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8)화 (49/237)

간신히 잠을 깨워 세안을 마친 프리아를 거울 앞으로 데려가, 결 고운 금빛 머리카락을 보석 박힌 상아빗으로 한 올 한 올 빗어 내리는 것이 유디스의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의로 갈아입은 뒤에도 유디스는 어김없이 빗을 들고 나타났다. 무조건 백 번은 빗어야 침대로 보내 줄 수 있다는 주장에 프리아는 그녀의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프리아가 허리까지 내려왔던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버린 후에는 잠시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며칠 만에 회복해 다시 야무지게 상아빗을 잡았던 유디스다. 그녀가 봤더라면 기절을 하고도 남았을 광경이 황제의 목욕실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프리아의 젖은 머리카락에 고루 솔질을 한 황제가 비누를 들어 머리에 대고 문질렀다. 비눗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 눈에까지 들어가는 통에 따가워진 프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유디스는 어떻게 했더라. 빗질을 마쳐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에 향유를 적시고 부드럽게 마사지한 후 따뜻한 물에 여러 번 헹궈 냈다. 향이 나는 비누를 해면에 문질러 크림 같은 거품을 만든 뒤 머리카락에 고루 바르고 한동안 방치한다. 다시 온수로 꼼꼼히 행궈 낸 후 마지막 헹굼물에 향수를 떨어뜨려 마무리했다.

인형 놀이에 어울려 주는 심경으로 그 지난한 과정을 버텨 왔으나 시녀의 인형에 이어 황제의 애완견 노릇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양동이에 물을 담은 오웬이 프리아의 정수리에 물을 쏟아부었다. 폭포처럼 비눗물이 프리아의 몸을 타고 내려간다. 물에 젖어 찰싹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정말 강아지 같아 무심결에 쓰다듬고 만 오웬이 프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에 손을 멈췄다.

매일 산책 후에 씻기고 손수 털을 빗겨 주었다더니 이렇게 서툴 수가. 길렀다는 개는 어찌 되었을지. 필시 도망간 것이 분명하다.

프리아 자신도 잠시 개를 길러 본 경험이 있었다. 야산에 놀러갔다가 유난히 달라붙는 들개 한 마리를 만났는데 차마 떼어놓고 오지 못했다. 아기 새 때와는 다르게 다 자란 성견이었지만 기르에게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 방에 숨겨 두었는데 결국 들키고 말았다. 광견병을 이유로 반대하는 기르에 맞서 단식 투쟁까지 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제 몫의 음식을 나눠 주며 애지중지했었는데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려 꽤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때 뭔가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닌가 싶다. 서툰 주인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싶은 지금 자신의 심정처럼.

“그건 계속 입고 있을 건가?”

물에 젖은 침의를 가리키며 하는 오웬의 말에 프리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알몸으로 황제와 한 욕조에 들어가기에는 저항감이 커 입은 채로 들어와 버렸다. 물에 젖어 지나치게 달라붙는 탓에 시원하게 씻기도 어렵다. 다 씻었으면 먼저 나가주면 좋을 텐데.

프리아가 간절한 소망을 담은 눈으로 오웬을 쳐다보았다.

“그걸 벗어야 씻겨 줄 수 있는데?”

프리아의 시선을 곡해한 오웬이 탈의를 재촉했다. 해면을 한 손에 꼭 쥔 표정이 지나치게 당당하다.

“제가 어찌 폐하께 그런 무례를 저지르겠습니까.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씻을 터이니 폐하께서는 먼저 잠자리에 드시어 휴식을 취하심이 어떠신지요?”

이제와 무례를 따지기에는 첫날밤부터 지금까지 후궁이 저지른 무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표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척 핑계를 대는 모습이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리고 젖은 침의로 말하자면 입고 있는 편이 벗고 있는 쪽보다 수십 배는 더 자극적이었다.

잠시 생각한 오웬이 손에 들고 있던 해면을 프리아에게 건넸다. 해면을 건네받은 프리아가 침의 속으로 손을 넣어 몸을 닦기 시작한다. 관계는 맺었어도 격의 없는 사이는 되고 싶지 않기에 프리아는 굳이 고집을 부려 불편한 목욕을 이어갔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자신을 구경하는 황제의 무심한 표정이 거슬려 물을 끼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마지막으로 욕조 옆에 준비된 여분의 통에서 맑은 물을 떠 전신에 끼얹은 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욕조를 빠져나온 황제가 다시 고개를 까딱해 아마포를 가리켰다.

‘황족은 정말 손이 없구나.’

한숨을 내쉰 프리아가 아마포를 집어 들어 오웬의 몸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어깨는 또 왜 이렇게 넓고, 키는 또 왜 이렇게 큰지 양팔을 벌리고 발뒤꿈치를 높이 들어야 했다.

