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40)화 (41/237)

저녁이 되어서야 처소로 돌아온 프리아를 유디스가 반갑게 맞았다.

“프리아 님, 저희가아. 빨리 돌아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요. 저희는 정말 돌아가고 싶었는데 말이죠.”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을 한 프리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됐어.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잖아.”

“아니에요, 프리아 님. 저희에게는 전혀 숨겨진 의도 같은 거 없었구요. 참, 프리아 님. 바구니랑 요는 거기다 두고 오신 거예요?”

“바구니?”

아아. 뒤늦게 기억난 듯 프리아가 난처한 얼굴을 해 보였다.

“미안, 놓고 왔어. 다른 길로 오느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어.”

“괜찮아요. 그까짓 거. 누가 가져다가 알뜰하게 쓰겠죠. 좋은 일 했다 쳐요.”

“그래.”

“프리아 님 피곤하세요?”

“……아니.”

평소보다 반 박자 느리고 짧은 대답에 유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걸어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나. 어서 저녁을 챙겨 드리고 쉬게 해 드려야겠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프리아의 옷 수발을 들기 위해 바짝 다가선 유디스가 구김이 많아진 외출복의 상태에 의문을 표시했다. 젖었다 다시 마른 흔적이 역력하다.

“입고 수영이라도 하신 거예요? 좀 벗으시지.”

“어?”

프리아가 깜짝 놀라 반쯤 감고 있던 눈을 크게 떴다.

“왜 이렇게 놀라세요? 제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닌데.”

“물에 빠져서 말려 입었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뒤집어 입으셨어요.”

“아, 오두막에서…….”

“오두막이요?”

거기 오두막이 있었던가. 폐하가 데려가셨겠지.

프리아의 동작이 멈췄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팔을 빼내던 상태 그대로 고장이 났다.

마저 벗기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던 유디스의 손도 멈췄다.

등 한가운데 순흔이 잔뜩 피었다. 예쁜 꽃이다.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셨나 봐요.”

유디스를 등지고 선 프리아의 귀 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응.

속삭임처럼 작게 대답이 들려왔다.

* * *

“기르, 여기 그대가 좋아할 만한 무용담이…….”

펼쳐 들고 있던 책의 한 페이지를 가리키며 고개를 돌리던 바이런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곁에 앉아 이야기책을 독파해 내고 있었던 기르가 어느 결에 소리도 없이 잠들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황실록을 미끼로 절친이 된 이래 꾸준히 장서관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꼬셔 낼 기회를 잡기 위해 친구가 되자는 제안을 했던 바이런이었지만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차를 마시며 잡다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우정 역시 착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앞으로 그리만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입에 발린 소리라도 할작시면 손사래를 치며 입을 막아 대는 통에 결정적인 구애의 말은 잠시 미뤄 두었다.

금은보화를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 사서를 매수해 책 안에 넣어 선물한 사파이어 브로치와 순금 책갈피 또한 따끔한 호통과 함께 돌려받았다. 다신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기르의 거절을 일단 받아 주는 척 하기로 한 바이런은 은밀한 루트를 통해 입수한 의학서적과 귀한 약재 등을 선물함으로써 기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었다.

최신 인체 해부도가 그려져 있어 궁정의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수입 서적을 건네주자 기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일과 사생활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오, 나는. 휴식 시간에서까지 이런 걸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소. 으음, 이게 정녕 사람 속… 아, 아니오.’

주치의라더니 혹시 외모로 뽑힌 것이냐며 농을 걸자 발끈하며 나름대로 10년간 수련까지 쌓았다며 반박해 왔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오? 궁정의라고 뭐 더 나은 처방을 내려 줄 것 같소? 고뿔에는 생강차 달인 물이 최고요. 열이 나면 거기에 마리포사를 추가해서 달이고. 아무튼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그러면 된다오.’

감기 기운이 있다, 팔다리가 쑤시다, 이곳저곳이 아프다며 꾀병을 부리는 바이런에게 열심히 궁리한 처방을 내려 주는 기르의 열중한 얼굴을 바라보는 일 또한 일상의 즐거움이 되었다.

사소한 취향까지 캐묻는 바이런과는 달리 기르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오직 세 가지, 이야기책과 황제의 동태와, 제비궁 주인에 대한 뜬소문이었다. 오늘은 황제가 누굴 만나 어떠한 일을 했다더라, 저녁으로 무얼 먹었다고 하더라 하는 시시콜콜한 화제에까지 귀를 쫑긋 세우며 어떻게든 자신이 모시는 후궁에게 도움 되는 정보를 알아가기 위해 애쓰는 절친이 기르는 더욱 마음에 들었다.

