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님, 그럼 이제 내가 천사님을 마티아라고 불러도 되나요?”
허락받지 않은 사칭이었지만 왕자와 공주 놀이에 푹 빠진 마티아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프리아는 그렇게 단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저하가 원하신다면.”
호명을 허락받은 아이가 방금 알게 된 천사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마티아, 내가 울었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을 거지요?”
“당연하지.”
그 말에 기쁜 듯 다시 고개를 끄덕이던 아이가 눈을 빛내며 프리아를 쳐다봤다.
“마티아, 다음에 또 만나러 와줄 거예요?”
낮에는 움직일 시간이 충분하지만 타인의 눈에 띌 염려가 있다. 움직이려면 역시 어둠을 틈타야 할 것이다. 오늘처럼 황제가 자리를 비워 주기만 한다면 프리아 역시 이 사랑스러운 꼬마 저하를 다시 만나러 오고 싶었다. 제비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한 번 정도는 더 기회가 오지 않을까?
“언제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시간을 내어 꼭 레온 저하를 만나러 올게.”
“진짜지요? 천사는 거짓말 안 하는 거죠?”
아이의 순수한 믿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프리아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저하, 우리 친구할까? 비밀친구가 되는 거야.”
“친구?”
“그래, 친구. 그것도 그냥 친구가 아닌 절친이 되는 거지. 절친 넘버원은 이미 다른 사람이 있어서 넘버투 자리를 줄 수밖에 없지만 말이야. 넘버투라도 괜찮으실까요? 레온 저하?”
넘버투란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잠시 고민하던 아이가 굳게 결심한 얼굴로 내실 안쪽으로 달려갔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 벽난로 위에 장식된 검을 꺼내든다. 돌아온 아이가 근엄한 표정으로 프리아의 무릎을 꿇려 앉혔다.
“위대한 제국의 전사 레온이 명하노니 천사 그대를 나의 비밀친구로 봉하노라. 그대 마티아는 신의를 지키고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날도 서 있지 않은 장식용 검을 어깨로 갖다 대는 아이의 진지함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웃지 않기 위해 입술 근육에 힘을 주며 프리아가 과장된 어조로 맹세를 뱉어냈다.
“레온 저하 앞에 맹세합니다. 그 어느 때라도 신의를 지키고 저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아이가 검날을 프리아의 어깨에 대고 두 번 두드렸다. 고개를 숙였던 프리아가 다시 얼굴을 들어 앙증맞은 손등 위로 맹세의 입맞춤을 했다. 아이와 하는 장난에 불과하지만 프리아 역시도 늘 책에서 보기만 했던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라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사 서임식을 어설프게 흉내 낸 비밀친구 서임식이 끝나자 프리아가 아이를 당겨 품 안에 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이의 몸이 프리아의 품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프리아는 손을 들어 밤톨처럼 매끈한 아이의 뒤통수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아이가 프리아의 귓가에 대고 물어왔다.
“그런데 마티아, 넘버원은 누구야? 우리 아버지예요?”
자신 덕분에 애꿎은 가택 근신 처분을 받은 바이런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프리아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앞으로 그대의 1순위는 나란 걸 잊지 마시오. 이래 봬도 자존심이 꽤 높아서 살면서 그 흔한 세컨드 취급 한 번 받아 본 적 없소이다.’
정체를 속인 것은 미안하지만 절친 넘버원의 자리는 지켜 냈으니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귀엽고 마음가기로는 레온 저하가 으뜸이었으나 약속한 이상 순서는 지켜야 했다.
“그건 비밀이야. 우리는 모두 비밀친구니까.”
“아, 그렇지.”
비밀친구의 엄격한 규칙에 가로막힌 아이가 아쉬움이 남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를 봤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연회 음악소리는 아직 끊기지 않았지만 달의 위치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꼭 만나러 와야 해. 알았지?”
지붕으로 올라간 프리아가 다시 몸을 낮춰 레온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환한 얼굴로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저하, 아직 깨어 계십니까? 들어가겠습니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유모가 내실의 문을 열었다. 열린 창문 앞에 서 있던 레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주무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저하.”
바닥을 뒹구는 장식용 검을 발견한 유모가 검을 집어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갓난아이 때부터 제 손으로 키워 낸 어린 황손을 유모는 제 아이처럼 아꼈다. 부득불 혼자 자고 싶다며 자신을 내쫓더니 혼자서 기사 놀이를 한 모양이다.
널려 있는 물건들을 정리한 유모가 레온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혼자서 기사놀이를 하며 뛰어다닌 것인지 아이의 뺨이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유모, 있잖아…….”
“예, 저하.”
