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51)화 (52/237)

“전에 책을 폈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이 밤중에 갑자기 생각나서 다시 보고 싶었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요. 프리아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나쁜 님과는 다르게 귀엽고 착한 조카분을 만나고 나니 새삼스레 님의 과거가 궁금해졌거든요. 님은  몇 살부터 싸가지가 없었는지. 뭘 먹고 자라서 이렇게 된 건지.

“내 초상이 가지고 싶다고?”

수레 가득 쌓아 준다고 해도 사양이었지만 프리아는 절박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좀 그럴듯한 다른 핑계를 댈 걸 그랬다. 누가 믿겠는가.

“여기엔 없어. 헛수고하지 마.”

안 할게요, 안 할게요! 다신 하지 않겠습니다.

“시종장에게 말해 두겠다.”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다음 말에 프리아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예?”

“한밤중에 일어나 뭘 하나 했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혼자 중얼거린 오웬이 들고 있던 종이를 프리아에게 넘겼다.

“……예?”

설마 믿어? 믿는 건가? 정말 믿는 거야?

“보고 나서 원래 있던 곳에 끼워 둬.”

일어난 오웬이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잠을 청하는 황제를 보며 프리아가 그림 속 소년에게 답답한 심정을 호소했다.

‘왜 믿는데?’

그림 속 어린 황제는 건방지게 웃을 따름이다. 이렇게 다시 살펴보니 별로 닮지도 않은 것 같다. 레온 쪽이 배는 더 순수하고 착하고 귀여웠다. 토라진 표정에서 고집이 묻어나온다.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이미 갖고 있었나 보다. 전에는 스치듯 보았던 강아지 그림조차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이렇게 어설프게 안고 있다니. 강아지가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 * *

늦은 아침, 시종장이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왔다. 들뜬 표정으로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이 프리아에게 방밖으로 나설 것을 권했다.

“여기까지 가져오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아래층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예?”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그 많은 것을 혼자 옮기기가 힘들어서요. 이 다락방까지 출입 가능한 시종은 오직 저뿐이라.”

“무얼 말씀이시죠?”

“프리아 님이 원하시던 것들이죠. 폐하께 말씀 전해들었습니다.”

“……아.”

불길하다. 양이 많다니.

다락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어진 프리아가 시종장에게 질문을 던지며 화제를 전환하려 애썼다.

“그러시면 평소에 짐은 어떻게 옮기시는 건가요? 혼자 다 준비하셨던 건가요?”

“내실까지는 출입을 허락받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바이런 님도 여기까진 알고 계시지요. 이 옆방이 원래 선선대 시절에는 유사시를 대비해 기사단장이 머물던 곳이었답니다. 바이런 님이 가끔 머무실 때가 있지요.”

“아, 그랬군요.”

그날 밤 달빛 아래서 만나게 된 이유가 그 때문이었던가.

“폐하께서 이 다락방을 쓰신다고 하셨을 때는 저도 놀랐습니다. 공식 침실 외에 사적 침실을 따로 마련하신 예는 많았지만 선대 폐하께서는 공식 침실만을 사용하셨고 다른 분들도 연결된 내실 정도만 쓰셨으니까요. 그래서 내실까지는 아이들을 시켜 가구를 옮겼는데 그 다음이 어렵지 뭡니까. 제가 낑낑대는 걸 보다 못하신 다정하신 폐하께서 같이 옮겨 주셨답니다.”

“예…….”

퍽이나 다정하다.

“누구보다 늠름하신 폐하지만 내면에는 아직도 아이 같은 면이 있으셔서 다락방을 좋아하시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지신다나.”

덩달아 갇힌 저의 마음도 차암 편합니다.

“가장 아끼는 것일수록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기 마련 아닙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시종장 눈에는 이 다락방이 금은보화를 숨겨놓은 금고로 보이는 걸까.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죄인을 감시하기 위해 데려왔을 뿐인데.

“그럼, 이제 이동하실까요?”

움직이기 싫었지만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프리아를 수호하듯 몇 발자국 앞을 살피며 계단을 내려간 시종장이 힘차게 침실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와.”

프리아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운 건 엄청난 크기의 대형 초상화들이었다.

‘역시 좋아하시는군.’

입이 벌어진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종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서관 지하에 옮겨 보관되는 건 선대의 물건들뿐이다. 통치중인 황제의 초상은 본궁 소장고에서 시종장의 책임하에 소중히 관리되고 있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빠진 것들이 꽤 있는데 나머지는 또 준비해 올리도록 하지요.”

젖먹이 시절부터 궁정 화가에 의해 기록되는 황족의 초상은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보는 것도 아까워 검은 천을 씌웠다가 정기적으로 꺼내 햇빛에 말리고 손수 먼지를 털어가며 관리한 시종장의 보물들이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이 날이 생생하네요.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나신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품에 안겨 저를 바라봐 주셨던 그때가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나이순대로 배치해 놓은 초상의 시작점으로 프리아를 데려간 시종장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벅찬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그림은 말이죠. 폐하께서 처음으로 몸을 뒤집으셨을 때 그 빛나던 순간을 기록한 것이고, 그 다음은 역사적인 첫 걸음마를 축하하며 선대 폐하께서 그리라 명하신 것이랍니다. 이 뺨 통통한 것 보십시오.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발그레한 것이 가을철 햇사과 같지요. 그리고 이건 폐하의 세 번째 생일날에 그렸던 초상입니다. 보세요, 키가 훌쩍 자라셨지요?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제2황손께서 무럭무럭 자라 태산처럼 듬직한 장부가 되실 것을요. 아기 시절부터 이렇게 손발이 크셨는걸요.”

