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9)화 (40/237)

“먹으려고 가져온 게 아닌가?”

황제의 손이 향유병을 감춘 프리아의 손등을 지나 흰 빵 위로 안착했다. 아무렇지 않게 빵을 입가로 가져가 씹기 시작하는 황제를 보며 프리아가 천천히 바구니에서 팔을 빼냈다.

못 봤겠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하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향유병을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에 숨겼다. 기회를 틈타 호수 밑바닥에 아예 수장시킬 작정이다.

고요한 가운데 음식물 삼키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가능한 남은 행궁 기간, 사내 후궁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 자신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한 낯선 감정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남지 않은 모양이군.’

사내 후궁 또한 그가 불편한 듯 시선을 부딪치려 들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깐 후궁의 흰 뺨을 내려다보며 오웬은 그때 왜 그토록 화가 났던 것인지 그날의 풍경을 다시 떠올렸다. 사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는 암흑으로 물들고 발밑은 허공으로 변했다.

자신은 이 사내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누구를 본 걸까.

시종장님, 제가 먼저 자리를 떠도 될까요.

유디스,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시종장과 유디스, 최측근인 두 사람의 바람과는 달리 불편하기만 한 이 현장에서 프리아는 어서 달아나고만 싶었다. 배라도 탈까? 저거 타고 도망갈까?

아까부터 사내 후궁의 시선이 호숫가에 멈춘 나룻배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 일찍 자리를 파한다 해도 시종장이라면 또 쓸데없는 짓을 계획해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낸 후에 환궁하기로 마음먹은 오웬이 앞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는 거지?’

긴 다리로 성큼 걸어간 황제가 뒤집혀 있던 나룻배를 바로 세웠다. 물이 샐 만한 구멍은 없나 꼼꼼하게 배를 살핀 오웬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프리아를 향해 턱짓했다.

“안 탈 건가?”

엉겹결에 타기는 했는데.

해는 너무 뜨겁고 노는 물귀신이 매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겁다. 자꾸 노를 놓쳐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하는 프리아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 또한 따가웠다.

‘제가 하겠습니다.’

사공을 자처하는 프리아의 말에 황제는 묘한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 후, 순순히 노를 넘겨주었다. 그 표정을 비웃음으로 해석한 프리아가 보란 듯 노를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저만 사내인가.

기르와 함께 공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나룻배도 여러 번 타 보았지만 대부분 사공이 있었고, 빈 배일 경우에는 기르가 노를 잡았다.

‘나도 하고 싶어! 나도 할래! 내가 할래!’

‘쓸데없이 힘 빼지 마세요. 배 꺼져도 다음 식사 시간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드리지 않을 테니까요.’

힘들기야 하겠지만 배가 꺼질 정도일까? 프리아는 기르의 판단을 우습게 보았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었다. 노를 잡은 팔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공들마다 팔 근육이 장난 아니더라니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뭍을 떠나고 꽤 시간이 흘렀는데 나룻배는 아직도 강기슭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미덥지는 않지만 노를 달라하기에 내어 주었더니 하는 짓이 아주 가관이다. 고정쇠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노를 잃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늘 높이 떠오른 여름 해가 한껏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해를 받아 더욱 밝아진 후궁의 금빛 머리칼이 땀에 젖은 채 이마 언저리에 달라붙어 있다. 발갛게 상기된 두 뺨으로 연신 땀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호흡마저 격해져 숨을 몰아쉬는 후궁의 모습을 보다 못한 오웬이 노를 빼앗아 들었다.

덮치는 줄 알았네.

갑자기 다가온 황제가 프리아의 몸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이대로 덮쳐지는 건가 생각했다. 눈을 감은 프리아의 얼굴 위에서 황제의 말이 들려왔다.

“느려.”

그래, 내가 좀 느렸지. 느리기는 했지.

순식간에 호수 중앙으로 향하는 뱃머리를 바라보며 프리아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힘든 기색도 없이 황제는 빠르게 노를 저어 수심 깊은 곳으로 프리아를 데려갔다.

기력을 소진한 프리아는 등을 외판外板에 기댄 채 호수면을 바라보았다. 잔물결이 튀어 올라 전설 속 드래곤의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은 두 연인이 호수에 머무는 시기일까.

팔의 윗부분까지 소매를 접어 올려 맨살을 노출시킨 황제가 거침없이 노를 저었다. 황제가 노를 저을 때마다 팽팽하게 근육이 솟아오른 몸체가 가까이 다가왔다 빠르게 멀어져 간다. 저 넓은 어깨와 단단한 두 팔, 강인한 허리와 탄탄한 허벅지를, 프리아는 알고 있다. 몸을 겹쳐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밀한 그 무엇. 그 아찔한 깊이가 자꾸 떠올라 눈부신 해를 핑계 삼아 눈을 감았다.

물속을 휘젓는 노처럼 황제가 프리아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언제 잠들었던가.

등줄기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눈이 뜨였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황제의 잠든 얼굴에 정신이 확 들었다. 황제가 프리아와 얼굴을 맞대고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여름이건만 느껴지던 한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룻배는 어느새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 나무 그늘 속에 잠겨 있었다. 해가 내리쬐는 곳은 따갑도록 무더웠지만 그늘 아래 서면 청량감을 느낄 만큼 시원했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밀착된 황제의 얼굴에 놀란 프리아가 순식간에 몸을 일으켰다. 좁은 나룻배 안에서 거리를 벌리려 애쓰다 그만 중심을 잃고 만다.

“어, 어… 어어엇!”

무게 중심이 무너진 나룻배가 뒤집히며 품고 있던 손님을 토해 냈다.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수면에 파도가 친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잠을 깨운 이는 없었다. 감히 황손에게, 황제에게 물을 끼얹을 생각을 할 간 큰 인간이 있었겠는가.