“미안, 비밀이라서 말 못 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갈수록 고집이 생기더니 이제는 자신에게 말 못 할 깜찍한 비밀까지 만든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은 토닥이는 자신의 손길을 받아야만 잠이 드는 아이였다. 혼자서 배시시 웃는 아이의 잠자리를 여며 주며 유모가 미소 지었다.
급하게 손발을 닦고 지붕을 오간 흔적이 남은 침의는 벗어 물에 담가 두었다. 여분의 침의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프리아가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벽이 열리며 황제가 돌아왔다. 잠이 든 척 눈을 감은 프리아의 귀로 황제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창문이 닫히는 소리, 목욕실을 드나드는 소리에 이어 침대로 걸어오는 발걸음이 들렸다. 새틴 이불이 들리고 옆자리에 누군가 눕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천천히 눈을 뜬 프리아가 곁에 누운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촛불은 꺼졌어도 달이 환해 그린 듯한 윤곽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 빽빽하게 나 있는 짙은 속눈썹, 사선으로 뻗어나가 더욱 단호한 인상을 주는 굵은 눈썹 아래 오똑한 콧날과 굳게 닫힌 입술이 자리 잡고 있다. 늘 이렇게 달빛 아래에서만 두려움 없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을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더욱 닮았다. 황제 또한 어린 시절에는 레온처럼 순수한 황손이었을까. 프리아는 그 시절로 돌아가 어린 황제를 한 번쯤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있었지.’
이 다락방에 처음 왔었던 날, 책을 뒤지다 어린 황제의 스케치를 발견했었다. 그 그림이 떠오르자 다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황제가 깊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프리아가 슬그머니 침대를 벗어나 바닥으로 발을 내려놓았다.
달이 밝다 해도 벽에 붙은 책장까지 따라오지는 못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 촛불을 켜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분명 맨 아랫단에 꽂혀 있던 책에서 발견했는데.
바닥에 책을 쌓아 가며 한참을 뒤지던 프리아가 낡은 동화책을 꺼내들었다. 급히 책장을 넘기다 마음이 급해져 책날개를 잡고 허공에서 흔들었다. 툭 소리를 내며 찾고 있던 물건이 책장 사이에서 떨어졌다.
“어!”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려는데 한발 앞서 움직인 누군가의 손이 종잇조각을 빼앗아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지?”
기척도 없이 언제 일어났을까.
접힌 종이를 펼치는 황제의 미간으로 잔뜩 주름이 졌다. 프리아는 꿀꺽 침을 삼키며 슬그머니 뒷걸음질쳤다.
“가만있어.”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처분만을 기다리는 죄인이 된 프리아가 얌전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감은 눈앞을 오가는 손바람에 의식이 깨었다. 잠든 줄 알았던 후궁이 어느새 일어나 오웬의 얼굴 위로 손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자신이 잠에 들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아 눈을 감은 채 후궁의 기척을 살폈다.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간 후궁이 향한 곳을 알기 위해 오웬이 눈을 떴다. 달이 환해 움직이는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벽에 붙은 책장으로 걸어간 후궁이 부싯돌을 부딪쳐 초에 불을 밝혔다.
아닌 밤중에 일어나 뭘 하나 싶어 지켜보았으나 후궁은 한참을 책을 뒤지기만 할 뿐이었다. 청원으로 장서관 출입을 부탁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후궁이 책읽기를 즐겨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책을 찾을 정도로 대단한 독서가일 줄은 몰랐다.
대체 어떤 책이기에. 호기심이 생긴 오웬이 일어나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책 찾기에 빠져 있는 후궁을 보며 오웬은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후궁이라 생각했다.
책이 아니라 이걸 찾고 있었나. 책장에서 떨어진 종잇조각에 반색하는 프리아의 기색에 오웬이 먼저 손을 뻗었다.
“…….”
오웬 자신도 잊고 있었을 만큼 오래된 추억의 조각이다. 펼친 종이에서 나타난 유년의 초상에 오웬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리운 어린 날, 천진난만하기만 하던 시절에 형 아서가 그렸던 목탄 스케치다.
“이걸 왜…….”
살얼음이 이기 시작하는 오웬의 목소리에 프리아가 앉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대체 뭐라고 변명하면 좋단 말인가.
“이게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려준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제에게 있어 소중한 물건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막다른 곳, 벽장에 등이 닿은 프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폐하의 그림이 갖고 싶어서요!”
예상치 못한 후궁의 대답에 오웬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 그림이 갖고 싶다고?”
황제의 초상 정도는 어딜 가나 놓여 있기 마련인 황궁에서 정말이지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제, 제가 모르는 폐하의 어린 시절부터! 다, 다… 알고 싶어서.”
알고 싶어, 너의 모든 것.
무슨 변명을 이따위로 했을까. 프리아는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