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7)화 (38/237)

“폐하의 성은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우승자를 치하하는 오웬의 말을 들은 기사가 감격한 얼굴로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눈여겨보던 기사의 선전에 만족한 영주가 흐뭇한 얼굴로 휘하에 있는 기사의 이력을 황제에게 고했다. 아끼는 막내딸의 혼처로 점찍어 두었는데 이렇게 황제의 눈도장까지 받고 나니 더는 혼인을 미룰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부친의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소녀가 곁눈질로 황제의 얼굴을 살피며 볼을 붉게 물들였다. 궁술 대회가 끝나고 이어진 연회에 참석한 귀족 소녀들은 젊고 아름다운 황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꿈 깨시지. 프리아 님이 이렇게 멀쩡히 앉아 계신데. 감히 누굴 넘봐.

속이 들여다보이는 그녀들을 노려보며 유디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자고새의 배 속에 칼을 내리꽂았다. 배를 갈라 채소로 속을 채우고 꿀에 재워 화덕에 구워 낸 새 요리는 맛이 일품이었지만 심기가 상한 유디스에게는 화풀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어째서 프리아 님을 제치고 영주의 딸 따위가 귀빈석을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황후라면 마땅히 황제의 옆에 자리했겠지만 아직 후궁에 불과한 프리아는 황제가 따로 지정해 주지 않는 이상 상석에 앉을 권리가 없었다. 영주라고는 하지만 중앙에 진출할 능력이 없는 지방 귀족의 앞에서까지 굳이 불편한 연극을 펼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판단한 오웬이 후궁의 자리 배치를 물어 오는 시종장에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청아한 하프 소리를 듣고 있던 프리아가 눈을 들어 먼 곳에 앉은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을 대하던 황제의 태도를 보아 언제 어느 자리에서건 오만하고 무례한 자세를 고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곁에 앉은 귀부인과 그 딸들에게 시선을 맞추며 유연하게 대화에 응하고 있었다.

친화력이 넘쳐나다 못해 부담스럽기까지 한 바이런만큼의 화술은 아니더라도 어디 가서 성격파탄자 소리는 듣지 않을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였다.

노련한 황제와 불안한 청년. 어느 쪽이 본모습에 가까울 것인가. 단 한 번 만났던 그 청년을 프리아는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서 황제의 숨겨진 이야기를 듣고 싶다. 프리아 역시 그에게라면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봤자 촌뜨기들인 걸 유디스 님은 뭘 그렇게 신경 쓰세요?”

수도 태생인 자신의 출생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사벨이 최신 유행으로 맞춘 연회복을 과시하며 말했다.

“신경이라니. 누가 신경 쓴다고 그래요?”

해체된 자고새 구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며 유디스가 발끈했다. 폐하와 프리아 님의 사이가 그렇게 뜨겁고 열정적이라며 신입 시녀들 앞에서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황제는 한동안 제비궁을 찾지 않았다. 폐하의 관심이 다른 궁의 후궁에게 옮겨간 것은 아닐까 염려하던 차에 행궁 소식이 들려왔다.

늘 제비궁에서 뵈었으니 두 분 사이에 권태기가 온 걸지도 모른다. 행궁, 이것은 기회였다. 피서지에서 불타오르는 사랑, 프리아 님이 즐겨 보시는 낭만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벤트가 아니던가. 유디스는 늘 격무에 시달리는 폐하가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프리아 님과 함께 느긋하고 오붓하게 보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 * *

휴가라지만 부친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된 그날부터 한시도 쉬어본 적이 없는 오웬은 눈부신 경치로 유명한 이 별궁에서도 제대로 한 번 창밖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일정을 소화해 냈다.

젊은 황제의 업무 속도를 쫓아가느라 몸살이 난 시종장이 부디 휴식을 취하실 것을 황제에게 간곡히 권했다. 그간 격무에 시달려 왔던 시종들과 시녀들의 얼굴에도 화색이 번졌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 두고 외출을 허락하자 궁인들은 휴가를 만끽하기 위해 피서지로 유명한 산과 호수를 찾아 별궁의 문을 나섰다.

한가로운 오후다.

여유 시간을 미뤄 두었던 안부 편지를 작성하는 데 쓰겠노라, 마음먹은 오웬이 감춰 둔 편지지를 시종장의 옷장에서 찾아냈다. 어린아이였던 오웬이 청년으로 성장한 지금에 와서도 ‘황손에게 해가 되는 물품’을 숨겨 두는 장소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해상왕국으로 유명한 라센의 왕세자와 혼인해 현재는 왕비가 된 제스티나 황녀에게 보내는 편지다. 라센의 군사력은 얕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가능한 제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군사 협약을 끌어내기 위해 국왕 부부를 제국으로 초청해야 했다. 잠시 멈췄던 펜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꺅! 프리아 님!”

창밖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위험해요! 프리아 님!”

“어서 내려오세요! 프리아 님!”

프리아, 이제는 익숙해진 후궁의 이름이다.

차관의 기대와는 달리 이곳까지 데려온 의미가 없을 정도로 그간 후궁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틀째 밤에 열린 연회에는 후궁도 참석했을 것이나 근방 영주의 딸과 아내를 에스코트하느라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아무도 없나요? 도와주세요! 프리아 님께서!”

시끄럽군.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일단 소음부터 잠재워야겠다고 생각한 오웬이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꺄아악, 프리아 님!”

