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단지라도 숨겨둔 것처럼 바이런이 장서관을 들락거리자 이번에는 그가 사서를 노리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헛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사서들은 그저 혀를 쯧쯧 차고 말았을 뿐이나 본인의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일부 젊은 사서들은 혹 자신이 그 대상에 놓인 것은 아닌가,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그분이 어제는 나에게 출출할 때 먹으라며 구운 과자까지 주더이다.”
“빌려가지도 않는 신간 정보를 자꾸 캐묻는 것도 수상하오.”
“허파에 바람 빠진 사람처럼 보기만 하면 실실 웃어 대는 것이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 우리가 아닌 학자 노인네들이 표적이라고는 생각 못 해 보시었소? 그 양반이 정복하지 않은 것 중 이제 남아 있는 계층은 노년뿐이라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오.”
“망측하구려. 그러고 보니 바이런 님께서 한동안 시종장과 유난히 붙어 다니시지 않으셨소?”
“누굴 노리는 건지 후궁전 직원 명부를 알려 달라고 그리 떼를 썼다고 하더이다.”
“후궁전에 손댈 생각을 하다니 후안무치요!”
“장서관 직원 명부는? 넘어가지 않은 것이 확실하오?”
사서들의 수다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나이 어린 신입이 끼어들었다.
“바이런 님이라면 벌써 사귀는 분이 있던데요? 방금도 그 금발 머리 주치의와 붙어 앉아 있는 걸 보고 왔어요.”
“금발이라면 그 알훼니아 사람 말인가?”
청년의 말에 사서들이 일제히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새롭게 장서관 단골이 된 이국 출신 궁인이었다.
“그 양반이라면 좀, 그럴 만하지.”
“하긴 그 나라 사내들이 좀 그쪽이 많지 않소? 돌아가신 황태자 전하에 이어 폐하까지 빠져 계시니.”
“바이런 님이야 원래 남녀를 가리지 않는 분이시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구려.”
“하다 하다 못해 이젠 장서관에까지 오셔서 연애질이구려.”
“모르시나 본데 원래 여기가 연애하기에 참 좋은 곳이라오.”
“책장 뒤에 숨으면 보이지도 않지.”
“지하 서고도 있으니 운우지정을 나눈다 해도 아무도 모를 거요.”
“하긴 나도 우리 집사람과 여기서 연애했지. 혼인하고 나서야 사실 책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고백해 왔지 뭐요.”
대출 부서를 담당하는 결혼 7년차의 사서가 총각 시절 연애담을 털어놓자 미혼이 태반인 젊은 사서들이 오오, 감탄사를 내뱉으며 관심을 내보였다.
“아니, 그런 사연이 있었소? 부인께서는 황손궁에서 일하지 않으셨소?”
“철학, 법학, 의학 가리지 않고 대출해 가기에 학문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는데 빌려 가기만 했을 뿐 펼쳐 보지도 않았다지 뭐요.”
“허어, 작업이었구려.”
“내 그때는 꽤 봐줄 만한 외모였다오. 아무튼 지금은 읽으라고 재미난 이야기책을 가져다 줘도 한가하게 그런 거나 읽을 시간이 있어 보이냐고 되레 화를 낸다오.”
“자녀분이 많으니 그러실 테지. 도와드릴 하녀를 좀 더 들이시는 게 어떻겠소?”
“그러지 않아도 새로 들였는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시선이 가지 뭐요? 사내란 참 본성이 난봉꾼인 게지.”
염소수염을 매만져 가며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의 사서가 황급히 놀라 일어섰다.
“폐하!”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서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아무리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지만 전 황태자 전하에, 폐하에, 후궁까지 언급했으니. 직장을 잃을 것은 물론 황실모욕죄로 실형을 언도받는다고 한들 할 말이 없었다.
폐하를 연호하며 땅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는 사서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황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이런이 예 있느냐?”
“……예, 폐하. 와 계십니다.”
“어디 있느냐?”
이어진 황제의 질문에 사서들이 앳된 신입의 얼굴만 바라봤다.
‘어서 고하거라. 네가 방금 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옆구리를 찔러 오는 상사의 재촉에 청년이 난처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하지만 밀회 중이신 것 같았는데 방해를 하면──.’
‘폐하께서 묻고 계시지 않느냐. 이 칠칠치 못한 것!’
급기야는 정강이를 세게 채이고 만 청년이 억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구전 사가를 모아 둔 서고 안쪽에 계신 것을 좀 전에 뵈었습니다.”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출세욕 높은 중년 사서가 나섰다.
“소신이 담당하는 곳이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발밑을 조심하시옵소서.”
연신 뒤를 돌아보며 굽실거리던 사서가 곁눈질로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또렷한 이목구비가 자리 잡은 얼굴 위로 한 겹 서리가 끼어 있다. 황손 시절에도 어린애가 참 분위기 서늘하다고만 느꼈었는데 이리 다 자란 모습을 보고 나니 그저 서늘한 정도가 아닌 숫제 얼음덩이다. 황손으로 태어나 옷 한 벌 제 손으로 입지 않고 자라온 황족 특유의 오만함이 세상 모두를 제 발 앞에 꿇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결합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철갑을 젊은 청년의 주위로 둘러놓았다.
