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2)화 (43/237)

사람의 얼굴이 저리 타오를 수 있단 말인가. 황제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분노를 사서는 느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분노하시는 걸까. 그 누구보다 친한 바이런 님이 아니신가. 타인에 대한 불신이 깊은 황제가 외사촌인 바이런에게만은 마음을 터놓고 지낸다는 사실을 궁중 안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가 반역을 도모했을 리 만무하고 아끼는 애첩에 손을 댔을 리도 없는… 아니, 잠깐.

사서가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황제가 걸어가 바이런의 앞에 멈췄다.

“경.”

황제의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차가웠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한 사서가 책장 뒤로 몸을 숨기고 사촌 형제들 간의 대립을 흥미진진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폐하.”

공식적인 자리가 아님에도 경이라 호명하는 황제의 날이 선 태도에 바이런이 빙그레 웃어 보이며 신뢰를 담은 눈빛을 보냈다. 고지식한 사촌이 요즘 들어 업무를 태만히 한 죄를 물어 오는 것으로 짐작했던 것이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보다시피 곤히 잠든 이를 깨울 수가 없어 그러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인가.”

너무 낮은 음성이라 제대로 듣지 못한 질문에 바이런이 반문하며 다시금 웃어 보였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폐하? 외람되오나 소신 듣지 못하였으니.”

“경이 마음에 두었다는 정인이 이자가 맞느냐고 물었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을 굳이 물어 오는 사촌 동생의 태도에 의문을 느낀 바이런이 미소를 거두었다. 조금 전 시선을 마주쳤을 때 미리 대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 미인과 최근 잘되어 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엊그제이지 않은가. 웬일로 장서관에 다 찾아왔기에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짓도 하고, 짓궂은 마음을 섞어 염장이나 질러 주겠다는 심보로 보란 듯이 기르의 이마에 입맞춤까지 해 보였는데.

“그렇습니다, 폐하. 제비궁의 주치의를 맡은 기르라고 하는 자입니다.”

하, 주치의라.

얼토당토않은 대답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바이런이 마음을 주었다던 미인이 자신의 사내 후궁이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번만큼은 진심이라며 호언장담을 하기에 어지간히 빠져 있구나, 라고 여겼을 뿐. 바이런의 입에서 나왔던 그간의 발언을 생각하자 오웬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장서관의 출입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던 후궁의 간교한 부탁도 떠올랐다.

내 등 뒤에서 나의 사촌 형제와 놀아나기 위해 그런 부탁을 한 것인가. 어찌 이리 앙큼한 일을 벌일 수 있는가.

“이자가 자신의 입으로 그리 말했는가? 제비궁 주치의라고.”

“아시는 자가 아니옵니까? 평소 처소를 자주 비운다고 했으니 폐하께서도 본 적이 없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경, 그대는 정.녕.”

차오르는 분노를 잇새로 내뱉으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자가 나의 후궁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냐?”

오웬의 입에서 나온 발언에 놀란 사서가 책장 뒤에서 딸꾹질을 시작했다. 후궁라니, 나의 후궁이라니. 저 금발 머리 사내가 그 소문의 사내 후궁이었단 말인가.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사내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청초한 자라 여겨 일순 음심까지 품었으니. 자신도 모르고 저지른 불경에 사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황제와 의정 대신 대리를 맡은 바이런이 후궁을 두고 대립하다니. 사내를 사이에 둔 사촌 형제 간의 치정극이라니 이보다 더 극적일 순 없었다. 피를 불러왔던 지난 황조의 비극이 사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제국이 멸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라고?”

오웬의 말을 들은 바이런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다. 오웬이 제비궁 주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까지 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않은가. 뒷모습만 보았다고는 하나 머리 길이부터가 다른…….

‘그거 가발이오.’

‘사내에게 장신구를 보내서 뭣하오? 그분은 그런 거 안 좋아하오.’

벼락이 치듯 깨달음이 바이런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르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연달아 떠오르며 퍼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대 친척이 얼마나 신분 높은 분이신 줄은 모르겠으나 후궁 희롱죄로 잡혀 들어간다면 살아서 다시 해를 보기가 어려울 것이오.’

‘폐하께서는 무얼 좋아하시오? 아니, 나 말고 그분께서 궁금하다고 하셔서.’

‘자네 앞이니까 하는 얘기지만 좀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지 않소? 폐하 말이오. ‘나라님 욕하기’ 이거 참 재미나구려. 그대와 친구가 되어서 참 다행이오. 내가 하는 말 누구에게도 이르면 아니 되오. 맹세하시오.’

처음 기르를 만났던 그 밤은 오웬의 간호를 위해 사내 후궁이 본궁으로 와 머물렀던 날이었다. 그렇게 찾아 헤맸어도 쉽게 마주칠 수 없었던 이유가 후궁이었기 때문이라니.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알훼니아 출신 주치의를 만났다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 알게 되었다. 어쩐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미모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목격자가 없다 생각했다. 이런 얼굴이 궁 안에 둘이나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나의 후궁이 그대를 속였다는 말이군. 경은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하나 황제의 후궁을 탐하려 한 죄를 묵과할 수는 없다.”

전에 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오웬이 말을 이어갔다.

“바이런. 경에게 무기한의 자택 근신을 명한다. 내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궁에 출입할 수 없다. 내 명을 어기고 함부로 궁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더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근신이라니 생각보다 관대한 처벌이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지라는 사촌 동생의 엄포를 들은 바이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후궁인지도 모르고 황제 앞에서 탐이 난다, 반했다 노래를 불러댔으니 이를 어찌 수습해야 할지.

