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5)화 (56/237)

계단을 내려갈 때는 그저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기만을 바랐다. 층계참을 그대로 지나쳐 침실로 향하는 문 앞에 선 오웬이 프리아의 허벅지를 받쳤던 손을 들어 문을 열었다. 초상화가 치워진 방 안에는 시종장이 홀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폐하, 내려주세요. ……폐하?”

목적지가 이곳이었던가. 익숙한 풍경에 마음이 놓였던 프리아가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오웬에게 의문을 표했다.

“깨우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

황제에게 업힌 모습을 시종장에게 보이기는 싫었다. 오웬의 말에 프리아가 입을 다물었으나 의구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밖으로 나가려는 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업고 계신 분은……?”

침실 밖을 지키던 시종이 늦은 밤, 황제의 등장에 놀라 달려나왔다. 누군가를 업고 있는 황제의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라 질문만 되풀이한다.

“내 후궁이니 놀랄 것 없다. 문이나 열어.”

“예?”

후궁이라 하심은, 일주일 전에 침실로 끌고 가셨던 그 후궁……. 그 이후 나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설마 일주일 내내? 걷지 못할 정도로?

“문 열어.”

무슨 상상을 하는지 얼굴을 붉힌 채 멍하니 서 있는 시종에게 오웬이 재차 지시를 내렸다.

“예? 예!”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종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탈진한 것인지 업힌 등에서 고개를 세우지 못하고 있는 후궁을 곁눈질하며 시종이 오웬에게 물었다.

“폐하, 태의를 불러올까요?”

“낮에 이미 다녀갔다. 소란 피우지 말도록.”

“예, 폐하.”

이미 다녀갔다니. 대체 얼마나 해 대셨기에 사람이 저렇게 초주검이 되도록. 경악에 찬 시종의 눈이 멀어져가는 황제와 그 등에 업힌 후궁을 따라갔다. 복도와 층계마다 보초를 선 시종들 역시 그 모습을 보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날 이후, 침실로 끌려갔던 사내 후궁이 실신 상태로 업혀 나왔다는 소문이 온 궁 안에 퍼졌다. 후궁이 기력을 잃자 태의까지 동원시켰다고 하는 황제의 대단한 정력에 궁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감탄을 연발했다. 뒤늦게 소문을 접한 바이런이 자택을 방문한 레이디의 면전에 찻물을 뿜어냈다는 불명예스런 후문 또한 뒤따랐다.

멀쩡한 사내의 몸으로 남의 등에 업히고 또 그 모습을 온갖 사람들에게 내보이다니.

프리아는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황제의 등에 고개를 파묻은 후궁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마주친 궁인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업힌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프리아 역시 놀랐을 것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간다. 자신은 그저 막무가내인 황제에게 끌려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세간은 요부에게 홀린 황제가 어화둥둥 업고 다닐 정도로 사내후궁을 아낀다 떠들어 댈 것이다.

오웬의 넓은 등 위에서 흔들리며 프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딜 가는 것이냐, 물어 봤자 대답도 해 주지 않을 테지. 이렇게 넓은 온 궁 안이 제집인 황제와는 다르게 프리아는 어디를 가든 낯선 곳이라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 황제의 등에 더욱 고개를 묻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밀착된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지기까지 해 더욱 열이 받았다. 황제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폐하!”

주방 입구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사내가 일어났다. 당황해하는 사내에게 턱짓으로 자리를 비킬 것을 명한 오웬이 어두운 주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리를 위해 놓인 긴 테이블 앞으로 걸어 들어간 오웬이 업고 있던 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느낌에 눈을 뜬 프리아가 고개를 들어 낯선 주변을 바라보았다. 마치 동굴처럼 천장이 높고 사방이 뚫려 있다. 어두운 탓에 아치형으로 뚫린 벽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이 꺼진 촛대를 찾아낸 오웬이 타오르고 있는 화덕의 불을 빌렸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화덕 위에 놓인 커다란 솥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촛불이 몇 개 더 켜지자 선반에 걸린 냄비와 팬, 국자와 같은 엄청난 양의 조리도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긴…….”

“주방이다.”

오목한 사발을 찾아낸 오웬이 국자를 들어 끓고 있는 스튜를 그 위로 부었다. 하루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 대형 화덕에는 내일 아침식사를 위한 스튜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오웬이 내민 스튜 그릇을 프리아가 받아들었다. 오랜 시간 뼈와 고기를 고아내 짙은 풍미가 우러나온다. 한 모금 삼킨 후에 연달아 삼켜 대는 프리아를 본 오웬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자신 몫의 스튜를 담았다.

잠시 후, 주방과 연결된 식품 저장고로 사라졌던 오웬이 치즈 두 덩이와 소시지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찬장에서 나온 천 덮인 바구니에는 흰 빵과 호밀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십니까?”

막힘없이 음식을 꺼내오는 걸 보니 한두 번 들어와 본 것이 아닌 듯싶다.

“아서가 살아 있을 때 자주 왔었어.”

