒤. 누군가가 있을 것 같아 벌벌 떨고 무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밤이 프리아에게도 있었다.

“오늘 밤부터 나오지 않을 거야. 방금 내가 집으로 보내 버렸거든. 다시 이곳에 찾아오지 않겠대.”

“진짜?”

천사 겸 퇴마사가 된 프리아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밑의 괴물을 퇴치했으니 다음은 옷장에 숨은 요괴를 쫓아낼 차례다. 옷장으로 향하는 프리아의 뒤를 레온이 빠르게 쫓아왔다.

옷장 안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레온의 옷가지가 가지런히 걸려 있을 뿐이다. 과장된 동작으로 옷장 문을 열고 퇴마 의식을 행한 프리아가 레온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무엇도 너를…….”

머릿속으로 떠오른 대사를 따라 레온에게 말하던 프리아가 동작을 멈췄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무엇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거야.’

다정하게 말하던 이 목소리는 누구였을까. 기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르를 만나기도 전, 더 어린 시절 자신을 보살펴 준 누군가가 해 준 말이었다. 그는 옷장에서 걸어나와 괴물을 없애 주고 울고 있는 자신을 달래 주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키가 무척이나 컸고 넓은 가슴을 지니고 있어 그 품에 안기면 편안했다는 것. 어깨 위로 목말을 태워 주면 그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이 아름답고 재미있어 보였다는 것. 그로 인해 높은 곳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그리워 나무를 오르게 되었다. 그는…….

“마티아? 괴물이 도망갔어? 이제 안 온대?”

“어?”

레온의 말에 답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그 모든 기억이 프리아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마티아! 왜 대답을 안 해?”

답답함을 느낀 레온이 쿵하고 한쪽 발을 굴러 불만을 표시했다.

“괴물은… 괴물은……. 여기 있네!”

간지러워! 배와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프리아의 손길에 웃음을 터트리며 레온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일이면 처소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약을 섣불리 할 수 없었다. 프리아는 레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은 일이 바빠져 한동안 올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레온이 나를 기다리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 그 어떤 날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게 언젠데? 나 여섯 살이 되면? 일곱 살이 되면?”

“천사의 시간은 인간과 다르게 흐르거든. 레온이 어른이 된 후에 볼 수도 있어.”

“그렇게 오래 걸려?”

“우린 비밀친구니까 만나도 않아도 서로를 느낄 수 있잖아?”

어떻게 느끼지? 궁리하던 작은 머리가 곧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 내놓았다.

“알았어! 마티아를 열심히 생각할게. 날 지켜봐 줘. 그리고 또 만나.”

어린 아이들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프리아 역시 비밀친구를 만들어내 함께 놀았다며 이야기를 지어내서 유모의 걱정을 사곤 했다고 들었다. 아이의 일상은 매일이 신기하고 놀라운 기쁨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오늘과 다른 내일의 체험 속에서 레온은 비밀친구인 천사 마티아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잊게 될 것이다.

프리아는 다신 보지 못하게 될 아이의 모습을 두 눈으로 담았다. 좋은 기억을 남겨 줘서 고마워.

* * *

“프리아 님!”

본궁 앞에 대기하고 있던 소녀들이 프리아를 향해 달려왔다. 순식간에 프리아를 에워싼 소녀들이 그간 자기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속사포처럼 털어놓았다.

“프리아 님! 폐하께서 갑자기 본가에 가 있으라고 명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저희 셋은 해고당한 줄로만 알았어요! 프리아 님께서 말려주시지도 않은 줄 알고 얼마나 섭섭했다구요!”

“리브론 님이 약혼하신 것 들으셨어요? 어쩜 피앙새가 있으면서도 우릴 감쪽같이 속였는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연정이 더욱 폭발했다나. 급 결혼 발표 소식이 들려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말도 마세요. 그 얘길 전해들은 어머니께서 저를 어찌나 닦달하시던지. 저도 시집이나 가라는 걸 프리아 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단식투쟁까지 벌여서 간신히 돌아온 거라구요. 저 좀 살 빠진 것 같지 않으세요?”

그러고 보니 볼 살이 좀 야위었나? 턱 선이 살아났나? 전혀 모르겠다, 유디스. 아니 더 통통해진 것 같은데? 프리아의 놀림에 유디스가 “똑바로 좀 봐 주세욧!”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렸다. 번갈아 말을 걸어오는 유디스와 이사벨과 달리 조용히 묵례를 보내는 올가를 향해 프리아가 안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 올가?”

“네, 린드가르트 님 처소로 돌아가 있었답니다.”

또, 또 린드가르트. 정말 질린다는 듯 이사벨이 핀잔을 놓았다.

“올가 님은 돌아가실 곳도 없으셨던가요?”

실례되는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가가 차분히 대답했다.

“네, 돌아가 봤자 입 하나가 더 늘 뿐인걸요. 저는 궁에 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합니다.”

올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디스가 프리아에게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프리아 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셨어요? 소문으로는 폐하의 사랑을 듬뿍 받고 계신다고. 아무도 못 보게 꼭꼭 숨겨두고 아끼신다는 말을 들었어요.”

열렬한 기대로 빛나고 있는 유디스의 시선이 프리아는 무엇보다 부담스러웠다. 올 것이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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