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8)화 (39/237)

“프리아 님!”

잘못 울린 심벌즈처럼 아래쪽에서 유디스의 목소리가 쨍하고 들려왔다. 돌아갈 시간이다.

공연히 밑을 내려다보면 아무리 대범한 사람이라도 발이 떨리기 마련이다.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프리아가 조심히 발끝을 가지 위로 내디뎠다. 한 아름이 넘는 나무 기둥이 마치 기르의 품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바닥이 가까워오자 눈대중으로 높이를 가늠한 프리아가 땅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꺄악! 프리아 님!”

“프리아 님!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왜 이렇게 저희를 힘들게 하시는 거예요? 간이 콩알만 해졌잖아요.”

아직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자신들의 야단에도 개구쟁이처럼 눈을 접으며 웃어 보이는 프리아에게 시녀들이 거센 항의를 쏟아 냈다.

“너무하세요옷!”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셨어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미안. 많이 놀랐어?”

유디스의 이마로 손을 뻗은 프리아가 웃으면서 시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 위에 되게 기분 좋다? 호수까지 한눈에 내려다보─.”

말을 이어가던 프리아의 입술이 짝, 하는 마찰음과 함께 옆으로 돌아갔다. 부지불식간에 뺨을 얻어맞은 프리아가 망연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이것은 분노인가. 아니면…….

후궁의 뺨을 스치고 돌아온 자신의 손바닥이 여전히 떨리고 있는 것을 오웬은 느낄 수가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후궁의 모습을 본 순간, 경거망동한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서 내려오라고 명령하기 위해 다가선 오웬의 머리 위로 푸른 잎새가 소란스럽게 떨어져 내렸다. 늘씬한 두 다리가 오웬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올려다본 순간 무릎까지 하의를 걷어 올려 희게 드러난 종아리와 발목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무 위에서 내려오는 후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숨마저 죽인 채 지켜보았다. 후궁이 머리 위에서 땅으로 뛰어내리던 순간.

붉은 여우의 환영이 오웬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휘청이던 후궁이 곧 몸을 바로 세우고 기분 좋은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저 위에 되게 기분 좋다? 호수까지 한눈에 내려다보─.’

죽지 않았다. 다음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 이리 위험한 행동을 하는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후궁의 뺨을 거세게 내리치고 난 후였다.

“……폐하?”

후궁이 멍한 표정으로 오웬을 올려다보았다.

이 밉살스러운 얼굴을, 늘씬한 다리를, 흰 목과 팔, 두 뺨 그리고 입술을.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 무슨…….’

발밑이 아득히 꺼져 간다.

손끝을 떨며 오웬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근신하도록.”

차갑게 말을 뱉은 황제가 돌아서 프리아에게서 멀어져 갔다.

소리 소문도 없이 언제 와 있었단 말인가.

단둘이 있는 침실도 아니고 수행 시녀들이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손찌검을 당한 프리아가 애써 태연해 보이기 위해 입술을 깨물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화가 많이 났나 봐. 그치?”

“프리아 님, 괜찮으세요?”

나무 위의 프리아에게 신경 쓰느라 황제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스스로를 책망하며 유디스가 눈물을 글썽거렸다. 너무했다. 아무리 폐하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보는 이들이 있는 앞에서 손찌검 하다니.

“빨리 냉찜질을 해야겠어요.”

“얼음이 있는지 주방에 물어보고 올게요.”

표정이 굳은 이사벨과 리브론이 얼음을 핑계로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황제를 동경해 오던 소녀들이었으니 더욱 충격이 클 것이다.

가냘픈 레이디도 아니니 그깟 뺨 한 대 맞았다 한들 화끈한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나 이게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이었는지 프리아는 황제의 역정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긴 언제는 황제가 자신을 이해시키면서 행동한 적이 있던가. 제멋대로 찾아오고 제멋대로 발길을 끊고,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었다.

황제는 기억조차 하지 못할 밤을 함께 보낸 이후로 프리아는 자꾸 그가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밤 울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지.

어째서 그간의 강도 높은 폭력보다 이 뺨 한 대가 더 서러운 걸까.

좋아서 저를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황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프리아는 그때야 깨달았다.

* * *

“이상하네, 여기가 아닌가?”

인적 하나 없는 호숫가에 선 시종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능청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송구합니다, 폐하. 늙은이라 이제 저도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오늘이 아니라 내일인가? 모레인가?”

어쩐지 이상하다 생각했다. 갑자기 일정에도 없던 야회 낭송회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며 시종장이 오웬을 재촉해 온 것이다. 오는 도중 악사들이며 음유시인 한 명 보이지 않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허술한 연극을 펼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왕 이렇게 나오셨으니 호수 경치라도 감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날이 참 좋습니다. 수면을 박차고 날아가는 저 도요새 한 쌍을 보십시오. 참 정답지 않습니까.”

