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3)화 (54/237)

‘폐하의 그림이 갖고 싶어서요!’

바로 전날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탄식했다. 대형 초상화를 마련해 주겠다는 시종장에게는 둘러댈 말이 있었으나 지금의 상황은 도통 빠져나갈 길이 없다. 설마 로켓을 준비했을 줄이야.

“……필요, 필요합니다. 필요해요! 절실히 원합니다!”

앓던 사람 같지 않게 씩씩하게 소리친 프리아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폐하께서 주신 물건이니 소중하게,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당장 제 소지품 상자에 넣고 오겠…….”

로켓 줄을 쥐고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구는 프리아를 오웬이 돌려세웠다. 흔들리는 프리아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오웬이 입술을 움직인다.

“설마 사용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혹시 알훼니아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던가?”

“예?”

로켓 없는 나라가 있을 리가. 어느 나라에서나 흔하디흔한 물건이며 연인 사이의 증표로, 또는 멀리 떨어지게 된 가족을 떠올리기 위해 나누어 가지고 연신 들여다보며 서로를 그리워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신구가 아니던가.

프리아의 손에서 로켓을 빼앗아 든 오웬이 줄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와 프리아의 머리를 통과한 금줄이 흰 목에 걸린다.

“상자에 넣어 두라고 가져온 게 아니야.”

양 쇄골 사이로 자리 잡게 된 로켓을 바라보며 오웬이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부드러운 작은 입술로 사모를 가장한들 소용없다. 늘 표정을 숨기지 못해 속까지 들여다보이고 있으니. 시종장은 이런 녀석의 어딜 보고 상사병 운운해대는 걸까. 오웬은 속아 넘어가는 척 얄미운 후궁을 골리기로 했다.

“아……. 저는 너무 소중해서, 자칫 잃어버릴까 싶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입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아끼느라 쓸 수 없다며 상자에 처박아 두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황제의 성의일지 괴롭힘일지는 알 수 없지만 며칠 정도는 걸고 있다가 치워야 할 것 같다.

“할아버지께서 아끼는 후궁들에게 내려주신다며 케이스 제작을 의뢰해 두셨더군. 대금을 지불할 사람이 없어져서 곤란하게 되었다기에 값을 치러 주었지. 그중에서도 가장 값이 나가는 것으로 가져왔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선황은 여러 후궁과 정부에게 나눠주기 위해 해마다 공방에 다양한 종류의 사치품을 주문해 왔다. 물건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쓰러져 대금조차 치르지 못한 것을 즉위 후, 오웬이 떠맡았다.

오웬의 초상이 들어간 로켓은 몇 달 전 이미 완성되었으나 받을 이가 없는 까닭에 그동안 수장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오웬은 프리아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을 골라 방으로 가져왔다. 선황이 주문했던 물건 중에는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초호화 목걸이도 있었으나 매일 침의 상태인 후궁의 목에 걸리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에 비해 로켓은 복식의 구애를 받지 않았으며 남녀 모두 손쉽게 착용이 가능했다. 황가의 로켓은 그 자체로 예술품이었으나 다른 보석 장신구와 비교하면 소박하다고 할 수 있어 매일 착용하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와, 정말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폐하.”

아이고 영광입니다.

케이스 표면에 황가의 문양이 크게 박혀 있어 누가 보아도 황제의 하사품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의 예술혼이 아낌없이 발휘된 로켓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프리아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게 끝인가? 할아버님의 후궁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던데.”

“그 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황제가 내린 로켓을 받으면 취해야 하는 필수 동작이나 대사라도 있는 것일까. 불안한 표정으로 프리아가 물었다.

“우선 눈물을 보이고.”

눈물이요? ……왜죠.

“감격하며 로켓을 열고 나타난 초상에 입을 맞추었지.”

오웬의 말을 따라 로켓을 열던 프리아가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입을 맞췄다고? 그런 작위적인 행동까지 했어야 했다니 후궁 노릇은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후궁을 향해 오웬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요하던 프리아의 눈동자가 이윽고 오웬의 초상으로 향한다.

“울지는 않아도 돼.”

정말 해야 해? 그렇게 묻는 것처럼 망설이던 후궁의 입술이 천천히 오웬의 초상에 닿았다. 선황의 후궁들은 거짓눈물을 자아내며 호들갑스럽게 초상에 연거푸 입을 맞춰 보였으나 그것까지는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한시도 몸에서 떼놓지 않겠습니다. 죽을 때도 무덤에 넣어 가지고 가겠어요.’ 잘 때는 떼어 놓아도 좋아. 불편할 테니.”