뭐가 이렇게 많을까.

한참을 보고 들었는데도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다.

“이 녀석은 폐하께서 무척이나 아끼시던 사냥개로 이름은 레몬이라 합니다. 안타깝게도…….”

“안타깝게도?”

드디어 사인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인가. 노란 털이 북실북실한 사냥개 옆에 선 어린 소년의 그림 앞에서 프리아는 손에 땀을 쥐었다.

“수명을 다해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개 치고는 장수했지요.”

“장수했어요?”

“예, 사람 나이로 따지자면 저보다 많았습니다.”

장수했구나. 다행이야.

도망간 것도, 괴롭힘 당해 죽거나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었다.

“돌아가신 아서 저하와 정말 우애가 깊으셨어요. 어린 나이에도 성군의 자질을 갖춰 선황제폐하의 주목을 받으셨던 분이지요.”

나란히 서 있는 형제의 초상 앞에서 시종장이 걸음을 멈췄다. 검은 머리카락에 밤색 눈동자를 지닌 따뜻한 인상의 소년이 어린 황제 옆에 서 있었다. 온화한 표정과 다정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는 소년에게서 레온을 떠올린 프리아가 초상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서 저하는 왜 돌아가셨나요?”

프리아의 질문을 들은 시종장이 외눈알 안경을 내려놓고 눈물을 훔쳤다.

“가슴 아픈 사고가 있었답니다. 어린 폐하를 도우시려다가 입으신 상처가 악화되어 열여덟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뜨셨지요. 그때 황손비 저하께서는 복중에 아기씨를 품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갔다는 생각이 든다. 얽힌 사연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프리아는 그가 살아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실 행사의 기록을 목적으로 그린 초상화가 대부분이었기에 황태자와 황태자비, 두 형제가 함께 그려진 그림이 많았지만 표정들이 냉랭해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황태자비 역시 빼어난 미인이었지만 놓인 그림마다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프리아 자신의 가족은 어떠했던가. 열셋이 되기까지는 가끔 기르가 끄적여 준 낙서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초상을 갖지 못했고 형들에게 발견된 열셋 이후에는 해마다 한 장씩 초상을 갖게 되었다.

아직 어린 마티아가 자신을 잊지 않길 바라며 초상들은 모두 고국에 두고 왔다. 급히 후궁으로 오게 된 까닭에 혼인 절차에서 오고 가는 의례적인 초상 한 장 제국에 보내지 않았다. 황제의 즉위를 선포하며 각 공국으로 보내온 초상화가 있었기에 프리아는 그를 볼 수 있었지만 황제는 자신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유디스가 가끔 화가를 부르자며 졸라댄 적은 있지만 제국에는 자신의 흔적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날이었지요. 그날 아침 솟아오른 해는 눈부셨고 온 세상에 폐하의 광영을 알리기 위해 높이 떠올랐답니다.”

마지막 그림 두 장은 황제의 대관식을 기록한 대형화와 황제의 전신이 담긴 초상화였다. 그레이트홀을 가득 채운 귀족들과 선두에 선 황족들, 신관에게서 황관을 내려받는 황제의 모습이 옷 주름 하나까지 섬세한 붓 터치로 재현되어 있었다.

그림 속 천장에서 내려온 빛이 황제의 머리 위로 후광을 씌우고 있다. 황제의 위엄과 황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제보다 더 성스럽게 그려진 까닭에 보고 있자니 프리아 자신도 그날 저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괜스레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기까지 했다.

대관식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발 벗고 나선 시종장의 활약상과 함께 그날 아침에 일어난 황제가 첫 끼니로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소상하게 기억해 중계해 준 시종장 덕분일지도 모른다. 황관을 쓴 황제의 손에 황홀이 건네지는 순간을 묘사하는 시종장의 얼굴은 빛나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제의 전신 초상화는 실물 크기로 제작되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제왕에 오른 자. 젊은 군주의 가장 영광된 날을 기록하기 위해 화가는 구슬땀을 흘렸다. 아름답고 오만하며 자신만만한 동시에 누구도 범접 못 할 권위와 세상을 집어삼킬 패기를 보여 주기 위해 아낌없이 붓을 놀렸다.

정면을 보고 서 있는 황제의 오른손에 쥐여진 황홀과 머리 위의 황관이 강조되고 왼쪽 허리 위로 대관식용 검이 달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황제의 어깨에서 시작되어 바닥을 덮은 푸른색의 망토는 안쪽이 흰 담비털로 덧대어 있었다.

비극적인 가족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가장 찬란한 날에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과 세대를 이어온 황제의 표식을 몸에 두르고 당당하게 서 있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황제의 표정은 어딘가 공허하고 쓸쓸해 보인다고 프리아는 생각했다.

“그럼 이 다음은 잠시 휴식을 취하신 후에 계속할까요?”

“예?”

이게 끝이 아니라니. 나머지가 더 있다는 시종장의 말에 프리아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차려진 간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프리아가 할 수 없이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황제의 초상은 중형화와 작은 크기의 소품들로 바뀌어 있었다. 이어지는 2부는 황제, 그 일상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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