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6)화 (57/237)

“레이디들께서 그렇게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오신답니다. 폐하의 정부라도 되고 싶다며 이 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면 연못으로 몸을 던지겠다, 창밖으로 뛰어내려 다음 생을 기약하겠다, 격한 연심을 토해 내는 분도 계신데 아직까지는 다 멀쩡히 살아 계시더라구요. 아이고, 제가 또 입방정을 떨었네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프리아 님. 폐하께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는 걸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폐하께서 지금까지 프리아 님만큼 살뜰하게 신경 써 주신 분이 없답니다. 곧 그 마음도 알아주실 겁니다.”

괜한 말을 꺼내 신경 쓰게 한 것 같아 시종장의 마음에 후회가 서렸다. 지금도 연적이 여덟이나 되는데 궁 밖에 수십 명이 더 있다는 걸 알면 쓰러지실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시종장님, 제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제 마음을 폐하께서 어떻게 알아주신다는 거죠? 또 그게 제 병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딱한 표정으로 프리아를 바라보며 시종장이 답했다.

“폐하를 사모하시다 못해 이리 병이 드셨으니. 폐하는 제 자식 같은 분입니다. 제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힘닿는 데까지 프리아 님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황제를 사모해서 병이 들어? 천지간에 무슨 그런 병이 있단 말인가. 마치 상사병 같은…….

“저기, 잠깐. 폐하를 사모해서 병이 든 사람이?”

“프리아 님, 많이 힘드시죠? 마음의 병에는 약도 없다고 하는데 지켜보는 제 마음도 어찌나 아픈지.”

세상에서 가장 딱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시종장이 프리아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저예요? 제가 지금 상사병에 걸린 거예요?”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마음앓이가 지나치면 그것이 그대로 몸의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너무나 기가 막힌 시종장의 대답에 프리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한 번 본 것만으로 자신의 병을 알아낸 태의의 실력에 감탄했더니 이런 오진을 내리다니. 역시 자신의 병은 그렇게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르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

“태의가 알아냈다고 하는 병이 이거였어요? 상사병? 그럼, 폐하께서도?”

“함께 들으셨지요. 그래서 더 마음 써 주고 계십니다.”

어쩐지 대화가 계속 어긋난다고 생각했는데 이거였다. 이게 원인이었어. 지금까지 황제는 내가 자신을 사모하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대화한 거였어.

‘솔직히 네가 그런 병을 앓고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워.’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지?’

‘버릇이 될 정도로 그렇게 오래 전부터? 최근에 시작 된 게 아닌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날 알았다는 건가? 내 모습을 본 적도 없으면서?’

그 질문에 난 뭐라고 대답했던가.

‘꽤 오래전부터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저는 버릇이 되어서 괜찮아요.’

‘제국에 오기 전에, 오래 전에 발병했어요.’

자신이 한 대답들을 떠올리자 프리아는 그만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최근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제국에 오기 전부터 초상화 달랑 한 점 보고 반해서 후궁이 되기를 자처했다고? 자신이 자다가도 일어나 황제의 그림을 바라볼 정도로 푹 빠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시종장은 황제의 초상을 모아와 그렇게 공들여 설명을 해 준 것이었다. 과해도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친절할 따름이었다니.

‘아서의 후궁이 되지 않는 대신 황족의 남첩이 되겠다는 건가?’

어제는 이해되지 않았던 황제의 말도 이제야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황족이 황제 본인을 말하는 것일 줄이야. 황제가 아니면 후궁을 둘 수 없으니 ‘남첩’으로나마 받아들여 준다는 것이었다.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 사태를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프리아를 보고 놀란 시종장이 애타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프리아 님!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꺼냈지요. 앞으로도 아가씨들의 편지는 단 한 통도 폐하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이없게도 또 열이 났다.

이번엔 정말 열이 받아서 체온이 오른 것이다. 침대에 누운 프리아의 귓가에 소리 낮춰 말하는 시종장과 황제의 대화가 들려왔다.

“제 잘못입니다. 폐하를 연모하는 레이디들의 편지가 쇄도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쓰러지셨어요.”

“겨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쓰러졌다고?”

“겨우 그런 이야기라니요, 폐하. 프리아 님께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셨을 겁니다.”

충격받은 것은 맞지만 그 원인이 틀렸어요.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 행동의 어딜 보고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가 있지?

“폐하께서는 누군가를 그렇게 절절히 좋아해 보신 적이 없으니 이해하지 못하실 테지요.”

“시종장도 없잖아.”

“아닙니다! 저도 있었습니다! 저도 소싯적에는 바이런 도련님 못지않은 난봉꾼이었다구요.”

바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연중 절반은 앓고 있다는 병이 바로 상사병이었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한때나마 동질감을 가졌으니. 상사병, 바이런에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지병도 없을 것이다.

“그래, 난봉꾼.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지?”

“프리아 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건 오직 폐하 한 분이십니다. 아무리 명의라 해도 이런 병엔 약도 없지요. 잘해 주셔야 합니다.”

“귀찮아.”

태의 가만 안 둬.