‘한 쌍’ 운운해 대는 것을 보니 뻔하다. 저 수풀 뒤에 열렬한 사모를 고백해 올 귀부인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이런 우연이……. 여기서 뵙게 되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놀라워라! 서푼짜리 연극을 이어가며 시종장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프리아 님도 와 계셨군요.”

거대한 나무 그늘 아래 사내 후궁, 프리아가 놀란 눈으로 오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늘 곁을 지키던 시끄러운 시녀 아이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시종장의 은밀한 협조자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명백했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오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시종장이 후궁에게로 다가갔다. 풀밭 위로 두툼하게 깔린 천과 음식이 담겨 있을 바구니, 물주전자와 잔을 보니 호수를 배경 삼아 소풍 나온 연인 행세라도 시킬 모양이다.

“두 분이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역시 마음이 통한 사이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프리아 님 알고 계셨습니까? 이 칼리 호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답니다.”

호수 밑바닥에 살며 마을 사람들을 잡아먹던 뱀이 달에서 내려온 신과 사랑에 빠졌다. 한 계절 사랑을 나누고 천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신의 뒤를 쫓아 물 밖을 뛰쳐나온 뱀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갔다. 여신의 눈물이 뱀의 비늘에 떨어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허물이 벗겨진 자리에 나타난 것은 푸른빛의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부부가 된 그들은 지금도 천상과 칼리 호를 오가며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전설 때문인지 수려한 호수 경관 때문인지는 몰라도 연인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늦여름이라는 눈부신 계절에 이토록 한적할 리가 없는 장소다. 시종장의 지시를 받은 경호병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또 깜빡했네. 폐하, 저는 한발 앞서 궁으로 먼저 돌아가 있겠습니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지 뭡니까. 그러면 두 분 부디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시기를 이 늙은이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프리아 님, 먼저 자리를 뜨는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경쾌한 발걸음으로 퇴장한 시종장이 먼 거리에서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혔다. 얼결에 손을 흔든 프리아가 앉은 자리로 다가오는 오웬의 행동에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나무에 올라갔다는 이유로 황제에게 봉변을 당했던 프리아는 아직 그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칼리 호에 꼭 가 보고 싶다며 아침부터 졸라 대는 시녀들의 등쌀에 못 이겨 끌려왔는데 하필 황제와 마주칠 게 뭐람.

‘여기가 명당자리래요. 보세요,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죠?’

‘명소라더니 뭐 볼 것도 없네요. 저희 영지에는 더 큰 호수가 있거든요.’

‘그러시구나, 물어본 적 없는데. 그런데 이사벨 님 뭐 잊으신 거 있지 않아요??’

‘에휴, 알았어요. 어머나, 이럴 수가! 저 오는 길에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 같은데 너무나 소중한 물건이라, 찾으러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아이고, 그런 일이. 어서 가 보셔야겠어요. 아참, 리브론 님, 저희 식사 준비 제대로 해 온 게 맞을까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맙소사! 2인분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뭐라구요? 어머나! 정말. 2.인.분이네요. 2.인.분. 프리아 님 저희 궁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놓고 온 게 있어서요.’

‘나 혼자 있으라고? 점심이야 나눠 먹고 돌아가서 더 챙겨 먹으면 되잖아. 너희들 먹어, 나 배 안 고파.’

‘그럴 수는 없어요! 프리아 님은 살 좀 찌우셔야 한다고요. 저희 금방 다녀올 테니까 여기 계세요. 다른데 가 계시지 마시고요.’

쫓기는 사람처럼 유디스와 수행 시녀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멀리서 걸어오는 시종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를 따라 모습을 드러낸 키 큰 사내의 모습에 놀란 프리아가 나무 뒤로 모습을 숨겼다. 굳이 나무를 한 바퀴 돌아 숨어 있던 프리아를 발견해 낸 시종장이 들뜬 목소리로 황제를 불러왔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과연 수행 시녀들이 제 시간에 돌아오긴 할까. 짠 것처럼 연이어 모습을 감춘 시녀들과 시종장이 프리아는 의심스러웠다. 초조한 마음에 부산스레 양손을 매만지던 프리아가 바구니로 손을 뻗었다.

‘뭐가 들어 있는지 보자.’

흰 빵 두 덩이와 먹기 좋게 썬 치즈와 훈제 소시지, 구운 타르트 한 판과 복숭아 두 알 그리고 포도주 한 병과 함께…….

‘유디스 작정했구나.’

망측하게도 향유병이 미끈한 몸체를 자랑하며 접힌 손수건 위로 놓여 있었다. 향유를 보자마자 떠오른 그 밤의 기억에 프리아의 귓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꺼내.”

여기서요? 이렇게 갑자기?

황제의 시선이 바구니로 향했다. 방황하는 프리아의 눈동자가 향유병과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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