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7)화 (58/237)

“그것이…….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지붕에 좀 올라가볼까, 하는 그런 마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은 처음 들어본다. 후궁이 늘어놓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오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곳이 답답하다면 정원에 나가면 될 것을. 지붕에 올라가겠다는 이유가 뭐지?”

“……제가 높은 곳을 좀 좋아해서요. 절대 탈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외줄타기하는 광대도 아니고 높은 곳을 좋아한다니. 떨어지면 심하게 다칠 것이 분명한 높이인데 겨우 그런 이유로 창문에 올라갔다고?

“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움직여.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는 모양이지? 창문으로 나간다 해도 지붕으로 올라갈 방법이 없다. 불가능해.”

목숨은 나도 하나밖에 없다. 자신을 매도하는 오웬의 말에 억울한 감정이 든 프리아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예전에 폐하께서 아프실 때도 창문으로 나가서 약초를 가져왔으니까요.”

훈련받은 자객이나 곡예사도 아니면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프리아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오웬이 냉소 지었다.

“증인도 있어요! 바이런에게 물어보시면 증언해 줄 겁니다. 그날 밤 지붕에서 저를 보았다고요. 마리포사를 뜯다가 자객으로 오인받아서 주치의라고 말했는걸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의심의 눈빛에 프리아가 직접 보여 주겠다는 듯 다시 창문으로 향했다. 창틀을 짚고 올라서려는 프리아의 행동에 놀란 오웬이 성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그 손 떼. 발 내려놔. 다시 창문에 올라갔다가는 다신 바깥바람을 쐬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오웬의 협박을 들은 프리아가 슬며시 들었던 발을 다시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프리아의 몸이 창문에서 완전히 떨어진 것을 확인한 오웬이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믿어 보도록 하지. 정말 지붕에 올라가고 싶은 거라면 제대로 된 통로를 쓰도록 해.”

따라와. 그렇게 말한 오웬이 등을 돌려 내실로 향했다. 멍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던 프리아가 그 의미를 깨닫고 곧 뒤를 따라갔다. 복도 끝에 멈춰선 오웬이 가장 가까이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방에 있는 수납장의 가장 아래 칸을 열더니 서랍 뒤쪽을 더듬어 열쇠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꺼낸 열쇠를 벽에 있는 옷장의 구멍에 맞췄다.

열쇠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열린 옷장에는 옷 대신 외부로 통하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오웬이 다시 열쇠를 이용해 쇠로 된 철판의 자물쇠를 풀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철판이 열리고 바깥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

철판 너머로 사라졌던 오웬이 얼굴을 내밀었다. 멍하니 서 있던 프리아가 그 말을 듣고서야 허둥대며 사다리를 올랐다. 먼저 지붕으로 올라간 오웬이 한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지붕으로 고개를 내민 프리아가 바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지붕 위다. 몸을 반쯤 내민 프리아를 오웬이 끌어올렸다. 달이 자취를 감춘 밤하늘에는 별들만이 빛나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고개를 들자 저 먼 밤하늘에서 꼬리를 끌며 떨어가는 별똥별 하나가 보였다.

“통로가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있다고는 해도 이용할 일이 없었으니까.”

참 이상한 후궁 하나 때문에 별짓을 다 해 본다. 유사시의 대피로 중 하나였기에 그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이용해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진작 알았다면 힘들게 창문으로 올라오지 않았을 텐데요.”

기쁜 눈빛으로 프리아가 오웬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다. 정말 창문으로 여길 올라왔던 건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어릴 때 곡예라도 배웠나? 벽을 타는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군.”

“벽에 구조물이 있으니 잘 잡고 올라가면 됩니다. 아래를 보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면서 어디서 그런 걸 익혔지?”

“어렸을 때부터 나무에 오르는 걸 좋아했거든요. 저 정도 높이는 이미 아홉 살 때 오르고도 남았죠.”

멀리 보이는 키 큰 나무 한그루를 가리키며 프리아가 말했다.

“그래서 그때 나무에 올라갔던 건가?”

행궁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오웬이 물었다. 프리아 역시 행궁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샐쭉한 얼굴로 오웬을 곁눈질했다. 나무에 올라갔다가 뺨을 맞았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아기 새가 떨어져 있어서 둥지에 돌려주기 위해 올라간 겁니다.”

억울했던 그날의 진상을 밝히며 프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지금도 자신이 왜 맞았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사람이 죽는 게 싫어. 내가 죽이는 것도 싫지만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도, 죽은 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싫다. 그러니 내 앞에서 오해할 짓을 하지 마.”

직접적인 사과는 아니었지만 오웬 나름대로 후궁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다. 그런 오웬의 말을 들은 후궁은 그저 밤하늘만을 올려다본 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지붕을 수리할 일이 생기면 사람들도 아까 그곳으로 올라오나요?”

침묵이 흐른 뒤 후궁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영 생뚱맞은 것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기 싫다는 건가. 역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오웬이 대답했다.