나무 아래에서 비명을 질러 대는 수행 시녀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장난기가 발동한 프리아가 일부러 휘청, 하고 떨어질 듯한 모습을 연출해 보였다.

“괜찮다니까. 이 정도 높이는 열 살 먹은 어린애라도 오를 수 있어.”

고작 집 한 채 높이에 불과한 떡갈나무였다. 시녀들이 모여 꺅꺅거리고 있기에 와 봤더니 솜털도 다 자라지 못한 아기 새가 바닥에서 빽빽거리며 울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살피자 우듬지 쪽으로 작은 둥지가 얹혀 있는 것이 보였다. 붙잡아 살펴보니 외관상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풀이 길게 자란 땅으로 떨어져 추락의 충격을 면한 것 같다.

‘어떻게 해요? 프리아 님.’

‘어미 새가 안 보여요. 아직 모르고 있나 봐요.’

‘저희가 데려가 키우면 안 될까요? 이대로 두면 너무 가엽잖아요.’

‘죽으면 어쩌죠?’

어떻게 하긴. 집으로 데려다주면 되지.

입고 있던 옷의 소매에 떨고 있는 아기 새를 집어넣은 프리아가 순식간에 뛰어올라 아래쪽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렸다. 발로 허공을 차올려 생겨난 반동을 이용해 날렵한 동작으로 더 높은 위쪽 가지로 매달려 올라간다.

“프리아 님! 뭐하시는 거예요?”

“위험해요! 내려오세요!”

“아니, 움직이시면 더 위험해요! 꺄아악!”

프리아가 올라가 있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며 당황한 시녀들이 발을 동동 굴러 댔다. 다람쥐나 원숭이도 아니고, 나무를 타다니. 이런 후궁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행여 떨어져 다치기라도 한다면 경을 치르는 것은 자신들이 될 것이다. 하필이면 도움 될 만한 시종들이 멱을 감겠다며 호수로 놀러나간 이 상황에 말이다.

“의자를 가져오겠습니다.”

개중 침착한 올가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제시했다.

“프리아 님! 의자를 가져올 테니 그 위에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계세요!”

움직이지 말라니 그럴 수는 없지. 고지가 바로 저기거늘.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참아.”

소매 속에서 떨고 있는 아기 새를 향해 프리아가 말을 건넸다. 여덟 살 무렵이었던가. 지금처럼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를 키우겠다며 숨겨놓고 몰래 벌레를 잡아다 먹인 적이 있었다. 유충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땅바닥을 헤집다 돌아온 프리아를 수상하게 여긴 기르가 다락 안에 숨겨 놓은 아기 새를 발견하고 당장 둥지로 돌려놓으라며 호통을 쳤다.

‘내가 키울 거야! 기르 미워!’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어린애가 무얼 키우겠다는 겁니까? 어미 새가 찾고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까? 당장 둥지로 돌려놓으세요!’

기르의 입에서 나온 어미 발언에 프리아가 눈물을 터트렸다. 어미 새가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미는 모두 자신의 어머니처럼 아이를 낳으면 떠나 버리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유모와 기르가 있어 외롭지는 않았지만 뒷문으로 찾아올 자신의 아이를 위해 간식을 몰래 챙겨 두는 주방 하녀를 볼 때나 말썽꾸러기라 구박하면서도 자식의 눈가에 붙은 눈곱까지 살뜰하게 떼어 주는 여인들을 볼 때면 이상하게 마음속이 허전하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치만… 까먹었단 말이야……. 어느 나무였는지.’

울먹이는 프리아를 달래 주지 않으면서 기르가 엄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프리아 님도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아실 나이가 되셨습니다. 전 도와드리지 않겠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 숲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잘 키워 보도록 하세요.’

며칠 후, 싸늘하게 죽어 있는 아기 새의 무덤을 만들며 울고 있는 프리아에게 다가온 기르가 다정한 손길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순간의 동정으로 어미 있는 어린 생명을 함부로 데려와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셨겠지요. 날개도 채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는 돌려보낸다 한들 집으로 돌아갈 힘조차 키우지 못합니다. 오늘의 교훈을 잘 기억하세요.’

도착했다.

가지의 갈라진 틈에 발을 끼워 넣고 한 팔로 기둥을 안아 몸을 지탱하면서 프리아가 시선 위로 솟아 있는 둥지를 향해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의 등장에 둥지 속의 새끼들이 주둥이를 크게 벌리며 귀 따갑게 삑삑거렸다. 소매에서 꺼낸 아기 새를 둥지로 돌려놓으며 프리아가 ‘잘 살아.’ 부드럽게 속삭였다.

올라온 김에 경치나 감상할까.

멀리 호수가 보였다.

‘칼리 호’, 호수 밑바닥에 사는 드래곤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는 전설 속 여신의 이름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고 했다. 물놀이를 나간 궁인들이 띄운 배가 낙엽처럼 호수 위를 떠가고 있다. 수면 위로 반사된 늦여름해가 비늘처럼 반짝이며 튀어 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머리 위에서 쏴아, 하고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무 위가 이토록 시원했던가. 그동안 잊고 살았다. 눈을 감자 마음은 그리운 고향 앞으로 달려갔다.

북쪽에 위치한 제국과는 달리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알훼니아의 땅 위에는 지금쯤 꽃과 나무가 무성하게 지면을 덮고 있을 것이다. 지천으로 열린 산실과山實果를 따 입에 넣으면 새콤하고도 달콤한 과일의 맛과 향이 입 안 가득 느껴지곤 했다. 소금기를 머금은 공기마저 그리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