한참 자라나던 소년들이라 먹고 돌아서면 다시 배가 고팠다. 지시만 내리면 아랫것들이 가져다주었을 것이나 아서는 늘 한밤중에 오웬을 꼬드겨 주방에 침입하곤 했다. 용케 들키지 않는 자신들을 대단하게 생각한 적도 있으나 이제는 뒤에서 시종장이 몰래 지시를 내려 주방을 비우게 한 것을 알고 있다.

“폐하의 형님 되시는 분 말씀이십니까?”

“아서가 죽지 않았다면 네가 아서의 후궁이 되었겠지. 아서는 린드가르트밖에 몰랐으니까 너는 제비궁 밖을 나올 수 없었을 거야.”

황제가 다른 이가 되어도 자신에게는 후궁이 되는 결론밖에 없다는 말인가. 기분이 상한 프리아가 빵조각을 거칠게 뜯어내며 반론했다.

“제가 후궁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황후가 되겠다는 소리는 아닐 거고, 아서의 후궁이 되지 않는 대신 황족의 남첩이 되겠다는 건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오웬의 말에 놀란 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왜 남첩이 돼야 하는 건데요?”

정부인이 되겠다고? 꿈이 크군.

가끔 아서가 살아 있는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 젊고 아름다운 황제 부부 옆에서 아낌없이 그들을 지지하는 황족으로 남아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제국에 대한 책임감과 중압감에 눌리지 않는 삶. 그 상상 속에서 자신이 꾸리게 될 가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저는 사내 좋아하지 않는데요, 발끈해 그렇게 말하려던 프리아가 일전 비슷한 대화를 황제와 나누었던 것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주방의 화덕은 다락방의 벽난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한 개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방의 벽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또 옷을 벗겨 태우지는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프리아는 화력 좋은 화덕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배를 채우고 나니 다리에도 힘이 붙어 돌아오는 길은 황제에게 업히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지 다락방에 돌아오자 외려 바깥에 있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기까지 했다. 침대에 누운 프리아가 평소처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움직이자 오웬이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폐하! 오늘 밤은 더는 무리…….”

설마 또 하려는 건가 싶어 프리아가 지레 겁을 집어먹자 오웬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태의의 지시다.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하더군.”

프리아를 품에 안은 오웬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폐하, 이러지 않으셔도…….”

덥다구요.

프리아는 자꾸만 달아오르는 뺨에 부채질하며 잠이 든 오웬의 얼굴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오후부터 잠이 들었던 터라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허공에 흩어지는 프리아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오웬은 꿈결 속에서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요즈음 황제의 태도도 이상하고, 자신을 곁눈질하며 콧노래를 불러대는 시종장의 흐뭇한 표정도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티타임이 끝난 후, 찻잔을 정리하는 시종장을 향해 프리아가 말을 걸었다.

“시종장님.”

“예, 프리아 님.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소인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여기에서 잠들었을 때 말이에요. 폐하의 초상을 보고 난 후에.”

“예, 그때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폐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지요. 다시 기운을 차리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 태의가 다녀갔다고 했잖아요?”

“예. 다녀갔지요. 다시 불러올까요?”

태의를 부르기 전에 시종장에게 먼저 확인을 해야 했다.

“제 병에 대해 말씀 나누셨다고 들었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프리아 님. 폐하께서도 프리아 님의 마음을 곧 알아주실 겁니다. 그동안 마음고생 심하셨지요?”

왜 나를 그렇게 짠한 눈으로 바라보는 건데?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가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인걸요. 폐하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어쩜 이리 마음 착하신지. 폐하의 심성과 똑 닮으셨습니다. 그러니 연분인 게지요.”

또 황제, 그놈의 황제. 모든 화제가 황제에게로 돌아가는 시종장의 맹목적인 충성에 프리아가 한숨지었다.

“아이고, 프리아 님. 또 한숨을 지으시다니요. 조급하게 생각하시면 아니됩니다. 제가 볼 때 이미 반쯤은 넘어온 거나 다름없어요.”

“……뭐가 넘어왔다는 거죠?”

이번이야말로 어긋나는 화제에 종지부를 찍겠다 마음먹은 프리아가 시종장에게 반문했다.

“밤에 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에 잠기며, 입맛까지 떨어지셨지 않으셨습니까. 폐하를 뵈면 늘 가슴이 답답하시죠?”

뭔 말을 해도 통하지 않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네.”

“가끔은 심장도 아프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황제와는 상관이 없지만 아프긴 하다.

“이유 없이 서글프고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으시고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심리 상태란 게 그렇다. 어쩔 수 없지만.

“프리아 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폐하에게 오는 편지를 받아 가장 먼저 걸러내는 사람이 바로 저인 걸요. 폐하를 연모하는 아가씨들의 편지가 오늘도 도착했답니다. 그 중 한분은 바로 다음 달 결혼을 앞두고 계시기까지 한 걸요. 정말 큰일입니다.”

“예?”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백번 이해하지요. 반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렇게 잘나셨는데.”

“누가 누구한테 반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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