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6)화 (47/237)

“잠시라도 짬을 내어 프리아 님과 함께하시려는 폐하의 마음이지요. 이제 이 내실까지는 나오셔도 좋습니다. 이 액자를 움직이시면 벽이 열리고 저절로 닫힙니다. 안쪽에서 이곳으로 나오실 때는 벽난로 위에 놓인 시계태엽을 왼쪽으로 감아 주십시오. 시간제한이 있으니 빠르게 움직이셔야 합니다.”

시종장이 액자를 밀어 시범을 보여 주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은 숫자 일곱을 세기 전에 빠르게 다시 닫혔다. 그래서 황제가 벽난로 쪽으로 움직였던 것인가. 숨겨진 장치의 비밀을 알게 된 프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여기까지만 나올 수 있어도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당분간은 황제의 눈치를 보기 위해 몸을 사리겠지만 기회가 있다면 유디스를 불러내 얼굴이라도 비출 생각이다.

“제 수행 시녀들은 걱정하지 않던가요? 염려를 끼쳤는데 안부라도 전하고 싶은데요.”

“전해 드릴 수는 있지만 답이 오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겁니다. 현재 휴가 중이거든요.”

“휴가요?”

“예,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지요. 한 분을 제외하고는 자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유디스가 남았나요?”

기대에 찬 얼굴로 프리아가 수석 시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유디스라면 돌아가지 않고 남아 프리아를 석방시켜 달라며 본궁 앞에서 시위라도 했을지 모른다.

“린드가르트 님의 처소에서 왔던 시녀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더군요.”

“올가 말이군요. 저 대신 시종장님이 잘 챙겨 주세요.”

왔던 곳으로 돌아갔으니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돌아갈 가족이 없다는 말에 가슴이 짠해졌다. 자기주장이 강한 유디스와 밝고 경쾌한 성격의 리브론, 새침한 이사벨과 달리 늘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밤색 머리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름쯤 지나면 돌아올 겁니다. 그때쯤이면 준비가 끝날 테니까요.”

“그렇게 오래요? 무슨 준비를 하는 건데요?”

“차후의 기쁨을 위해 저는 입을 다물도록 하겠습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시종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보름이나 여기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인가. 준비라니. 대체 뭘 준비하는 거야. 프리아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 * *

신기한 마음에 비밀 장치를 눌러 내실과 침실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야기 속 모험하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공간이 자신에게도 있다면 가끔은 유디스의 수다에서 도망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불이 꺼지기를 기다려 벽난로에서 꺼냈던 약은 종이에 싸서 소지품을 담은 상자와 침대 아래 마룻바닥이 어긋난 틈새 그리고 오랫동안 손이 닿지 않아 잘 열리지 않는 서랍 안에 감춰 두었다. 얇은 침의는 주머니를 매달 공간조차 없어 약을 숨기기 어려웠다.

유디스 없이 황제와 단둘이 보내야하는 보름이라는 기간을 생각하자 마음이 불안해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방 안을 서성이며 몇 번이나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내실 벽에 걸린 그림들까지 찬찬히 살펴보고 나서야 해가 지고 황제가 방으로 돌아왔다.

일전에 왔을 때도 생각했지만 이렇게 책이 많은데 정작 자신이 읽을 만한 이야기책은 몇 권 되지 않는 것이 프리아의 불만이었다. 낮에 이미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게 된 프리아가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부산스러운 그의 동작에 맞은편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오웬이 고개를 들었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왜 물어보는 걸까. 생각지도 않은 황제의 질문에 프리아가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무슨 책이지?”

프리아가 책을 들어 오웬에게 겉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여 주었다. 책장에서 꺼내 온 제국의 설화집이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오웬이 말을 덧붙였다.

“열 살 때 읽던 책이야. 오랜만에 보는군.”

마치 프리아가 어린 아이나 읽는 그림책을 본다는 것처럼 말하는 황제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다. 빤히 바라보는 프리아의 시선을 어찌 생각했는지 오웬이 읽던 책을 들어 보였다. 공용어로 쓰이는 제국어 대신 적혀 있는 낯선 이국의 언어에 프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크로히파토스와 제자들이 나눈 토론을 정리한 책이다.”

아, 그러시군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프리아의 표정을 어찌 해석했는지 오웬이 허공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영혼을 무엇이라 정의할 것인가, 존재를 존재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명명인가, 무의식인가. 혼은 육체에 귀속된 것인가, 꿈은 영혼의 자유로운 여행이라 볼 수 없는가, 네발 달린 짐승과 두 발 달린 짐승의 혼의 가치를 동일하게 보아야 하는가, 미물의 자아를 인정한다면 보는 눈과 듣는 귀, 말하는 입이 없는 식물은 어찌 판단해야 하는가.

긴 설명을 끝낸 오웬이 프리아의 의견을 구하듯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정말 좋은 얘기군요. 잘 들었습니다.”

설명이 지나치게 길어 중간에 자신의 영혼이야말로 빠져나갈 뻔했다는 소리는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른 책을 가져와 재미있게 읽는 시늉이라도 해야 이 지루한 철학 강의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리아는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은 후, 상자에서 유디스가 챙겨 준 무용담을 꺼내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건 무슨 책이지.”

