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3)화 (44/237)

“…….”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후궁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잡혀 있던 손목을 주무르는 것을 보니 꽤 아팠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자 짜증이 치미는 동시에 이상하게도 오웬의 속이 상했다.

“왜 말을 못 하지? 변명할 염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웬의 말에 프리아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뭘 변명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없사온데 무얼 변명하란 말씀이십니까?”

“네가 잘못한 게 없다는 말이야?”

“저는 다만 폐하께서 출입을 허락해 주신 장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 뿐입니다.”

“책을 읽었을 뿐이라고? 그저 단순히 책을 읽고 있었을 뿐이란 말이냐?”

이 눈으로 다 봤거늘.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후궁의 태도에 오웬이 언성을 다시 높였다.

“알훼니아에서는 사내와 더불어 시시덕거리는 짓거리를 책을 읽는다고 표현하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늘 감히 날 속이려 들어?”

시시덕거리다니. 정황으로 보아 사소한 오해가 발생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친구와 담소를 나누다 잠깐 졸았을 뿐인데. 그것을 시시덕거린다고 표현하는 오웬의 비뚤어진 태도에 프리아 역시 속이 상했다. 표정을 굳힌 프리아가 쌩한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간다.

“그런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았다니 그럼 내가 헛것이라도 보았다는 말인가?”

“뭘 어떻게 오해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남 보기에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후궁이긴 하지만 저도 사내입니다. 친우와 교분을 나눈 것뿐이니 곡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친우? 바이런이 말인가? 사람을 사귀어도 하필이면 손이 빠르기로 유명한 바이런이란 말인가. 아무리 관심 없다 하여도 찾아와 마음 두고 있는 정인들에 대한 찬양을 일방적으로 쏟아 냈기에 오웬은 바이런의 장대한 연애 서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와 도대체 무슨 교분을 나누었다는 것인지.

‘품에 안았다 싶으면 순식간에 도망치고 없기도 해.’

분명 품에 안았다고 했다. 도대체 내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것인가.

‘참 매력적이란 말이야. 칭찬을 해 줘도 되레 화를 내고. 말투는 까칠한데 표정은 또 무구하고. 순진한 맛도 있는 반면 아찔한 잔가시도 갖추고 있으니.’

그런 후궁의 모습은 모른다. 자신이 알고 있는 후궁의 모습은 늘 두려워하거나 그의 눈치를 살피고 체념하며 몸을 열어 주는 모습뿐이었다. 자신보다 더 후궁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바이런의 발언에 오웬의 심사가 뒤틀렸다.

“친우라는 자에게 몸을 맡기고, 그 친우라는 자가 어디를 쓰다듬든 입을 맞추든 밀어내는 시늉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으면서 그저 책을 읽었을 뿐이라고?”

“예?”

생각지도 못한 오웬의 발언에 프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니. 설마 사람이 잠든 틈을 타 그런 짓을 할…, 할…, 하고도 남을 자다!

우정의 입맞춤 운운하던 바이런의 농이 그저 단순한 농이 아니었음을 깨닫자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갔다. 절친… 그대는 사형을 면치 못하리.

“설마 자고 있어서 몰랐다. 그런 변명을 하려던 것이면 입 밖에도 꺼내지 말거라. 후궁으로서 제 위치와 신분도 생각하지 않고 외간 사내와 수시로 만났을 뿐만 아니라 제 몸 하나 단속하지 못하고 잠들어 희롱당할 빌미마저 내주었다. 말을 해 보거라. 아직도 변명할 것이 남아 있느냐.”

황제의 말대로 바이런이 그런 짓을 했고, 그 장면을 황제가 보았다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황제의 후궁으로서 몸가짐을 단속하지 못한 죄를 묻는다면 억울하지만, 정말 억울하지만 유죄 확정이었다. 후궁이 된 걸로도 모자라 다른 사내와의 통정을 의심받다니 이 무슨 더러운 팔자란 말인가.

바람을 피울 생각이었다면 진즉 피웠을 것이다. 사방에 널린 것이 여인인데 왜 하필 사내를 골라서 바람을 피운단 말인가. 바이런, 그 작자도 그렇다. 험한 세상 뒷배가 되어 준다더니 뒷배는커녕 저와 나를 동시에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는가. 장난을 치려거든 사람 보지 않는 곳에서나 할 일이지.

‘이제부터 우리는 절친이오. 오늘부터 1일이오.’

