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환한 밤이다. 지붕 위에 선 프리아가 발밑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불을 밝힌 연회장에서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황제도 춤을 추려나? 음악에 맞춰 뻣뻣한 목각인형처럼 움직이는 황제의 모습을 상상한 프리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은 형의 아내가 된 소꿉친구의 강요로 춤을 배웠다. 1년에 한 번 부모를 따라 성을 방문하던 그녀를 만나는 것이 프리아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생각해 봤는데 너 정도면 후보에 넣어도 될 것 같아.’
‘무슨 후보?’
‘좀 멍청해 보이는 게 걸리는데 내가 똑똑하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남자애 중에 네가 제일 예쁘게 생겼어.’
‘나 멍청하지 않은데……. 그리고 예쁜 게 아니라 잘생긴 거야.’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한 후 부쩍 결혼에 관심이 많아진 에델린에게 일방적인 청혼을 받았다. 아직 나이가 어려 혼인의 의미보다는 화려하게 예쁜 옷을 차려입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축하와 선물을 받는 하루를 보낸다는 것에 끌린 것이었다. 크면 에델린과 정말 결혼을 해야 하나. 근심에 싸여 돌아온 프리아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기르가 코웃음을 쳤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그 나이대 레이디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법이죠.’
‘그런데 진짜 에델린과 결혼하면 나는 어디서 살아? 기르도 같이 살면 안 돼?’
프리아는 한 해 동안 진지하게 고민했으나 다음해에 만난 에델린은 아기들은 정말 시끄러운 존재라며 당차게 독신 선언을 했다. 세월이 지나 그녀가 형의 아내가 되고 자신은 먼 나라에 끌려와 후궁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그 시절엔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춤곡에 어둠 속의 상대와 리듬을 타던 프리아가 스텝을 멈췄다. 어디선가 훌쩍이는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환청인가? 황궁에 아이 울음소리라니. 주위를 돌아보며 귀를 기울이는 프리아에게로 다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니다. 가까웠다. 소리를 찾아 프리아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이 있었다. 창이 열려 있다. 바닥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내리자 방 안쪽의 광경이 프리아의 눈으로 들어왔다.
어린 사내아이가 침대 위에서 훌쩍이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네다섯 살쯤 되었을까. 아직 한참 어린 나이인데 혼자 방 안에 남겨진 것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유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을 길게 빼고 방 안쪽을 살피던 프리아의 시선이 어느새 책에서 눈을 뗀 아이의 시선과 부딪혔다. 놀라 소리를 지르지 않을까 긴장한 프리아의 염려와는 다르게 환한 얼굴을 한 사내아이가 창 아래로 달려왔다.
“어서 와. 천사야.”
천사라니, 누구? 나?
자신 없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키는 프리아를 보며 아이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서 본 천사와 똑같이 생겼어. 심지어 입은 옷마저 똑같았다.
“날 보러 올 줄 알았어. 우리 아버지가 보낸 거지?”
아버님이 누구니? 대체 뭐하는 분이시길래 천사를 다 소환해 낼까.
“꼬마야, 네 이름이 뭐지? 이건 확인차 물어보는 거야.”
꼬마의 아버지가 보내온 천사 행세를 하기로 결심한 프리아가 아이에게 이름을 물었다.
“황족의 이름을 함부로 묻다니. 무엄하구나.”
당당하게 허리를 곧추세운 아이가 근엄한 표정으로 프리아를 꾸짖었다.
“나는 천사라서 황족보다 높아. 어서 이름을 말하도록.”
진짜? 고개를 갸웃한 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레온입니다. 선황제 폐하가 친증조부이시고 아버지는 제1황손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숙부는 황제 폐하십니다!”
존칭을 쓰기 시작한 아이가 차렷 자세로 서서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혔다. ‘우리 숙부는 황제 폐하십니다!’라고 외칠 때 유독 밝게 빛나는 얼굴이 아이답게 사랑스러웠다.
‘너구나.’
전 황손비의 아이. 제1황손의 유복자. 황제가 그렇게도 아낀다는 친조카였다.
“확인 완료. 맞게 찾아왔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
“네, 들어오세요.”
프리아의 말에 아이가 무릎을 굽히며 황족보다 신분이 높다는 천사에 대한 예를 표했다. 창틀을 붙잡고 매달린 프리아가 무사히 난간에 내려서자 아이가 발뒤꿈치를 들고 일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날개는 어디 숨겼어?”
방 안으로 들어온 프리아의 주위를 따라 맴을 돌던 아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날개는 보여 줄 수가 없어. 부끄럼쟁이라서 사람의 눈에 띄면 몸에서 떨어져 나와 흩어져 버리거든. 그럼 하늘로 돌아갈 수가 없잖아.”