흐린 눈으로 하반신의 중심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프리아가 전신의 물기를 마저 닦아 냈다. 시중은 다 들어 줬으니 이쯤에서 먼저 나가 주면 좋을 텐데. 고집부리며 입고 있던 침의를 벗어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젖은 머리 위로 아마포를 덮은 오웬이 한 장을 더 집어 프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꾹꾹 눌러 피부의 물기를 제거하더니 다시 펼쳐 정수리에 덮어씌운다. 시야가 가려진 프리아가 답답함을 느껴 고개를 쳐들었다. 오웬이 푸드덕거리는 강아지의 털을 말리듯 큰 동작으로 수건을 털었다.

‘하아.’

흔들리는 수건 속에서 머리를 흔들며 프리아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유디스를 다시 보게 되는 날이다.

“……는.”

수건 아래서 들려오는 프리아의 말에 오웬이 동작을 멈췄다.

“뭐라고 했지?”

“개는. 기르시던 개는 어찌 되었습니까?”

다섯 살 아이였을 무렵 선물받았던 강아지는 오웬보다 앞서 성인이 되었다. 뒤늦게 성장을 따라잡기 시작한 오웬을 놀리는 것처럼 강아지는 너무도 빨리 노견이 되어 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죽었어.”

오웬의 손 아래 얼굴을 잡힌 프리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오웬 자신이 죽게 만든 것으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오웬은 굳이 억측을 정정해 주지 않기로 했다. 어느 정도는 겁을 먹어야 앞으로 말을 잘 듣겠지.

차마 무서워서 사인은 물어볼 수가 없다.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이라도 험하게 가고 싶지는 않은 법이었다. 오웬이 어깨 위로 둘러놓은 아마포 천 아래서 프리아는 거센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열네 살쯤 입었던 것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목욕실 앞에 놓인 두 벌의 침의에 프리아가 고개를 들자 오웬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크나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프리아의 얼굴을 보며 오웬이 입꼬리를 움직였다. 그런 그의 표정을 비웃음으로 인식한 프리아의 미간에 긴 주름이 잡혔다.

‘침의도 입혀 줘야 하는 건가.’

프리아가 고민하고 있을 때 오웬이 몸을 둘렀던 수건을 바닥으로 떨구고 제 몫의 침의를 펼쳐들었다. 오웬이 침의를 입는 사이 수건과 젖은 침의를 벗어 낸 프리아가 빠른 동작으로 옷을 꿰어 입었다.

이미 수십 번이나 본 마른 몸이 침의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오웬은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입으로는 공손하되 동작 하나하나, 표정 하나하나 불온하지 않은 것이 없다. 공개적으로 반역자를 지지하는 후궁은 전대미문일 것이다.

먼저 침상에 누운 오웬의 곁으로 프리아가 다가섰다. 지난밤에는 먼저 잠이 들어 있었기에 의식하지 못했다. 색사의 목적 없이 황제와 한자리에 눕는 것은 처음이다. 침상 앞을 서성거리던 발걸음이 멎고 발쪽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이불이 들렸다. 떨어지기 직전의 위치까지 오웬과 거리를 벌린 프리아가 조심스럽게 등을 돌렸다. 오랜만에 들척임도 없이 오웬은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 * *

크로히파토스와 제자들의 토론 1, 2, 3권 그리고 그들에 반박하는 레제논의 논문이 1, 2, 3, 4, 5권 그리고 6권.

티 테이블 위에 쌓인 책의 목록에 깜짝 놀란 프리아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말 이걸 읽으라고 가져온 건가. 고문이다.

질색하는 프리아의 표정을 바라보던 오웬이 다섯 권의 책을 더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만 하십시오. 충분합니다!”

손사래까지 치며 기겁하는 프리아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이 오웬이 턱을 모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역심을 다룬 책들로 선별해 왔다. 금서까지는 아니지만 권장 도서도 아닌데 원치 않는다면 가져가도록 하지.”

“예?”

오웬의 말에 놀란 프리아가 황급히 책장을 펼쳐들었다. 일반 서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금단의 신간들이다.

“오늘은 밤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얌전히 있어.”

이어진 오웬의 말에 프리아의 눈이 더욱 크게 뜨였다. 연회가 예정되어 있어 저녁 식사와 독서, 산책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오웬이 나가고 벽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소리에 침대로 돌아온 프리아가 기지개를 켜며 뒹굴었다.

시종장이 가져다준 저녁을 먹은 뒤 황제가 가져다준 책을 읽으며 여유를 만끽했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보던 프리아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들의 선전에 자극받은 것일까. 황제가 없는 이 소중한 저녁 시간을 평소처럼 책이나 읽으며 흘려보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허락한 개인 정원까지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나 다른 곳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황제의 공식 침실까지는 나갈 수 있다 해도 바로 시종들에게 모습을 들킬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단 하나, 지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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