날짜마저 헤아려 가며 오늘은 5일, 내일은 10일, 낯간지럽게 굴더니 채 보름도 넘기지 못하고 이 꼴을 맞게 되었다. 느끼하지만 다정하던 사내, 절친 바이런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프리아는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장난으로 한 짓일 겁니다. 바이런 그자는 제가 후궁인 것도 몰랐으며 평소 성격이 짓궂은 데가 있어 농 삼아 그리한 것일 터입니다. 부디 노여움은 저에게 푸시고 그자에게 잔혹한 처벌만은 내리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먼저 신분을 속이고 친구로 지내자고 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후궁이 친근하게 입에 담는 사촌의 이름에 오웬의 속이 다시 뒤집혔다. 얼마나 깊은 사이라고, 얼마나 잘 안다고 ‘평소 성격’ 운운하는가. 신분을 속이고 먼저 친구로 지내자고 청할 정도로 바이런이 마음에 들었던가.

다른 이가 자신 앞에서 바이런의 흉을 보았다면 두 번 듣지도 않고 음해하려는 이를 내쳤을 것이나 후궁이 바이런을 두둔하는 소리만은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한 번으로도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 같다.

“네가 친우라고 주장하는 그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나?”

“의정 대신 대리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의정 대신 대리다. 이 나라의 의정 대신인 페르마 공의 아들이지.”

의정 대신의 아들이었다니. 과연 바이런이 믿는 구석이 있는 이유였다. 부친의 뒷배에 신분 높다는 친척의 뒷배를 더한다면 출셋길이 닫힐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금세 표정이 밝아지는 프리아의 얼굴을 본 오웬이 싸늘하게 웃으며 뒷말을 이어 갔다.

“또한 페르마 공은 내 외숙부이기도 하지. 그러니 바이런은 내 외사촌이 되는 것이다.”

외숙부라니… 외사촌이라니……. 그럼 그 신분 높다던 친척이 바로 황제였단 말인가.

그간 바이런에게 털어놓았던 황제에 대한 시시콜콜한 관심사를 떠올리자 프리아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갔다.

“이제 알겠지?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프리아를 보는 오웬의 눈에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

그래,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꿀꺽, 하고 긴장한 프리아의 목에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이런에게 네 신분을 주치의라고 알렸다지? 그런 재주까지 갖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

주치의는 아니었으나 주치의 노릇을 하기는 했다. 그 알량한 재주로 황제가 앓아누웠을 때 약까지 만들어 먹였거늘. 따지고 보면 바이런을 만나게 된 것도 다 황제 때문이 아닌가. 너! 때문이다. 시원하게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의 신분이 프리아는 새삼 서럽게 느껴졌다.

“한낱 후궁이 신분까지 감춰 사촌 간의 신의마저 흔들어 놓으려 한 것이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마치 자신이 바이런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하기라도 한 것처럼. 점입가경이다. 요부도 모자라 첩자라는 누명까지 쓰게 생겼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작정이지? 대답해 봐.”

결과만 보면 자신이 잘못한 것이 맞다. 애초에 신분을 속이지만 않았던들 이런 사달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단 말인가.

처음엔 그저 일을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으나 재회 이후에도 신분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멀쩡히 사지 달린 사내로서 국력이 약해 황제의 후궁 노릇을 하고 있다는 그런 소리를 어찌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도 숨 쉴 곳이 필요했다. 늘 곁에 있는 시녀들에게 유감은 없었으나 그녀들만으로는 타향에서 지내는 외로움과 수시로 끼치는 허무함, 막막한 날들의 불안을 다 이겨 낼 수 없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유들유들한 얼굴 뒤로 감춰진 속내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프리아는 후궁이 아닌 평범한 사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바이런과 나누었던 소중한 시간을 황제가 흙발로 짓밟고 있었다. 친족 간의 신의를 흔들다니. 참 거창하기도 하지. 어이없고 분하고 억울하고 서러워 눈물이 차올랐다.

“너의 경망스런…….”

경망스러운 행동으로 바이런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아느냐, 모르느냐, 오웬은 그리 말하려고 했다.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일까. 프리아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본 순간 쿵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소리치기 위해 열렸던 입술이 슬그머니 닫히며 겨우 마지막 문장만을 밖으로 꺼내 놓았다.

“……모르느냐.”

대답도 없이, 고인 눈물을 흘려 버리지도 않고 그저 담고만 있는 프리아의 모습에 얹힌 듯 오웬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뭘 잘했다고.

“너의 잘못을 진정 모르겠다는 것이냐.”

태생이 황손이라 누군가를 달래어 본 경험이 없는 못난 사내의 억지 비난이 이어졌다.

“압니다. 제가 다 잘못했죠.”

입술을 깨문 프리아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니 어찌하겠는가.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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