기대어 잠든 이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바이런이 한쪽 무릎을 굽혀 황제의 명을 받잡았다.

“소신, 폐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오웬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제 일방적인 구애였을 뿐 제비궁 주인께서는 저를 친우로만 대하셨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친우라.

여전히 잠든 프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바이런을 본 오웬의 표정에 살얼음이 실렸다.

“일어나.”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불구하고 깊이 잠들어 반응이 없는 프리아에게 오웬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어나! 당장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자신을 노려보는 오웬의 시선을 느낀 바이런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프리아를 받치고 있던 손을 뗐다. 모로 기울어지는 프리아의 어깨를 잡은 오웬이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라고 했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천천히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쓰는 프리아의 귓가로 찬물을 끼얹듯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리아!”

오웬이 흔드는 대로 휩쓸리던 프리아의 어깨로 점차 힘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

푸른 눈동자가 깜박이며 천천히 눈앞의 얼굴을 비춰 냈다. 눈앞의 황제를 인식한 프리아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사실이었군. 기르 그대가 정녕 소문의 사내 후궁이었어.

바이런은 자신이 연심을 품어 왔던 상대가 진정 사촌 동생의 후궁이었음을 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는 편력으로 유명한 바이런의 명성에 황제의 후궁을 유혹했다는 대역죄와 친인척의 정인을 탐했다는 파렴치한 죄목이 두 가지나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계신 겁니까?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프리아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오웬에 의해 끌려가기 시작했다.

“폐하!”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본 프리아의 시선 속으로 바이런의 모습이 들어왔다. 프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바이런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는 정중한 인사를 보내왔다. 한쪽 손목은 잡힌 채 다른 편에서 흔들리고 있는 프리아의 손등을 향해 허공에서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한다. 황제의 후궁에 대한 예를 취하는 격식 있는 인사법이었다.

‘알아 버렸구나.’

이로써 바이런과의 우정도 끝이었다. 신분이 알려진 이상 더 이상의 접촉은 괜한 화를 불러오기만 할 것이다. 다시 만나 정식으로 사과할 기회가 있을까.

바이런이 이 일로 인해 오해를 사 황제의 눈 밖에라도 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후궁 중 가장 신분이 높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황제의 권력에 기생하는 존재일 뿐. 황제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정말 미안하오, 절친. 언젠가 꼭 다시 만나서 사과하리다.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하시오. 느끼함도 좀 줄이고 아무한테나 들이대지 말고 부디 잘 지내시오.’

프리아는 신분이 높다는 바이런의 친척이 부디 그의 장담만큼이나 강한 권력을 지닌 ‘뒷배’이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오웬에게 거칠게 끌려가는 프리아의 모습을 바이런이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고르고 골라도 하필이면 황제의 후궁을 골랐단 말인가. 제 아무리 바람둥이로 유명한 바이런이라 해도 소중한 동생의 정인에게 손을 대는 짓만은 할 수 없었다.

언젠가 바이런이 후궁의 이름을 알고 있냐고 물었을 때 그저 얼굴을 찌푸리던 오웬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고 있었군.’

‘프리아’, 그에게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라고 바이런은 생각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원 없이 불러나 볼 것을. 즐거웠던 우정놀이도 오늘로 끝이었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군신과 후궁 신분으로 깍듯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당한 실연이었으나 기분이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 질투와 소유욕으로 불타오르는 속내를 고스란히 내보이는 오웬이라니.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 사촌 동생의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내가 하는 말 누구에게도 이르면 아니 되오. 맹세하시오.’

사나이의 맹세는 금석과 같다. 그간 주치의를 가장해 내보였던 황제에 대한 프리아의 속마음을 바이런은 모른 척해 줄 작정이다. 호기심이 곧 사랑의 시작인 것을.

그리고 지금 보다 시급한 것은…….

“거기, 이름이 뭐지?”

“…….”

“아닌 척해도 소용없어, 사서 아저씨.”

책장 뒤에 숨어 있던 사내에게로 다가가 바이런이 말을 걸었다. 통통한 몸매를 지닌 중년 사내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바이런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름이 뭐야, 아저씨?”

싱긋 웃어 보였다. 여인들에게 가장 잘 먹히지만 의외로 정적들에게도 꽤 효과가 있는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이름을 알려 줘야 내가 제대로 협박을 하지.”

“웨, 웨인입니다.”

“그래, 웨인.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떨고 있는 사내를 향해 바이런은 아낌없는 미소를 선보였다.

“지금 본 것들을 발설한다면 내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그대의 삶이 매우 복잡해지게 만들 거야, 알았지?”

겁먹은 표정의 사서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내 애인이라고 떠들고 다닐 수도 있어. 어때? 좋아?”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바이런에게서 멀어지려 애쓰며 웨인이 비명을 질렀다. 남색이라니 평생 다시는 마음조차 먹지 않을 것이다.

* * *

장서관을 나와 중정을 가로질러 본궁으로, 본궁의 장엄한 계단을 걸어 올라 황제의 침실로, 연결된 내실을 거쳐 숨겨진 다락방으로. 끌려오는 내내 자신을 불러 대던 프리아의 외침을 무시했던 오웬이 등 뒤에서 벽이 닫히는 동시에 잡고 있던 후궁의 손목을 놓았다.

“자, 변명이라도 해 보아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