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5)화 (46/237)

한참을 망연히 닫힌 벽 앞에 서 있던 프리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제가 불 속에 던진 옷 안쪽에 약이 담긴 주머니를 매달아 두었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부리나케 벽난로 앞으로 달려가 불 속을 살폈다. 강한 독성을 지닌 약재를 배합해 만든 약이었기에 불에 탔다면 필시 독한 냄새가 피어올랐을 것이다. 코를 킁킁대며 맡아 보았으나 장작 타는 냄새 외에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목을 길게 빼고 난로 안쪽을 살피던 프리아가 구석에 굴러떨어진 동글동글한 환약을 발견했다. 이쪽 구석에 한 알, 저쪽 구석에 두 알, 도합 세 개. 만약을 대비해 상비해 둔 양과 일치한다.

‘휴…….’

작년 한 해 기르가 미리 만들어 둔 약술을 틈틈이 복용한 덕분인지 그동안 발작이 일어나거나 크게 앓는 일이 없었다. 증상이 악화되지 않는다면 환약은 보름에 한 알, 갑작스럽게 증세가 악화된다면 복용량을 두 배로 늘린다. 두 배를 기준으로 한다 해도 남을 만큼 넉넉한 양이었기에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대로 건강해지는 게 아닐까 헛된 희망을 품어 볼 정도로 프리아는 차가운 제국 기후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알몸으로 황제의 밀실에 갇혀 세상을 뜨는 수치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제때 제비궁으로 돌려보내 주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제 무얼 한담.’

돌아올 기미가 없는 황제를 무작정 기다리는 대신 프리아는 다락방을 샅샅이 뒤져 보기로 했다. 몸을 가릴 천이라도 한 장 발견해 내기를 바라면서.

* * *

초조한 발걸음으로 문 앞을 왕복하던 유디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게 분명해요! 이렇게 늦으신 적이 없었는데.”

“호위병을 데리고 다시 장서관으로 가 보는 게 어떨까요?”

리브론 역시 불안한 눈빛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각자 볼일을 끝내고 장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한 프리아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장서관의 사서들에게 수소문을 해 보았으나 모두 시선을 회피하기만 할 뿐 제비궁 주인과 닮은 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보신 이가 없으시다고요? 한 분도요?’

‘오가는 이가 많아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찾으시는 분께서 약속 장소를 잘못 기억하신 게 아닐까요?’

‘아니, 기억 못 할 얼굴이 아니라니까요? 어떻게 그 미모를 몰라봐요. 눈이 멀지 않은 이상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는데.’

‘여하튼 이곳에는 계시지 아니합니다.’

사서들의 멱살을 잡을 뻔한 유디스를 다른 시녀들이 간신히 말렸다. 길이 어긋나 먼저 처소에 가 계신 게 아니냐는 리브론의 말에 유디스가 후궁전 방향으로 뛰었다.

“시종장님께 알려요. 저희 선에서 해결될 일이 아닌 거 같은데.”

후궁이 사라지건 말건 알 바 아니었으나 책임은 피하고 싶은 이사벨이 빨리 알리는 게 좋겠다며 유디스를 재촉했다. 분주한 그들 앞으로 때마침 시종관을 동반한 시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종장님! 프리아 님께서!”

“잠깐, 내 말부터 듣거라.”

유디스의 말을 끊은 시종장이 헛기침을 하며 대동한 시종관에게 손짓을 했다. 시종관이 빈 상자를 열어 유디스에게 건넸다.

“프리아 님은 당분간 폐하의 침전에 계실 것이니 그리 알도록. 챙겨드릴 물건이 있다면 속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예?”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수행 시녀들의 눈이 일제히 크게 뜨였다. 상자를 받아 든 유디스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인다.

“저, 저를 챙겨 가셔야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해 올게요. 또 프리아 님이 좋아하시는 책이랑…….”

“옷은 되었으니 어서 다른 것이나 준비해 오거라.”

“예?”

새 옷을 마련해 주시는 걸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폐하의 취향으로?

허둥대는 수행 시녀들의 뒤에서 후궁전 밥을 오래 먹은 중년 시녀들이 묘한 웃음을 날렸다.

무슨 뜻이겠어. 옷을 입을 일이 없다는 거지.

* * *

‘대체 어디서 찾아낸 건지.’

정무를 마치고 돌아온 오웬이 팔자 좋게 자신의 침대에 잠들어 있는 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여분의 침의가 방 어딘가에 남아 있던 모양이다. 간 크게도 황제의 내실을 뒤져 잘도 꺼내 입었다.

후궁을 처소에 돌려보내지 않기로 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으나 호사가들은 자신이 사내 후궁에게 흠뻑 빠져 있다 여길 것이다. 시종장마저 그렇게 생각하는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후궁의 짐을 챙겨 가져왔다. 벽 너머 내실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오웬은 끼니를 생략한 채 잠든 후궁의 곁에 누웠다.

‘설마 잠들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자신이 돌아오면 후궁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내보내 달라고 소리 높여 항의하거나 눈물로 호소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리 태평하게 잠이 들다니. 생애 절반을 불면과 함께했던 오웬에게는 이런 후궁의 태연자약함이 부럽기도 또 한심하기도 했다.

