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시종장이 의복 수발을 들고 있던 중 황제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히 입을 열었다.
‘내 초상이 보고 싶다고 하니 몇 장 가져다 보여 줘.’
‘프리아 님께서 말씀이십니까?’
‘어렸을 적 그림을 보고 싶다더군.’
초상을 갖고 싶다 청하는 귀족들의 요청을 심심치 않게 받아 온 오웬이었던지라 후궁의 부탁 역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종장의 반응은 달랐다.
‘폐하의 어리실 적 그림을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내 그림을 보고 있더군.’
‘곁에서 주무시다가 갑자기요?’
지척에 바로 황제가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초상을 보고 싶다니. 그야말로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절절한 연심의 고백이 아닌가. 더구나 어릴 적 초상까지 보길 원한다는 건 보통 관심이 아니다.
‘자다가 시선이 느껴져 깰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한숨을 쉬더군. 암살할 배짱까지는 없는 것 같아서 놔두었다.’
그 몸으로 기습을 해 온다 해도 바로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암, 암살이라니요, 폐하. 프리아 님이 그리하신 건 그런 의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저주라도 내리는 건가.’
피식 웃는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종장은 검은 빵을 물 없이 집어삼키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 이 애타는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런 뜻이 아니올런지요? 그러니 한밤중에 일어나시어 넋 놓고 초상을 바라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넋을 놓지는 않았는데.’
유령이라도 본 표정이기는 했다.
‘프리아 님께서 다른 말씀은 아니하셨습니까?’
‘본인이 모르는 내 어린 시절부터 다 알고 싶다고 하더군.’
‘폐하, 폐하께서는 참으로 둔하십니다. 아이고,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시종장은 속이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쳐댔다. 이럴 때 연애의 대가 바이런 도련님이라도 옆에 있었더라면 순진하신 폐하께 딱 맞는 조언이라도 해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자택 근신 중이긴 하지만 정인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고 하는 망나니 도련님이 오늘따라 시종장은 무척이나 그리웠다.
고작 ‘그림 몇 장’만으로는 프리아 님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아낌없이 지원해 드리겠다 마음먹은 시종장이 시종들을 불러 모았다.
“외부 반출이 금지된 기록화들이라 프리아 님께 드릴 수가 없는 것이 심히 유감입니다. 수장고의 열쇠는 제가 관리하고 있으니 언제든 보고 싶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앞으로는 제작할 때 한 장씩 더 추가하여 프리아 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오!”
끔찍하고 무서운 소리를 들은 프리아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국, 국고를 그렇게 낭비하면 안 되지요! 그리고 복제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법입니다. 걸작은 원본으로, 그래요. 원본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게 깊은 뜻이. 제가 미처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프리아 님의 고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 원하시면 말씀만 해 주십시오.”
소중하게 보필해 온 황제의 일대기를 함께 나눌 사람이 생긴 것이 무엇보다 기쁜 시종장이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혹시 시종장님은 자녀분이……?”
황제 하나만을 보며 살아가는 것 같은 노익장의 열정에 탄식하며 프리아가 떠오른 의문을 시종장에게 물었다.
“없습니다. 가족에게 시간을 빼앗겨서야 제 임무를 다할 수가 없죠. 작위는 동생이 이었으니 저는 그저 남은 목숨 오직 폐하를 위해 바치고 싶을 따름입니다.”
교외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궁정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시종장이 변함없는 충성심을 밝혔다. 시종장 중의 시종장, 황제의 최측근인 대시종장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프리아의 열혈 지지자 유디스 또한 충성심으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나 대시종장의 관록과 연륜 앞에서는 햇병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손주를 보고도 남을 나이였으나 독신을 자처했기에 시종장은 모든 열정과 애정을 황손들에게 쏟아부었다. 제1황손 아서의 죽음은 시종장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홀로 남은 제2황손을 볼 때마다 애틋하고 가슴 아파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즉위 후, 아홉이나 되는 후궁을 들이고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내심 황제의 옥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시종장은 근심했다. 사내에게 끌리게 되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누구라도 황제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또 황제의 눈에 들어오는 이가 생길 것이고 기다리던 황손도 태어나게 될 것이다.
“폐하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봐 주십시오. 이 시종장이 알고 있는 것이라면 남김없이 프리아 님께 고해바치겠나이다. 제가 모르는 일이라도 알아내서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그림 한 점에 대한 설명까지 무사히 마친 시종장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 * *
황제에 대해서는 그만 알아도 될 것 같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몇 시간째 이어진 시종장의 수다를 감당해 내야 했던 프리아가 지친 몸을 장의자 위로 내려놓았다. 머리가 핑핑 돌고 어쩐지 미열까지 오르는 것 같다. 일일 황제 수용치의 한계를 넘어 버렸다. 몸 상태가 크게 나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방하는 차원에서 서랍에 숨겼던 약도 꺼내 먹었다.