자주 읽은 티가 역력한 손때 묻은 책 표지에 흥미를 보이며 오웬이 물었다.

“이건 기사들의 무용담을 엮은 책인데요. 보시겠습니까?”

철학까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만은 보장할 수 있는 애독서다. 프리아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오웬에게 가죽 장정을 두른 책을 건넸다.

“너는 어느 기사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건네받은 책의 첫 장을 펼치며 오웬이 프리아에게 물었다. 유디스와는 취향이 달랐던 탓에 마음껏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프리아가 눈을 빛내며 풀어놓았다.

“저는 기사 막심의 이야기를 좋아하는데요. 잔인한 영주의 학대에 시달리던 귀부인을 구하기 위해 신념과 연모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칼을 빼어드는 그 장면이!”

주군에 대한 충성과 기사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고 사랑에 몸을 던지는 막심을 떠올리자 흥분한 프리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귀부인이라면 영주의 아내인가?”

“네. 가녀린 쥬느비에브의 꽃 같은 자태와 온유한 성품에 반한 막심이 홀로 연모하다 어느 날 쥬느비에브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줍게 돼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감춰 둔 연모를 결국 마상 대회에서 드러내게 되는데요. 그날의 우승자인 막심의 장창에 달린 자신의 손수건을 발견한 쥬느비에브의 가슴이 기쁨으로 떨리는 그 장면이 저는 정말 좋았습니다. 사실 쥬느비에브도 막심을 연모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군. 그러면 영주는 자신의 기사에게 살해당하고 아내도 빼앗기는 거군.”

“그렇기는 하지만 그놈이 얼마나 나쁜 놈이냐면 첫날밤부터 강제로 취하고 틈만 나면 때리고 자유를 빼앗아 시녀들에게서도 고립시킨 채 침실에 가둔…….”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 같은데.

갑자기 입을 다문 프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오웬이 동의했다.

“그래, 죽어 마땅한 놈이군.”

꿀꺽, 눈동자를 굴리는 프리아의 목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그러니까. 크로히파토스가 주장했듯 생명은 소중한 것이 아닙니까. 미물의 목숨도 함부로 빼앗으면 아니되지요. 영주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요?”

우리 영주의 말을 들어 봅시다.

“그의 철학에 동의한다니 내일 강연록을 담은 제자의 저서를 가져다주겠다. 그의 이론에 반박하는 레제논의 논문을 함께 읽어도 좋겠어.”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관대한 표정을 한 오웬이 고개를 까닥했다. 목차를 뒤져 기사 막심 편부터 찾아 읽기 시작하는 오웬의 손가락을 잡아당겨서라도 제지하고 싶은 프리아가 떫은 표정으로 손을 떨었다.

저녁 식사 도중에도 책을 손에 놓지 않던 오웬이 책장을 덮고 일어났다. 기사가 되려는 소년들은 대개 어린 나이에 친척 집으로 보내져 시동 생활을 시작한다. 영주와 기사들의 심부름을 하며 그들에게서 창과 방패, 검 사용법을 익혀 꾸준히 수련한 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수습 기사를 거쳐 정식 기사가 되기 위한 시험대에 오른다.

성년이 되기까지 그들 주변의 여인은 오직 영주의 부인과 딸뿐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우아하고 현숙한 연상의 여인인 영주의 부인에게 모든 흠모와 연정을 바치게 마련이었다. 기사가 등장하는 낭만 소설이라면 금단의 사랑에 가슴앓이하며 짧은 시선 교환만으로 영혼을 내주고, 애끓는 진심을 한 줄의 소네트에 담아 전하는 궁정풍 연애에 이야기의 대부분을 할애하곤 했다.

기사 막심이 문제가 아니다. 영주의 시각에서 보자면 책 한 권 전체가 불륜이오, 배신의 집합체에 다름없었다. 한 번도 영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영주를 넘어서 제국의 주인된 황제의 눈으로 본다면 이 얼마나 불순하고 기만된 이야기 모음이란 말인가.

숨죽인 채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오웬의 움직임에 더욱 긴장했다. 정말 몹쓸 인간들이 아닙니까, 기사 막심을 화형에 처합시다! 평소 흠모하던 이야기 속 영웅을 배신하려고 마음먹은 프리아가 선수를 치기 위해 입을 벌렸다.

“막…….”

빈 의자에 걸쳐 두었던 로브를 집어 드는 오웬의 모습에 프리아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불온서적을 옹호하고 반약자를 찬양했으니 자신에게 화가 나 한 공간에 머물기조차 싫어진 걸지도 모른다.

그대로 나가 버리는 줄 알았던 오웬이 프리아에게로 걸어왔다. 씻지 못해 꾀죄죄한 상태로 자신의 낡은 침의를 입고 있는 프리아의 모습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본 오웬이 걸쳤던 로브를 다시 벗었다. 벗어 낸 로브를 그대로 프리아의 몸에 덮어씌운다. 순식간에 발끝까지 검은 천에 의해 가려진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오웬이 문밖을 향해 고갯짓했다.

“예?”

나가라는 건가? 당장 꺼지라는 건가?

영문 몰라하는 프리아를 답답하게 바라보며 오웬이 입을 열었다.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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