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프리아에게 행궁에 동행할 것을 명한다.’
시종관이 가져온 통지에 리브론과 유디스가 손을 맞잡고 소리 높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행궁이라니 말만 들었지 실제로 가 보는 건 처음이에요.”
“장소는 어디가 될까요? 롤랑 계곡? 라렌느 강? 칼리 호수? 선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여름 궁전을 아끼셨다면서요?”
“마음의 안식처, 꿈의 궁전이라 부르셨대요. 한번 다녀오시면 다음 해 늦은 봄 무렵에는 황자님과 황녀님이 줄줄이 태어나시곤 해서 온 궁정에 아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올가 님은 뭐 들으신 것 없으세요? 돌아가신 폐하께서 직접 설계하신 별궁이라는데.”
호들갑을 떠는 두 소녀들과는 달리 차분하게 앉아 자수를 놓고 있는 올가에게 이사벨이 말을 건넸다. 유디스와 리브론이 유난히 친해진 까닭에 자연스럽게 남은 대화 상대는 제비궁 주인 프리아와 말수 적은 올가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었는데,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프리아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었기에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는 이사벨이었다.
“궁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병환이 심해지신 이후라 내내 자리보전만 하고 계셨거든요. 저도 풍문으로 들은 것이 다랍니다.”
능숙한 솜씨로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올가가 대답했다. 본궁에서는 침방 시녀로 일했으며 이부자리를 정돈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고 털어놓았던 그녀였다. 야무진 손재주는 자수뿐만이 아니어서 티타임이면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는 차를 우려내곤 했다.
“뭘 놓고 계신 건가요? 아까부터?”
보고 있자니 저까지 하품이 나오네요. 좀이 쑤시는지 지루한 표정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이사벨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물망초예요. 가장 좋아하는 꽃이랍니다.”
“프리아 님께 드리려고 만드시는 거죠? 기뻐하시겠네요. 솜씨가 훌륭하세요.”
무료를 달래기 위해 대화는 이어가지만 실상 올가의 자수에는 큰 관심이 없는 이사벨이 건성으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별말씀을요, 린드가르트 님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답니다.”
저 병엔 약도 없다. 틈만 나면 린드가르트 님 운운해대는 올가의 충성심에 빈정이 상한 이사벨이 은근한 비아냥을 섞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올가 님은 왜 제비궁으로 오신 건가요? 듣자하니 자원하셨다던데.”
“뵙고 싶어서요.”
형태를 갖춰가는 실매듭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지며 올가가 뒷말을 이어갔다.
“정말 너무너무 뵙고 싶었어요.”
완성될 손수건의 주인은 프리아가 아니다. 푸른 꽃의 꽃말을 속삭이며 올가가 바느질을 이어갔다.
나를 잊지 마세요. 폐하.
* * *
본궁을 빠져나온 마차의 행렬이 산길을 달리고 있다.
고작 며칠간의 행궁이라고는 하지만 품위를 중시하는 황제들은 휴가 때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시종을 데리고 길을 떠나곤 했다. 그간의 규모에 익숙해진 시종들이 산더미처럼 묶어 둔 가재도구를 본 황제가 천도遷都라도 하는 것이냐며 역정을 내지 않았던들 마차의 수는 지금보다 수배는 되었을 것이다.
황제가 탄 마차의 앞뒤로 시종과 시녀들이 나뉘어 배치되었다. 말에 탄 경비병이 행렬의 선두에서 길을 안내했다. 무장한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으며 의자며 화병, 테이블 따위를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시종들이 짐마차 위에서 더위와 씨름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황제의 수발을 담당하는 본궁 시녀들의 마차, 식재료가 상하지나 않을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땀을 닦고 있는 조리부 시종들의 마차, 음유 시인들과 광대, 악사들이 자리를 잡은 중형 마차와 목록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는 시종장과 시종관의 마차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후궁의 짐이 실린 마차가 조금 뒤처져 수행 시녀들의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짐을 줄이려는 프리아와 싫다며 버티는 수행 시녀들로 인해 출발이 늦었던 탓이다.
가장 크고 화려한, 황실 전용 마차에는 오웬과 프리아가 앉아 있었다. 한때는 폭넓은 드레스를 차려입은 후궁들을 몇이나 싣고 수십 차례 행궁길을 오갔던 마차다. 사내 후궁 혼자 앉아 있는 건너편 자리가 유독 휑하게 느껴진다.
전격 행궁이라는 전대미문의 이벤트에 흥분한 수행 시녀들이 법석을 떨며 프리아를 꾸며 주었기에 프리아는 화려한 옷에 싸여 숨도 못 쉴 정도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녀들의 자존심 싸움에 아침부터 몇 번이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했는지 모른다.
‘아니에요, 프리아 님. 프리아 님은 붉은색이 잘 받으신다니까요.’
‘계절을 고려한다면 하늘색이죠. 붉은색이라니 보기만 해도 덥지 않아요?’
‘아무래도 처음 입으셨던 것으로 갈아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오래 앉아 계실 텐데 가능한 주름이 덜 가는 소재를 택해야죠.’
‘통기성이 나쁘다니까요? 리브론 님은 어쩜 그렇게 센스가 없으세요?’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할지. 갑자기 주인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혼란을 겪고 있는 애완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불편한 것은 옷차림만이 아니다. 그 밤 이후 열흘 만의 재회였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황제의 태도에 역시 그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는데.