“황제의 내실을 아무나 드나들게 할 수는 없지. 다른 출입구가 있지만 보통은 잠겨 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지만 지붕을 수리할 일이 생긴다면 시종장이 열어 주겠지. 또 경비병이 드나드는 출입구가 따로 있어.”

이제 보니 입구가 여러 개인 지붕이었다. 자신만의 공간이 침범당한 느낌에 섭섭한 마음마저 들었다. 황제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각지대라 여겼는데 손바닥 안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 프리아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황제가 협박인지 농담인지 모를 소리를 늘어놓았다.

“성이 공격당한다면 네가 유출한 것으로 알겠다. 넌 반역자를 좋아하니까.”

기사 막심의 일로 아직까지 꽁해 있는 건가.

황당한 표정을 한 프리아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오웬이 등을 뒤로 뉘였다. 별 하나가 또 밤하늘 위로 궤적을 그리며 순식간에 떨어져 내렸다. 프리아도 등을 대고 누워 형형하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달이 사라진 밤, 어둠은 더욱 깊고 작은 빛들은 선명하게 반짝였다.

“하루만 더 참아. 모레 내보내 줄 테니까.”

듣던 중 반가운 말이 오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느새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던가. 장서관에서 이곳으로 끌려온 날이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다가도 그간의 일들을 생각하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정말이십니까?”

“네 시녀들도 이미 돌아와 있다. 이곳을 떠나면 지금처럼 자주 보기 어려울 테니 그림 몇 점을 가져가도 좋아.”

“예?”

자신의 시녀들이 돌아왔다는 말에 반색하던 프리아가 초상을 가져가란 소리에 떫은 표정을 지었다. 선심 쓰듯 말하는 저 당당한 표정이 제일 문제다.

“외부 유출이 안 된다고 들었는데요…….”

“대형 기록화 외에는 가져가도 괜찮아. 큰 걸 원해?”

무슨 큰일 날 소리를. 프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작은 걸로, 꼭 작은 걸로 가져갈게요.”

가져가 응접실에 걸어두고 하루 세 번 노려보면 좀 억울한 마음이 풀릴 것도 같다.

보름 사이에 계절이 바뀌었다. 초가을인지라 아직 한낮은 무덥지만 밤의 공기는 쌀쌀했다. 찬바람에 팔을 쓸어내리는 프리아를 보며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내려가지. 바람은 충분히 쏘인 것 같군.”

천천히 일어나는 프리아보다 앞서 걸어가던 오웬이 발걸음을 멈췄다.

“약초를 찾으러 올라왔다고 했지?”

“예? ……예. 마리포사요.”

“어떤 효능이 있지?”

“해열 작용을 합니다. 알훼니아에선 흔히 쓰이는 약이에요.”

바로 눈앞에서 하늘거리고 있는 작은 꽃들을 가리키며 프리아가 대답했다.

“가져와.”

“마리포사를요?”

반문하는 프리아에게 오웬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의에게 넘겨 검증을 하려는 걸까. 혹시나 자기에게 위험한 약초를 썼을까 봐 조사하려는 거겠지. 하여간 의심도 많다. 툴툴거리며 마리포사를 따온 프리아가 황제에게 내밀었다.

“왜 나를 주지?”

잔 꽃송이를 바라보며 오웬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태의에게 주시려는 게 아닙니까?”

“그걸 왜? 필요한 사람은 너일 텐데.”

그 짧은 기간에 두 번이나 앓아누운 후궁을 바라보며 오웬이 말했다. 태의의 약도 쓸 만하겠지만 익숙한 약을 쓰는 편이 빠른 효과를 불러올 것 같았다.

“저요?”

진저리가 날 정도로 쓴 맛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인상을 썼다. 익히 아는 맛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먹기 싫었다.

“그걸 따오기 위해 창문까지 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몸도 좋지 않았으니 먹어두는 게 좋을 텐데.”

그러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황제가 선심 쓰듯 권했다. 망설이는 프리아를 향해 오웬이 쐐기를 박았다.

“의식 없는 사람에게 몰래 먹일 정도로 그만큼 효과 좋은 약이겠지?”

“……그렇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프리아가 내키지 않은 손길로 마리포사를 한줄기 집어올렸다. 그렇게 효과 좋은 약이라면서 표정은 마치 독초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입술 앞까지 가져오고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프리아를 보며 오웬이 손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황제의 입 안으로 사라진 마리포사를 보며 프리아가 놀라 입을 벌렸다. 미간을 찌푸린 오웬이 빠르게 다가와 프리아의 입술을 자신의 것으로 덮었다. 입술을 타고 넘어온 쓴맛이 프리아의 혀를 지나 목구멍 안으로 사라진다.

“이래서였군.”

써서 먹기 싫은 거였어.

한참 뒤에야 입술을 떼어낸 오웬이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쩐지 즐거운 듯한 그 표정을 보며 프리아는 처소로 돌아가면 하루 여섯 번 노려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