보고 있으면 자꾸 만지고 싶어지는 이상한 얼굴이다. 흔적이 쉽게 남는 흰 피부가 마치 빈 화지 같아 그 위로 선을 그리고 색을 입히고 싶은 충동이 든다. 소년 시절 황손궁에 놓아두고 길렀던 사냥개가 죽은 이후로 그 어떤 미물도 침상에 들이지 않았다. 후궁의 금빛 머리칼을 매만지며 오웬은 길이 들지 않은 개 한 마리를 데려다 먹이를 주고 가르쳐 버릇을 들이는 과정이라 여기기로 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후각이 자극돼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벽이 열려 있다.

이제 나갈 수 있는 걸까. 신나서 뛰어가던 프리아가 건너편 내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눈을 뜨자마자 달려온 프리아의 모습을 본 황제가 턱짓으로 빈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식은 식기를 치우고 시종장이 다시 준비해 내온 식사는 놀라우리만큼 맛있었다. 거의 하루를 꼬박 굶은 터라 평소보다 많은 양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유디스가 봤다면 손뼉 치며 좋아했을 광경이다.

어제 장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 수행 시녀들의 안부에 생각이 미친 프리아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입을 열었다.

“저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먼저 식사를 마친 오웬이 턱을 괴고 앉아 수프를 두 그릇째 비워 내는 먹성 좋은 후궁을 구경했다.

“네 혐의가 풀릴 때까지.”

혐의. 기가 찬 황제의 발언에 흰 빵을 목으로 삼키던 프리아가 연신 기침을 했다. 금세 눈물이 고인 프리아의 눈가를 바라보던 오웬이 무심한 말투로 덧붙였다.

“처분에 따르겠다더니 말이 많군.”

무슨 처분이 이러한가. 이건 모함이다. 발끈한 프리아가 빵가루가 묻은 입가를 닦으며 황제에게 반박했다.

“여인과도 사통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후궁은 친구조차 둘 수 없는 법인가요?”

세상 어디에 그런 법이 있단 말인가. 폭군이네.

“어떤 친구냐에 따라 다르지. 누구든 우선 내게 허락을 맡아.”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했던 유모와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가르치던 기르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은 없다. 친구가 없던 것은 또래 아이가 드물었던 주변 환경 때문이었지 누군가가 통제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어디서 찾았지? 내가 열다섯에 입던 것인데.”

본시 침의는 헐렁한 법이지만 치수가 맞지 않아 프리아의 어깨선까지 내려온 목둘레선을 쳐다보며 황제가 물었다. 즉위 후 급하게 짐을 옮길 때 딸려 온 모양이다.

열다섯? 스물넷인 자신에게도 이리 헐렁하거늘. 좋아라 찾아낸 침의의 정체를 알게 된 프리아가 크게 입을 벌렸다.

“맘에 들면 그 정도는 입고 있어도 좋아.”

황송합니다, 폐하. 관대하십니다, 폐하. 성군이십니다, 폐하. 이죽거리는 후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자신도 모르게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의식하지 못하면서 황제가 프리아의 전신을 다시 훑었다.

지금 비웃었어?

그간 숱한 이야기책에서 읽었던 반역자의 심정에 공감하며 프리아가 입술을 사리물었다.

“네 시녀들이 보낸 것이다.”

황제가 시선으로 탁자 위에 놓인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제가 이곳에 있다고 말씀을 전하셨습니까?”

사통 혐의를 받아 감옥이나 다름없는 밀실에 감금되었다는 걸 알면 유디스가 적잖이 충격받을 텐데. 놀라고 당황했을 수행 시녀들을 걱정하며 프리아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즐겨 읽던 무용담이 한 권, 손수건이 넉 장, 종이에 싼 구운 과자, 향유, 향유 그리고 또 향유, 향유 열두 병.

유디스 너어는.

그 흔한 언더 튜닉 한 벌 들어 있지 않은 노골적인 구성에 실망한 프리아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른한 오후. 주인 없는 책상에 앉아 책장을 펼치며 졸고 있던 프리아의 귓가에 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저녁을 먹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의문을 품은 프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준비를 마친 시종장이 침실로 건너와 프리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상쾌한 오후입니다, 프리아 님. 다과 준비가 되었으니 이리 드시지요.”

하긴 후궁전에 있었다면 한참 티타임에 열중일 시간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정무가 끝나기에는 아직 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실로 돌아와 있는 황제의 모습에 놀란 프리아가 뒤늦게 몸을 숙이며 예의를 차렸다. 의아해하는 프리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웬이 먼저 찻잔을 들어올렸다.

표면에 녹인 설탕을 발라 굳힌 과일과 크림젤리, 초콜릿이 묻힌 과자가 접시마다 놓이고 금박이 입혀진 찻잔 위로는 맑은 찻물이 떨어져 내렸다. 디저트는 하나같이 맛이 훌륭했지만 정무 시간 도중에 한창 바쁠 황제와 티타임을 가져야 하는 연유를 알 수 없어 프리아는 말이 없는 황제와 만면 가득 웃음을 띤 시종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프리아가 찻잔을 비우기를 기다렸던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문밖으로 사라지는 오웬의 모습을 프리아의 시선이 따라간다.

왜 이러는 걸까요. 시선으로 물어오는 프리아의 의문을 읽은 시종장이 접시를 치우며 대답했다.

“늘 이 시간에 들르실 겁니다.”  

그러니까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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