프리아는 분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황제 대신 그의 초상이 담긴 로켓만을 움켜쥐었다. 그냥 꽉 쥐어 으스러트려 버리고만 싶다.

황제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이 오해였으며 황제를 절대 사모하고 있지 않다는 말을, 감히 후궁의 신분으로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 프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황제가 어서 방을 나가 사라지기만을 빌었다.

이야기책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반역자가 나타나 쉴 틈 없이 사건, 사고가 벌어지던데 제국은 왜 오늘도 이토록 평화롭단 말인가. 권력에 도전하는 이 하나 없다니. 불순한 종자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 빼고 모두가 평화로운 일상에 프리아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후궁이 쓰러졌다는 시종관의 전언에 오웬은 정무를 잠시 멈추고 달려왔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린 오웬에게 태의는 후궁이 큰 충격을 받아 열이 오른 것이라며 마음의 안정과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또 늘어놓았다.

무슨 사내가 이리 유리병처럼 깨질 듯 심성이 약한 것인지.

울다 잠이 들었는지 눈가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보인다. 자신의 초상이 담긴 로켓을 소중하게 쥐고 잠이 든 후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오웬이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정말 귀찮아.”

위로받고 싶다. 수다쟁이 유디스가 이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유디스가 있었다면 시종장에게 합류해 더한 법석을 피웠을 것이나 프리아는 그런 미래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온전히 자신의 편이기만 했던 수석시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꼭 만나러 와야 해. 알았지?’

만나러 갈 수 없는 유디스 대신 레온의 음성이 퍼뜩, 떠올라 프리아의 귀에 메아리쳤다. 그래, 레온이 있었다. 황제와 꼭 닮았지만 황제와는 다르게 착하고 순수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레온. 레온을 만나 끌어안고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이 답답한 마음도 조금은 풀릴지도 모른다. 참새처럼 떠드는 귀여운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황제는 한참 전부터 자리를 비운 채 돌아오지 않았다. 정무가 끝난 밤에도 가끔 급한 일로 시종장이 찾아올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인가 보다. 그럴 때면 황제는 몇 시간이고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프리아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금방 다시 오겠다 약속해 놓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겨우 레온을 만나러 갈 기회가 온 것이다. 빈손으로 가기 아쉬워 유디스가 보냈던 과자 꾸러미도 챙겨들었다. 황궁의 조리사가 만든 과자는 레온이 한눈에 알아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열린 창문 밖으로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 있었다. 프리아는 창문을 활짝 열어 자신이 드나들 공간을 확보했다. 조심스럽게 발 한쪽을 먼저 내민 후,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음 발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와장창 하고 시끄럽게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본 프리아의 눈으로 황급히 달려오는 오웬의 모습이 보였다. 순식간에 창가에 도달한 오웬이 프리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뒤에서 안긴 자세 그대로 바닥으로 끌려 내려왔다. 갑작스러운 오웬의 등장에 당황한 프리아의 어깨를 오웬이 강한 힘으로 잡고 흔들었다.

“무슨 짓이야? 미쳤어?”

“…….”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가? 그깟 여인들이 무슨 상관이라고!”

“……네?”

무슨 여인들?

영문 몰라하는 프리아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오웬이 얼굴을 찌푸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목숨을 그렇게 쉽게 버리려하다니.”

“……예?”

남은 날도 아까운데 내가 왜 목숨을 버려?

설마……. 내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왜? 그럴 이유가 전혀 없…….

‘이 생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면 연못으로 몸을 던지겠다, 창밖으로 뛰어내려 다음 생을 기약하겠다.’

시종장이 말한 그 여인들. 그 여인들처럼 말인가?

“혼자 정리하겠다더니 이런 일을 벌여? 나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더니 이런 방식으로 말인가?”

아니야, 그거 아니야.

더욱 깊어가는 황제의 오해를 멈추게 할 방법을 몰라 프리아는 그저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만 세게 흔들었다.

“그 표정은 뭐지? 죽을 생각까지는 없었단 건가? 나에게 보여 주려고 한 연극이었어?”

싸늘한 표정으로 오웬이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나는 너처럼 목숨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사람을 가장 경멸한다. 지금 당장 네가 이 자리에서 죽어도 내 마음 바뀔 일은 없으니 그런 줄 알아.”

거칠게 프리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오웬이 손을 놓았다. 냉정한 얼굴로 일어서는 오웬을 바라보고 있던 프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는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차갑게 프리아를 뿌리치는 오웬의 귓가로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오웬의 시선 속으로 종이로 싼 꾸러미 하나가 들어왔다. 당황한 프리아가 움직이는 것보다 오웬의 손이 더 빨랐다. 펼쳐든 종이 위로 설탕과자가 한 움큼, 색색가지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지?”

“…….”

너는 왜 하필 지금 굴러 나오니.

“죽고자 한 사람이 간식을 챙긴다니.”

“그게 아닙니다! 죽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프리아의 변명을 오웬이 잘라 냈다.

“그래. 네 말대로 투신도 연극도 아니라면…….”

빤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는 눈동자를 굴리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빠져나가려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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