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7)화 (48/237)

오웬이 앞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 끝이 황제의 공식 침실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프리아가 벌써 내보내 주는 것인가, 반신반의하며 따라갔다. 계단을 절반쯤 내려간 오웬이 층계참에서 멈춰 섰다. 계단이 꺾인 곳에서 방향을 틀어 프리아가 마저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저 성미에 에스코트해 주려는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일까. 층계참에 닿은 프리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한 발짝 물러서며 오웬이 등 뒤의 벽을 밀어냈다. 소리도 없이 회전한 벽이 숨겨진 복도를 드러낸다. 말없이 복도를 걷기 시작한 오웬을 프리아가 따라갔다.

첫 번째 가능성, 고문실. 두 번째 가능성, 지하 감옥. 세 번째 가능성, 추방.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불안해진 프리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정 간격으로 놓인 등불이 긴 복도를 어둡지 않게 밝히고 있었다.

막다른 곳에 먼저 도착한 오웬이 다시 한번 눈앞의 벽을 밀어냈다. 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외부와 연결된 문이었다. 프리아가 건너오기를 기다렸던 오웬이 긴 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시원한 밤공기가 쏟아져 들어온다.

고요한 숲 위로 휘영청 달이 떠올랐다.

드디어 도착한 목적지는 황제의 개인 정원이었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빽빽하게 심은 상록수는 7척의 높이로 자라 철옹성의 요새가 되었다. 소수의 선택받은 자만이 황제의 개인 정원을 구경할 수 있다. 오웬 역시도 즉위 후에나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본궁 앞에 조성된 대정원이 방문자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공간인 것에 비해 이 개인 정원은 규모는 작지만 오직 한 사람, 황제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정원 안쪽에는 유리로 만든 온실까지 설치되어 있어 사시사철 꽃을 볼 수 있었다. 전담 정원사가 화로에 불을 피워 늘 적절한 온도를 유지시켰다. 덕분에 이국에서 온 귀한 꽃과 나무들이 고유의 자태를 유지하며 매력을 뽐낼 수 있었다.

프리아가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오웬이 입을 열었다.

“내 개인 정원이다. 소란을 피우지만 않는다면 마음대로 오가도 좋아.”

“정말이십니까?”

두려워하던 고문실 대신 정원으로 오게 된 것이 믿기지 않는 프리아가 들뜬 표정으로 반문했다.

“앞으로 티타임은 오후 3시, 독서는 저녁 시간 이후, 산책은 달이 떠오른 후로 한다. 그 외의 시간은 알아서 보내도록.”

티타임은 오후 3시, 독서는 저녁에, 산책은 밤에. 황제가 제시한 규칙을 입속으로 따라하던 프리아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들었다.

‘바이런과는 만나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지?’

바이런과 장서관에서 만나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함께 책을 읽었다. 오늘 하루 황제와 보낸 일정이 그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설마 황제는……. 황제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은 건가?

바이런과 해서는 안 되고, 다른 여인과도 나누어서는 안 되는 것이 우정. 뭐 얼마나 대단한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가두었다가 앞마당에 잠시 풀어준다는 것인지. 이것은 분명 나를 고립시켜 더 쉽게 통제하고 감시하려는 의도가 틀림없다. 황제의 속내를 추측해 낸 프리아가 경계에 찬 눈초리로 오웬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언가 또 불만인 모양이다. 프리아의 샐쭉 치켜올라간 눈매를 보던 오웬의 시선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금빛 머리칼로 옮겨간다. 하늘하늘 움직이는 가는 머리칼마다 달빛이 내려앉았다. 크게 불어온 바람에 로브 자락이 날리고 살결이 비치는 침의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바람을 타고 부풀어 오른 침의 아래 흰 종아리와 발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온 오웬이 프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흩날리는 로브 자락을 잡아 여며 주더니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줄지어 서 있는 전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말이 없는 두 사람 대신 밤새가 울어 깊은 정적을 깨뜨린다.

‘기르, 이 꽃의 꽃말을 아시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그대를 향한 내 마음과도 일치한다오.’

‘기르, 월계수에 얽힌 신화를 아시오? 아폴론의 구애를 피해 도망친 여인이 이 나무로 변해 영원한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나무로 변하는 저주에 걸릴 수 있으니 웬만하면 받아주는 것이 좋다, 이 말이오.’

꽃과 나무가 보일 적마다 걸음을 멈추고 너스레를 떨어대던 바이런과는 다르게 황제는 말이 없었다. 청동 소년이 부는 피리에서 흐르는 분수 소리, 산새의 울음,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올 뿐이었다. 검은 옷을 걸친 황제는 머리칼과 눈동자마저 깊고 어두워 나무 그늘이 드리울 때마다 밤의 장막으로 사라졌다 달빛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늘 막막하고 두려웠다. 왜 하필 나인가. 당신은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함께 걷는 길의 끝에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황제의 진심 따위 알 수도 없고 안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예전보다 조금 더 궁금해졌을 뿐이다.

밤공기는 상쾌하고 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온 꽃향기는 더없이 감미로웠다. 때로는 말없는 산책이 다정한 대화보다 좋을 수 있다는 것을 프리아는 깨달았다.