손 뻗는 곳에 놓여 있어 그저 손가락 한 번 까딱하기만 해도 스스로 품에 안겨올 꽃다운 후궁들을 황제가 왜 버려두고 있는 것인지 모두들 궁금해했다. 사내 후궁을 가까이 하게 된 이후로는 ‘남색 취향이다, 아니다, 그건 연막이고 실제론 전 황손비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라는 소문이 궁 안을 떠돌았지만 황제가 사내 후궁과 함께 있는 모습 한 번 보여 주지 않았기에 궁금증만 더욱 높아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형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 쪽으로 내깃돈을 걸어 둔 사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수와의 불륜을 감내할 정도의 열정이 이 황제 안에 있기는 한 것일까.
저런 얼굴로 사랑을 고백해 온다면 제 아무리 황제가 미남이라고 한들 오금이 저려 도망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의 몸 안에서 흐른다고 하는 푸른 피가 황제의 몸 안에서는 청동으로 변해 굳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때 시인을 꿈꾸었던 중년 사서는 결론지었다.
꺾인 복도를 돌아 몇 걸음 더 걸어가자 건물 안쪽에 자리 잡은 익숙한 서고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제국과 공국뿐 아니라 이국의 전설이나 민담, 구전 사가를 모아 놓은 꽤 규모가 큰 서고였다.
들은 대로 의정 대신 대리 양반이 이 안에서 꽁냥꽁냥을 펼치고 계신다면 그럴 만한 장소는 꽤 여러 곳이 있었다. 간단한 티타임을 위해 외부 테라스에 설치한 나무 벤치라든가,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도록 폭 넓은 소파를 벽 안쪽으로 넣어둔 알코브라든가, 그도 아니면 더는 찾는 이가 없어 생명력을 잃은 유행 지난 대중서적들을 보관해 두는 창고 안……. 설마 아무리 바이런 님이라고 해도 신성한 장서관 안에서 갈 데까지 가 계신 건 아니겠지. 망측한 상상을 떠올린 사서가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 소신이 먼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설사 바이런이 한참 사랑을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모습을 황제 폐하에게 보이느니 사서인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한결 나을 것이라 판단한 그가 창구에서 졸고 있던 부하 직원을 일으켜 세웠다.
“감히 어디서 졸고 있는 게야! 어서 일어나 폐하를 모시지 못하겠느냐.”
사서경력 세 달에 불과한 신입 직원이 상사의 호통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상사의 뒤에 서 있는 방문객의 얼굴이 벽에 걸린 초상화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앳된 얼굴 위로 경악이 번져간다.
“폐, 폐, 폐하!”
서둘러 무릎을 굽히는 신입의 옆구리를 찌른 사서가 귓속말로 바이런의 행방을 물었다. 바이런 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그, 글쎄요. 아, 아까 오셨던 것만은 확, 확실한데……. 어, 어디 계실까요?”
멍청하게 반문하는 신입에게 쯧, 소리 내어 혀를 찬 사서가 몸을 돌려 급히 서고 안쪽으로 향했다. 신입에게 시켜도 될 일을 몸소 하겠다고 나선 까닭은 바이런이 망측한 꼴을 황제에게 보이지 않게 자신이 막아 주었다는 것을 알면 차후 승진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지 않을까 하는 얕은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넓은 소파 위에는 나이 든 학자만이 홀로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이었다. 학자가 소중히 품고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곳에 없다면 다음은 테라스이거나 창고일 것이다. 먼 테라스까지 가기 전에 사서가 바이런을 발견했다. 지방의 구전 설화를 모아 둔 커다란 책장 앞에서였다.
햇볕 드는 창가 아래 다리를 펴고 앉은 금발 머리 사내가 바이런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복식으로 보아 사내임이 명백했지만 몸 선이 곱고 얼굴이 작아, 체격이 좋은 바이런에게 기대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울렸다.
‘호오, 이건 꽤…….’
이 정도로 아름다운 사내라면 과연, 음심을 품을 만하다고 사서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금발 미인을 칭송해 대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햇빛을 받아 꿀처럼 흘러내리는 저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마음껏 희롱하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사서의 시선을 눈치챈 바이런이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사내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웃옷을 세심한 손길로 다시 걸쳐 주더니 그가 보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보고 있자니 덩달아 가슴 설레는 바이런의 애정 행각에 사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상황에 폐하께서 오셨다는 말을 어찌 전해야 할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사서가 마른 침을 삼키며 뒷걸음쳤다.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폐하를 다른 곳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
‘어이쿠!’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등 뒤로 부딪치는 것이 있었다. 눈치 없는 신입이 폐하를 모시지 않고 예까지 따라온 것인가 싶어 한소리 하기 위해 돌아선 사서가 예상하지 못했던 이의 등장에 놀라 입을 벌렸다.
“폐하!”
차갑다고, 서리 낀 얼음장 같다고 했던가? 그날 사서는 청동으로 된 황제의 얼굴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안에 숨겨진 것은 푸른 피가 아닌 펄펄 끓는 용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