“……”
시선을 돌릴 적마다 따가운 눈빛으로 따라붙으며 황제가 프리아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차 안에 저랑 나밖에 없는데 뭐, 감시할 게 있다고.’
무안해진 프리아가 애써 오웬의 시선을 외면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 궁전까지 앞으로 한나절, 남은 길이 암담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내내 창밖만을 바라보며 후궁은 말이 없었다. 언젠가 동행했던 선황제의 마차 안에서는 여러 후궁이 조부 옆에 붙어 앉아 ‘폐하, 경치가 참 좋사옵니다.’ ‘폐하, 배가 고프지는 않으신지요?’ ‘폐하, 소첩을 불러 주시니 기쁨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듯하옵니다.’ 입에 발린 대사를 경쟁하듯 떠들어 대곤 했었다.
사내 후궁이 돌변해 자신에게 아양을 떨어댄들 달갑지는 않겠으나 꿀 먹은 벙어리인 양 가만히 있는 것 또한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해의 이동에 따라 숲 그림자가 점차 길어지며 창에 붙은 후궁의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아름다운 얼굴이기는 했으나 자신의 상념 속으로 불쑥 나타나던 그 모습과는 달랐다.
이리 놓고 보아도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 사내 후궁이 이 자리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 간다 해도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시간만 낭비했다, 그리 여긴 오웬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져 멀리서도 빛나는 까닭에 ‘달의 신전’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여름 궁전이었다. 달빛을 받은 궁전이 교교한 빛을 뿌리며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했다.
짐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청소를 하랴, 가구 배치를 새로 하랴, 식사 준비를 하랴, 정신없이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 사이에서 세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궁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프리아 님, 이것 좀 보세요! 분수대예요!”
“어쩜, 훌륭하기도 해라! 올가 님도 좀 내려와 보세요.”
들떠 있는 다른 수행 시녀들과는 달리 프리아의 곁을 지키며 짐 정리를 하고 있던 올가가 정원의 소녀들을 향해 말없이 웃어 보였다. 한두 살의 나이차가 이토록 큰 것일까. 매사에 경거망동하지 않고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자신의 새 수행 시녀가 프리아는 어딘지 염려스러웠다. 적녀가 아닌 서녀로 태어나 정실 자녀들의 눈치를 보며 자라난 탓일까. 지나치게 조용하고 순종적인 그녀였다.
“피곤하지 않아? 정리는 나중에 해도 되니 잠시 쉬는 게 어때? 차라도 마시면서.”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문 쪽을 향하는 올가를 프리아가 돌려세웠다.
“시종장님이 곧 가지고 오실거야.”
도착 직후, 저녁 만찬 준비에 시간이 걸릴 것이니 먼저 다과를 준비해 올리겠다며 폐하와 함께하시겠냐고 시종장이 물어왔었다.
“폐하께서도 곧 올라오실 테니.”
“폐하께서요?”
순식간에 올가의 표정이 밝아지며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처음으로 올가에게서 또래 소녀다운 반응을 끌어낸 프리아가 놀란 표정으로 올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기사들과 함께 궁 밖으로 사라졌던 황제가 시종장을 대동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자신의 소유가 된 여름 궁전의 경비를 점검하기 위해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고 온 참이다.
바깥에서 분주하게 천막을 설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가 기간 동안 즐길 가벼운 여흥거리를 마련했다더니 그 준비에 한창인 모양이었다.
“궁전의 뜰에서 자란 포도이옵니다.”
쟁반을 들고 온 시종관이 빈 테이블 위로 찻잔과 과일이 담긴 접시를 늘어놓았다. 연둣빛을 띤 포도가 송이 가득 탐스럽게 달려 있다. 홍차가 담긴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오웬이 후궁의 뒤에 서 있는 낯선 시녀를 발견하고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늘 자신을 보면 허둥대며 호들갑을 떨곤 하던 시녀 아이가 아니다. 황제의 눈길에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해 오는 올가에게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은 오웬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여인을 다시 살폈다.
“새롭게 프리아 님의 수행 시녀가 되신 레이디입니다. 올가 님 외에도 두 분이 더 계십니다.”
눈치 빠른 시종장이 황제에게 여인의 정체를 알렸다.
“한동안 본궁에 계셨다 하니 낯이 익으실 수도 있습니다. 유디스 님께서 혼자 힘으로는 프리아 님을 불편 없이 모시기 힘들 것 같다고 하시기에 증원해 드렸습니다. 재정 대신께서 허가해 주셨지요.”
“그러한가?”
시종장의 대답에 여인에게서 흥미를 잃은 오웬이 앞으로의 일정을 물어왔다.
“근방의 기사들을 모아 가벼운 궁술 대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만 폐하께서도 여흥 삼아 참가해 보시는 건 어떨지요? 저녁에는 조촐한 연회도 계획하고 있으니 우승자를 초청하여 치하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시종장과 황제의 대화를 듣고 있던 프리아가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궁술 대회, 사냥, 영지 시찰. 사내 후궁이라는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자신으로서는 참가할 만한 행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예를 따로 익히지는 못했기에 후궁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출전할 수는 없겠으나 또래 기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마시며 친구가 될 수는 있지 않겠는가. 황제와 시종장의 앞인지라 ‘제비궁 주치의 기르’라는 거침없는 신분으로 가장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버터 바른 음유 시인 바이런의 존재마저 그리워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