“…….”

강기슭에 거의 도착해 있던 것이 아니었다면 영문도 모른 채 호수 속 드래곤의 먹이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달을 일으킨 후궁, 프리아가 강기슭에 잠긴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으로 오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송, 송구합니다! 폐하!”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오웬이 프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접근하는 손이 자신을 때릴 것이라 생각하는지 질끈 눈을 감고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에 오웬의 미간이 한 줄로 좁혀졌다.

“수영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만 나가지.”

프리아의 손을 잡아 일으킨 오웬이 먼저 호수를 빠져나왔다. 수많은 연인들과 뱃사공, 어부와 멱 감는 이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며 자리를 지켜 온 느티나무가 찌는 듯한 해를 제 몸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대로 별궁으로 돌아가려던 오웬이 느려지는 프리아의 발걸음에 멈춰 섰다. 함께 물에 빠졌으나 오웬보다 몸이 약한 프리아가 그늘의 한기를 견디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몸을 녹이고 옷을 말릴 곳이 필요했다.

소년 시절, 사냥을 나설 때면 길잡이가 되어 주던 산지기의 오두막을 떠올린 오웬이 풀숲으로 걸음을 틀었다. 영문을 모른 채 서 있는 프리아의 손을 오웬이 잡아끌었다.

“폐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별궁은 반대쪽인데요?”

오웬이 입을 열지 않자 프리아도 입을 다물었다. 그늘에서 벗어나자 다시 뜨거운 여름 해가 두 사람을 쫓아왔다. 수풀이 무성한 짐승의 길로 오웬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인지 산지기의 오두막은 둥지를 튼 새들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혹 굴뚝에 집을 지은 새가 없나 확인한 오웬이 창고에서 불을 피울 장작을 가져왔다. 묵은 것이라 그런지 불은 잘 붙지 않았다. 오웬의 서툰 솜씨를 보고 있던 프리아가 벽난로 앞으로 다가와 모여 있던 장작을 떨어뜨려 바람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몇 번이나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키고서야 장작에 불을 올릴 수 있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굴뚝을 빠져나갔다.

“젖어 있어서 그래요. 습기 먹은 나무는 여간해서 불이 붙지 않거든요. 금방 꺼질 수 있으니 불쏘시개가 필요해요. 벗겨낸 나무껍질이나 장작을 잘게 쪼개 준비해 놓으면 좋죠.”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지? 오웬의 묻는 듯한 시선에 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서 숙박을 해결할 때가 가끔 있었거든요. 불은 워낙 오래전부터 피워 봐서 익숙합니다.”

곱게 자란 대공의 아들이 노숙할 일이 뭐가 있을까. 기사단에 들어가 수련한다면 응당 겪어야 할 일이었겠으나 눈앞의 후궁은 그리 험한 일을 견딜 성싶지 않았다.

“공국의 살림이 부족했던가?”

비아냥인가 싶어 샐쭉한 표정을 짓던 프리아가 오웬이 진심으로 묻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좀 유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다. 기르를 따라 공국의 야산이라면 다니지 못한 곳이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저를 돌봐 주신 분과 약초 캐러 산에 자주 갔거든요. 꽤 엄격하신 분이긴 해도 그분 밑에서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스승이자 보모이자 주치의였던 기르를 떠올리며 프리아는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많이 화내겠지만 결국엔 자신을 도와주러 찾아와 줄 것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야단만 맞게 되어도 좋다. 기르를 만난다면 쌓인 투정과 함께 그간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들려줄 것이다. 프리아에게 있어 기르는 부모이자 친구이자 단 하나뿐인 스승이었다.

마침내 순조롭게 타오른 불이 벽난로 주변으로 열기를 내뿜었다. 젖은 옷을 벗기 위해 오웬이 일어서자 당황한 프리아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감기 들지 않으려면 벗는 게 좋을 거야.”

차라리 감기에 걸리는 편이 낫겠다. 훤한 대낮에 황제 앞에 알몸으로 나설 자신이 없다. 전과는 다르게 자꾸 의식되기까지 해 아무렇지 않게 몸을 내어 줄 수도 없었다.

“에취!”

타이밍 좋지 않게 터져 나온 재채기에 오웬이 미간을 찌푸렸다. 압력을 주는 것처럼 응시해 오는 시선에 프리아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왜 이렇게 자꾸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처음 알몸을 보는 것도 아니고 색사도 여러 번 치러 낸 사이가 아닌가. 한기 때문인지 손끝이 떨려 단추가 잘 벗겨지지 않았다. 미끄러진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끈을 붙잡고 늘어졌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머니가 떨어지고 열린 입구로 향유병이 빠져나와 발밑을 굴러갔다.

발끝에서 멈춘 유리병을 오웬이 집어 들었다. 프리아의 얼굴이 술에 취한 것처럼 순식간에 붉게 물든다.

“……그건.”

“그건?”

유디스가, 제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유디스가.

진작 호수 바닥에 수장시켜야 했는데. 어쩌자고 저걸 가지고 있었을까.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까? 알아차릴까?

알아차리고도 남는다. 하필이면 표면에 몸을 겹친 연인들의 요약화가 그려져 있어 누가 봐도 용도를 모를 수가 없는 디자인이었다.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오웬이 프리아에게 향수병을 건넸다. 정말 모르는 건가? 안심한 프리아가 병을 건네받았을 때 오웬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영문 모를 표정으로 프리아가 오웬의 품에 쏟아진다.

“쓰려고 가져온 게 아닌가?”

프리아의 얼굴이 불을 뿜었다. 이러다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숙맥이라더니. 마음부터 가야 한다더니. 절친의 정보는 완전 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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