‘뭐야, 여기 욕실이 있었어?’

단순한 거울인 줄 알았던 문이 열리고 나타난 목욕실에 프리아가 당황한 눈빛을 보이자 오웬이 내실과 연결된 또 다른 목욕실을 열어 보여 주었다. 침실에 한 개, 내실에 한 개, 두 개나 있었다니. 화장실이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던 그간의 자신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일전 시녀들에 의해 끌려갔던 거대한 욕탕에라도 다녀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는데 그저 입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폐하께서는 저쪽의…….”

욕실이 두 개니까 하나씩 쓰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프리아의 등이 오웬에 의해 떠밀려 들어갔다. 먼저 옷을 벗어 던진 오웬이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왜 같이? 의문을 표하는 프리아의 얼굴을 본 오웬이 혼욕의 이유를 설명했다.

“시종장이 나이가 들어 목욕물을 두 번 준비하기가 어려워.”

아, 그래서.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체념한 프리아가 침의를 입은 상태로 오웬이 앉은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여러 번 알몸을 본 사이에 왜 극구 가리려고 하는 것인지 오웬은 프리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황제의 일상에서 시종의 손을 빌려 옷을 입고,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에는 공식 침실과 연결된 커다란 목욕실에서 시중을 받았으나 부러 시종장을 시켜 내실에 목욕물을 준비하게 했다.

온몸의 피로가 풀릴 정도로 뜨거운 물이었다. 수면으로는 약초가 띄워져 있었는데 살펴보니 감초, 박하, 회향풀과 카밀레꽃이었다. 알몸의 오웬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인 프리아의 귓가로 손가락으로 욕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오웬이 턱짓으로 욕조 옆에 준비된 비누와 해면, 목욕솔, 향유와 아마포를 가리켰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프리아가 오웬을 쳐다보자 오웬 역시 프리아를 빤히 응시해왔다.

‘아…….’

뒤늦게 깨달음이 왔다. 평소에는 가능한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만 황제가 다녀간 후에는 힘이 빠져 중년 시녀들의 힘을 빌려 몸을 씻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스스로 하겠다는 프리아의 말에 그녀들은 별난 후궁 다 보겠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제압해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했다.

후궁이 시녀의 시중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황제는 시종의 손을 빌어 일상을 해결했다. 그러니까 저 눈빛은, 저 고갯짓은.

‘씻겨 달라고?’

확실히 ‘친구’는 아닌 것 같다. 후궁에서 감금된 죄인으로, 죄인에서 친구로 승격된 게 아닐까 잠시 기대를 해 보았는데 이 상황을 보아하니 감금 노예가 바로 현재 자신의 위치 아닌가.

하라면 하는 수밖에. 프리아가 손을 뻗어 비누를 손에 쥐었다. 물에 적신 해면을 비누에 대고 문지르자 금세 거품이 피어올랐다. 거품이 일어난 해면을 쥐고 최대한 팔을 뻗어 황제의 어깨에 갖다 댔다. 탄력 있는 육체 위로 잔거품이 미끄러져 내린다.

느리게 양쪽 쇄골을 왕복한 해면이 아래로 방향을 틀었다. 미끄러운 거품 탓에 손을 잘못 놀려 탄탄한 맨가슴을 만지게 된 프리아가 화들짝 뒤로 물러난다. 해면이 수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물 위를 떠가는 해면을 잡아챈 오웬이 프리아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로 올려주었다. 거품 섞인 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그러지 않아도 천이 얇아 마른 상태로도 피부가 비쳐보이던 침의였다. 물에 젖어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해진 침의가 프리아의 피부에 찰싹 달라붙었다. 더운 물에 익어 연분홍빛으로 변한 살결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인다.

“손이 쉬고 있는데.”

오웬이 손가락을 뻗어 표면을 누르자 더욱 진한 거품이 구멍 사이로 빠져나왔다. 멈췄던 프리아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수차례 왕복해 넓은 등을 닦아 낸 해면이 물 위를 흘러간다. 거품 묻힌 손가락이 이제는 검은 머리칼 사이를 미끄러져 내렸다.

프리아의 손길에 몸을 맡긴 오웬이 감았던 눈을 떴다. 욕조 바닥에 무릎을 딛고 몸을 세운 프리아가 팔을 길게 뻗어 오웬의 머리를 감기고 있었다. 열중하느라 벌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숨이 흘러나온다.

오웬이 향유병을 집어 들자 긴장했던 프리아는 목욕물에 섞이는 라벤더 향기에 안심하고 몸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은 프리아의 얼굴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목욕솔을 손에 든 오웬이 프리아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털이 긴 사냥개 한 마리를 기른 적이 있다. 산책 후엔 늘 내가 씻기고 털을 빗겨 주었지.”

그러셨구나. 기분 좋은 손길에 몸을 맡기던 프리아가 순간 머릿속을 스쳐간 깨달음에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산책 후에 뭘 한다고요?

친구도 감금 노예도 아니었다. 자신의 현재 위치는 개와 동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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