자애로운 군주처럼 말하는 오웬의 뻔뻔함에 기가 찬 프리아가 입술로 초상을 눌러 버릴 듯이 덮었다.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깨물어 버릴 수가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목욕할 때도 떼어 놓아야겠지? 혹여 잃어버리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분이 있으니까.”

잃어버린 척 버려도 다시 갖다줄 테니 소용없을 거란 말이었다. 그나마 대형 초상이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할까. 프리아는 가마에서 몇 번이고 구워내 흠집 하나 낼 수 없이 단단해진 에나멜화의 표면을 손톱을 세워 몇 번이고 문질렀다. 프리아가 받은 것은 로켓이었지만 어쩐지 전용 목걸이를 선사받은 개가 된 기분이었다.

뚱한 표정으로 로켓을 만지작거리는 프리아의 이마로 갑자기 오웬의 손이 다가왔다. 움찔하며 동작을 멈춘 프리아의 이마를 오웬의 손바닥이 덮었다. 남은 손은 자신의 이마에 가져가 체온을 비교한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왜 얼굴이 빨갛지?”

그걸 몰라서 묻는가.

“더워서요. 왜 이토록 불을 피워놓으신 겁니까?”

신종 괴롭힘인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의 불빛을 노려보며 프리아가 오웬에게 물었다.

“태의 말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해서.”

“어디 아프십니까?”

아픈 사람 같지는 않은데. 땀 흘리는 자신과는 다르게 말끔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오웬을 향해 프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제국인들은 추위뿐만 아니라 더위에도 강한 걸까.

“나 말고 너 말이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던데 정말인가?”

“어릴 때 잔병치레를 하긴 했습니다. 태의께서 다녀가셨습니까?”

자신의 병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진찰해도 보통 의원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기르가 말한 적이 있다. 독성이 강한 약을 먹은 직후였기에 체온도 급격히 내려갔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 상태를 지켜봐 온 기르가 아니고서는 어떤 이상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믿으면서도 프리아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하더군.”

“이상한 병이요?”

의술이 뛰어난 제국의 태의라 무언가 알아차린 것인가. 프리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이런이 연중 절반은 앓고 있는 병이지.”

“바이런이요?”

“늘 집무실로 쳐들어와 죽을 것 같다고 소란을 피우거든. 최근까지도 앓고 있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 건강해 보였는데 지병을 앓고 있었던 건가. 걱정스러워진 프리아의 얼굴을 보며 오웬이 냉정하게 말했다.

“혼자서 매듭짓는 것이 좋아. 정말 그 병이 맞다면 말이지.”

당연히 홀로 매듭지을 생각이다. 바이런도 몸이 안 좋았구나. 프리아의 약을 나눠 준다 해도 바이런에게까지 통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급성중독으로 악화될 확률이 높았다. 기르가 오면 바이런도 한번 봐 달라고 해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은 프리아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납득하지? 예상과 다른 프리아의 반응에 기분이 이상해진 오웬이 입을 다문 후궁의 표정을 살폈다.

“물론 혼자 정리할 생각입니다. 폐하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해결될 겁니다.”

잠시 후, 입을 연 프리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정리하겠다고?”

무슨 상사병이냐며 길길이 날뛸 것을 기대했는데 이건 무슨 반응일까.

“진찰 한 번으로 알아차리시다니 태의께선 명의시군요.”

수준 높은 제국의 의술에 프리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생각해보면 기르 외에 다른 의원을 만난 적이 없었다. 기르 또한 의학적 지식이 해박했을 뿐 정식 의술을 배운 적은 없다고 했다.

바이런도 연중 반을 앓고 있었다니 제국에는 같은 증상을 가진 이가 더 존재하는 걸까. 연중 반을 앓는다는 건 어떤 걸까? 1년의 반은 발병하고 나머지는 잠잠해진다는 건가. 바이런이 의학 서적에 관심이 많았던 건 그 이유에서일까. 환자 앞에서 주치의라는 장난을 치고 말았으니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심각한 척하는 저 표정은 연극의 일환인 걸까. 진심으로 좋아하는 척 열연을 펼친 적도 없으면서 포기하는 연기 하나는 수준급이다. 오웬은 묘한 충동에 휩싸여 고개를 숙인 프리아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살짝 힘을 주자 의문이 담긴 눈빛이 바로 오웬을 따라왔다.

“폐하?”

“그 병이 진짜라면.”

이게 해답이 될 수도 있겠지.

오웬의 입술이 프리아의 숨결을 남김없이 덮었다. 난로의 열을 받아 달아오른 입 안은 평소보다 뜨거웠다. 유순하게 입술을 내어주는 후궁의 입 안을 헤집으며 오웬은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밀려오는 감각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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