티타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프리아는 푹신한 장의자 위에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상태가 왜 이렇지?”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끙끙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프리아를 내려다보며 오웬이 시종장에게 물었다. 티타임에 맞춰 올라왔더니 후궁은 내실 의자 위에 누워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굳이 깨울 필요까지는 없어 오웬은 지난밤에 후궁이 그랬던 것처럼 잠든 이를 면밀히 관찰했다.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고작 그림 몇 장 본 일로 말인가?”
“기쁜 일이 있거나 설레어 흥분하면 열이 오르기 마련이지요. 폐하께서도 황손 시절 자주 겪으셨던 일입니다.”
“그렇다고 내 후궁이 아이는 아니지.”
몸 선이 가늘어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오웬의 후궁은 스물넷이나 된 장성한 사내였다.
“마음이 순수하신 탓일 겁니다. 걱정되시면 태의를 부를까요?”
오웬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시종장은 시종을 시켜 태의를 불러왔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황제의 남총을 실물로 보게 된 태의가 신중한 동작으로 잠든 이의 상태를 살폈다.
“폐하, 후궁께서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신 듯합니다. 또 체온이 낮고 식은땀을 흘리시는 것으로 보아 최근 들어 체력적으로 무리되는 일을 하셨거나 심중에 깊은 근심을 품고 계신 것이 아닌가 사료되옵니다.”
옳거니.
짚이는 데가 있는 시종장이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상사병! 프리아 님께서는 상사병을 앓고 계신 것이 아니시올런지요?”
시종장의 말을 들은 태의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어왔다.
“후궁께서 밤에 잠을 잘 이루시지 못하거나 부쩍 식사량이 줄어들지 않으셨나요?”
“잠은 잘 자던데.”
오웬이 볼 때마다 후궁은 태반이 잠이 든 상태였다.
“식사량은 적으신 편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밤에 일어나 한숨을 짓는 일이 잦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오웬의 말을 떠올린 시종장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외쳤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심중의 병을 앓고 계시다면 그 근원부터 해결해야겠지요.”
슬쩍 오웬을 올려다본 태의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혼자 총애받고 있다고 들었는데 상사병이라니. 듣던 대로 욕심이 엄청난 후궁인가 보다.
“우선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식사량을 늘리고 몸을 움직여 체온을 올리도록 해 주십시오. 체온이 낮은 편이시니 몸을 따뜻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주무시기 전에 접시꽃과 회향풀, 야생 미나리, 감초, 박하를 넣은 물에 몸을 담그면 더욱 좋습니다.”
하루 종일 책 읽는 것 외엔 하는 일도 없거늘 여기서 더 휴식을 취하게 하라니. 미간을 찌푸린 오웬이 겉옷을 벗어 잠든 프리아의 몸을 덮었다.
덥다. 한여름도 지났거늘 이상하리만치 덥다.
땀이 줄줄 흐르는 더위에 선잠에서 깨어난 프리아가 갑갑하게 몸을 누르고 있는 털이불을 걷어 냈다. 상쾌해졌던 것도 잠시, 차냈던 이불이 어느새 다시 몸 위로 덮였다. 옷이라도 벗어야겠다 싶어 단추를 푸르기 시작한 프리아의 손을 누군가가 잡아 왔다.
“정말 귀찮게 하는군. 한 번만 더 벗어 던지면 묶어 버리겠다.”
눈뜨자마자 협박.
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한 프리아가 겁박을 일삼는 상대를 향해 눈을 깜박거렸다. 꿈에서도 황제를 실컷 보았는데 일어나자마자 이 얼굴이라니.
“……물.”
“뭐라고?”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목이 마르다. 자는 동안 땀을 엄청나게 흘려서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해졌다. 잠긴 목소리로 프리아가 하는 말을 들은 오웬이 협탁 위에 놓인 물잔을 건넸다.
물이 무척이나 달다. 한 잔을 다 마시고도 부족했다. 프리아가 금세 비워 낸 물잔을 본 오웬이 사기 주전자를 들어 한잔을 더 따라 주었다.
연거푸 두 잔을 마시고서야 좀 정신이 든다. 내실 장의자에서 깜빡 잠이 든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그러나 눈을 뜬 곳은 다락방 안쪽의 침대 위였다. 어쩐지 이상하게 덥더라니. 벽난로를 얼마나 땠는지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난로 안쪽에서 타오르는 장작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가히 한여름 불볕 같다.
“덥지 않으십니까?”
프리아의 질문을 들은 오웬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더워.”
“왜 이렇게 불을…….”
갑자기 손바닥 위로 떨어져 내린 물건에 프리아의 말이 멈췄다. 타원형의 몸체는 금동으로 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붉고 푸른 산호 장식이 번갈아 박혀 있다. 금동 위에는 황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마노와 벽옥, 에메랄드, 청금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한눈에 보아도 엄청난 고가품임을 알 수 있었다. 위에 달린 금속 고리는 금으로 된 체인과 연결되어 목에 걸 수 있다. 뚜껑에 달린 잠금쇠를 비틀어 열자 위에는 거울이, 아래쪽으로는 에나멜로 그려진 황제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이게 뭐죠?”
로켓을 처음 본 것도 아니니 물건의 이름을 묻는 건 아니다.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갖고 싶다고 하더니 벌써 필요 없어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