“아, 그렇구나.”
아쉽다는 표정으로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아의 허리에도 닿지 못할 정도로 작고 어린 아이였다. 숱 많은 검은 머리와 머루알 같은 눈동자가 황제를 닮아 있어 혈육임을 실감케 했다.
“레온 저하, 왜 울고 있었지?”
프리아의 물음에 아이가 눈치 보듯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렸다. 달려오느라 내던진 두꺼운 양장본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책이었지만 아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은 듯했다.
“유모는 없어? 왜 혼자야?”
“유모는 옆방에 있습니다. 내가 나가라고 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든 아이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왜?”
“유모는 고자질쟁이니까.”
“유모가 고자질쟁이야? 누구한테 고자질을 하는데?”
프리아의 질문에 아이가 다시 시선을 피하며 바닥으로 고개를 떨궜다.
“괜찮아. 천사는 입이 무거워.”
아이의 눈동자가 깜빡거리며 프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정말인가, 아닌가 작은 머리로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한테.”
어머니라면 전 황손비다. 친모이니 유모가 아이에 대한 보고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모는 책을 많이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어.”
“유모가 이 책을 읽으라고 시켰어?”
“아니. 그런데 내가 읽고 싶었어. 전에 숙부님이 읽으시는 걸 봤거든.”
“그랬구나. 숙부님은 어른이니까 어른 책을 읽는 걸 거야. 레온 저하는 저하에게 어울리는 동화책을 읽으면 되지 않을까?”
“동화책은 시시해.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그런데 왜 울었어? 무서운 내용이야?”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춘 프리아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 심정 이해할 수 있다. 크로히파토스와 레제논의 책을 펼쳤을 때 프리아가 느낀 심정과 똑같았다.
“레온 저하가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숙부님이 설명해 주실 수도 있고.”
그 인간 강의가 취미란다.
“그럴까?”
언제 울었냐는 듯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유모가 어머님에게 레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건 어머님이 레온을 걱정하고 계시기 때문일 거야.”
“그렇지만 유모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 얼굴이 슬퍼지는걸.”
사과 같은 아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프리아가 말을 이었다.
“레온 저하의 어머님은 저하가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하셔서 그러신 거야. 천사는 다 알 수 있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
“정말?”
“정말.”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의 아버님이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어. 신나게 뛰어놀고 잘 먹고 잘 자라서 튼튼한 어린이가 되어 달라고. 어려운 책은 조금 더 자라서 읽어도 된대.”
“아, 그렇구나!”
신이 난 아이가 두 주먹을 쥐고 흔들어 댔다. 울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황제를 따라하고 싶었다니 아이의 진솔한 마음이 기특하고 안쓰럽다.
“저하는 숙부님이 좋아?”
“응!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어머니만큼! 아버지만큼 좋아!”
“그렇구나. 숙부님도 저하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실 거야.”
“그럴까?”
몸을 배배 꼬며 좋아하던 아이가 프리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천사님.”
“응?”
“천사님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했잖아요?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두 손을 맞잡은 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숙부님 마음을 좀 들여다봐 주시면 안 될까요?”
그거 정말 어려운데. 프리아야말로 그 차가운 얼굴을 한 황제의 마음속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레온 저하는 뭘 알고 싶어? 숙부님의 마음에는 여러 생각이 들어 있을 텐데 어떤 걸 가장 알고 싶어?”
작은 머리로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있잖아요. 나중에 숙부님 아이가 생겨도 나랑 놀아 줄 수 있을지. 그리고 나는 황자 전하가 태어나면 같이 놀아 주고 싶거든요. 그렇게 해도 될지.”
이렇게 귀여운 고민이라니. 아이의 넘치는 사랑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프리아가 레온을 끌어안았다.
“당연하지. 그건 숙부님이 너무나 바라시는 일일 거야.”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야. 나는 황자 전하가 빨리 태어났음 좋겠어요.”
아이의 순수한 소망을 들은 프리아가 난처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필 그 소원이 이뤄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 아닌가. 프리아 자신이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세간은 모두 자신이 황제를 홀려 다른 이에게 가지 못하게 붙잡아 둔 것이라 여길 것이다.
“태어날 거야.”
언젠가 태어날 것이다. 반드시.
“그런데 천사님.”
아이가 꼬물거리며 프리아의 손바닥 아래에서 고개를 들었다. 또 무엇이 궁금해진 것인지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람쥐 같다.
“천사님은 이름이 뭐예요? 나는 알려 줬는데. 나한테도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이 아이만은 자신의 정체를 몰랐으면. 이 순수한 마음과 꾸밈 없는 애정을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지켜 주고 싶다. 프리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단 한 명의 천사. 그리운 조카의 이름을 아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마티아, 내이름은 마티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