‘아는 여자 많소.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요.’

딱 봐도 여자라고는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숙맥이면서 이성 친구가 많다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몇 달 전에야 겨우 총각 딱지를 뗀 고귀한 사촌 동생도 기르 앞에서는 궁에서 제일가는 숙맥 자리를 내줘야 할 성싶었다.

힘쓰는 일이라고는 해 보지도 못했을 여린 몸으로, 제비궁 주인에 대한 객쩍은 농을 바이런이 흘릴 때면 ‘넘보지 마시오!’ 주먹을 움켜쥐며 엄포를 놓는 모습이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의 반응이 재미있어 바이런은 부러 제비궁 주인을 입에 올리곤 했다.

‘후궁께서도 그대처럼 머릿결이 부드러운가. 일전에 먼발치서 뒷모습만 뵈었는데 풀어 내린 머리채가 금실처럼 아름다웠소.’

‘그거 가발이오. 만져 보니 뻣뻣하더만.’

‘제비궁 주인께 장신구 하나 선물해 드리려고 하오만 어떤 게 좋겠소?’

‘사내에게 장신구를 보내서 뭣하오? 그분은 그런 거 안 좋아하오. 먹을 거나 보내시오.’

‘특별히 좋아하시는 게 있는가? 혹시 과자를 좋아하시나?’

‘없어서 못 먹소. 시녀들의 입이 많아서 늘 부족하다오.’

‘그러면 기르 자네는?’

‘난 식사만으로 충분하오.’

‘그대가 마른 이유구려. 살집이 좀 있어야 안는 맛이 있는데. 후궁께서도 그대처럼 말랐소?’

‘변태 같은 질문 좀 하지 마시오. 그대 친척이 얼마나 신분 높은 분이신 줄은 모르겠으나 후궁 희롱죄로 잡혀 들어간다면 살아서 다시 해를 보기가 어려울 것이오.’

‘하긴 그것만은 사촌이 손을 써 줄 수가 없을 듯하군. 수감되면 면회 와 주겠소?’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그리된다면 우리에게는 절교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기르 그대, 사랑의 묘약 같은 것도 만들 수 있소? 내 긴히 쓸 데가 있는데.’

‘그런 건 상술일 뿐이오. 날 그런 돌팔이로 보는 거요?’

‘화내는 입술이 참 탐스럽소. 우정의 의미로 한번 맞대 보면 어떻겠소?’

‘맞대는 건 좀 그렇고 한 대 맞는 건 어떻소?’

꾸벅꾸벅, 기르의 고개가 가슴에 닿을 듯 아래로 꺾이기 시작한다.

열 권이나 되는 사가를 3일 만에 독파해 내겠다며 투지를 불태우더니 빌려갔던 책을 읽느라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었다.

편히 잘 수 있도록 바이런이 기르의 무릎 위에 놓였던 책을 치우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쳐 주었다. 붙어 앉은 까닭에 가까이 닿아 있던 기르의 몸이 점점 숙여지며 머리가 바이런의 어깨 위로 얹혔다. 턱 밑에서 규칙적인 호흡이 들려온다.

햇살을 받은 기르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이런의 어깨를 부드럽게 찔러 왔다.

간지럽군.

실로 오랜만에 심장마저 간지럽히는 연심이 바이런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장서관에 가 계십니다. 돌아오면 찾아뵈라고 여쭐까요?”

시종관의 말에 오웬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것 없다. 내 마침 그곳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행궁 기간 동안 밀려 있던 접견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주를 보냈던 오웬이 황실록을 보았다던 바이런의 말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자신 역시 황실록의 한 페이지로 남아 흐릿하게 퇴색될 것이다. 위선으로 가득 찬 친족들의 초상화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장서관의 낡은 서고 속에 몸을 숨기고 책 속에 빠져들던 소년 시절이 못내 그리워졌다.

즉위한 이래 업무에 바빠 한동안 들르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잡다한 분야의 책을 쌓아 두고 묵묵히 읽어 내려가는 것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 온 오웬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최근 들어 불면의 밤이 이어지고 있다. 행궁에서 보낸 마지막 밤 이후로 눈을 감으면 태연자약하게 뛰어내리던 후궁의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문장이 난해하기로 유명한 고대 철학자의 저서라도 찾아 읽다 보면 잡생각이 달아날 것이다. 그리 생각한 오웬이 걸음을 서둘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