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리타 (35)화 (36/237)

“그건 기르 그대의 뛰어난 미모와 머리색 때문이었을 것이오. 알다시피 제국인들은 갈색 머리가 대부분이라 눈동자 색 또한 갈색이 많지 않소? 그대처럼 밝은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지닌 미인이라면 제국인들은 누구나 알훼니아를 떠올릴 것이오. 금발벽안의 미인이 많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거든.”

“그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요. 알훼니아에도 실제로는 갈색 머리가 더 많다오.”

금발 머리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성장기가 지나면 갈색에 가깝게 변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제국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색이 다소 어두워진다 하더라도 금발에 가깝다 생각한다오. 그러나 그대처럼 순도 높은 금발은 흔치 않지. 한번 만져 봐도 되겠소?”

손을 내민 바이런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하며 프리아가 시선을 다시 요난나의 초상으로 돌렸다.

“요난나와 황제 사이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 왜, 그런 거 있지 않소? 첫사랑이라든가.”

프리아의 말을 들은 바이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럴 일은 없지.”

“……그러하오?”

세간에 알려진 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그런 감정은 당사자 혼자만 마음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어두워지는 프리아의 얼굴을 본 바이런이 품속을 뒤지더니 불쑥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 마음의 간식.

“이게 뭐요?”

“요즘 유행하는 음화淫畵라오. 모델이 누군지 알아보시겠소?”

“음화? 어찌 그런 망측한 것을……”

금발의 사내가 그려진 음화. 옷을 입었다고 해야 할지 벗었다고 해야 할지,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만을 가렸다. 푸른 눈은 저 먼 곳을 쳐다보며 게슴츠레하게 뜨여 있고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사내가 호화로운 드레스와 요란한 장신구를 착용한 채로 치맛자락을 끌어 올려 민망하게 벌린 허벅지를 보란 듯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으며 등을 보인 검은 머리 사내가 금발 머리 사내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보석 박힌 장신구를 밀어 넣고 있는 수위 높은 묘사까지 있었다. 허리를 비튼 사내의 얼굴 주위로 대사까지 적혀 있었다.

‘더 큰 것을! 주시옵소서! 폐하.’

‘큰 것.’ 보석의 크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되오! 음해요! 나는, 아니 제비궁 주인께서는 이렇게 마녀처럼 생기지 않았다오!”

프리아가 외쳤다. 바이런도 수긍했다.

“맞소, 음해요. 폐하도 이런 명랑한 놀이를 즐기실 분이 아니지.”

“……그걸 그대가 어찌 아시오?”

흥분하던 프리아가 바이런의 말에 바짝 귀를 세웠다. 설마, 그 녀석 잠자리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궁내에서 첫째가는 숙맥을 골라야 한다면 단연 폐하를 택해야 할 것이라고 답하겠소.”

“숙맥은 아니지 않소?”

“폐하께서 총각 딱지를 떼긴 하셨는데 내가 보기에는 딱지만 뗐지 영 색사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말이오.”

불경한 말이니 그대는 비밀을 지켜 주시오. 어차피 저와 프리아밖에 없거늘 목소리를 낮춘 바이런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 양반은 고지식해서 마음이 가야 몸이 간다오.”

“……아니 뭐, 그런 건 당연한 것 아니오?”

“그게 맞는 거지만 아닌 사내들도 많다오. 폐하 같은 순정파는 본 적이 없거든. 순수하신 분이지.”

“……순수? 어느 나라 폐하를 말하는 것이오? 설마 제국은 아니겠지?”

그 순수한 놈이 글쎄, 몇 번이나 하고 간 줄은 아시오?

썩은 표정을 한 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바이런이 진정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 편견이 깊구려. 기르 그대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젠가 그대도 폐하를 다시 보게 될 날이 올 거라 믿소.”

어이, 폐하. 무슨 생각하시나?

시종장이 심혈을 기울여 우려낸 찻물이 식어 가는 것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오웬을 향해 바이런이 손을 흔들었다. 눈앞까지 와 몇 차례 손짓을 왕복하고 나서야 얼굴을 찌푸리는 사촌의, 그럼에도 수려하게 보이는 미간의 주름을 바라보며 바이런이 “씨 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속엣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뭐라고?”

뜬금없는 바이런의 핏줄 발언에 오웬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근래 들어 부쩍 본궁 출입이 잦아진 바이런에게 그러지 않아도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던 참이었다. 수 시간 전에 등청했다는 자가 왜 정작 할 일이 쌓인 집무실 쪽으로는 걸음하지 않는 것인가.

“돌아가신 고모부며, 마리안 고모님을 참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양친의 언급을 들은 오웬의 눈매가 대번에 사나워졌다. 친부모니 닮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굳이 상기시키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그거야. 봄꽃마저 얼어붙게 만들 것 같은 그 냉랭한 시선. 고모님이 그렇게 쏘아보시면 나도 모르게 무릎 꿇고 엎드려 없는 잘못이라도 만들어 내 고해 버려야 할 것 같단 말이지.”

계절에도 맞지 않는 봄꽃 타령을 해 대는 것을 보니 또, 사랑에 빠졌군. 안 봐도 훤한 전개에 오웬이 검토 중이던 서류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던 이야기의 십 분의 일도 꺼내지 못하고 단박에 무시당한 바이런이 “폐에하, 백성의 소리를 듣지 않으시겠단 말입니까아?” 말꼬리를 늘려 너스레를 떨어 가며 책상 모서리에 고개를 묻었다. 숙인 얼굴 아래에서 웅얼웅얼, 능청스러운 불평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황가의 초상화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안내만 하려다 내친김에 나도 펼쳐 봤거든. 후대로 갈수록 인물이 훤해지더라고. 잘나신 분들이 절세미인만을 쏙쏙 골라 취했으니 당연한 결과지 뭐야. 폐하께서 저 혼자 잘나서 이런 미남으로 태어난 게 아니란 뜻이지. 고모님 젊으실 적 초상도 보았는데 참 고우시더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길어지는 바이런의 사설을 끊어 낸 오웬이 본론을 요구했다.

“최근에 알게 된 사람이 있어. 자신이 예쁘다는 걸 잘 알고 그 매력을 발산하는 귀여운 아가씨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있는데. 그 점이 참 매력적이란 말이야. 칭찬을 해 줘도 되레 화를 내고. 말투는 까칠한데 표정은 또 무구하고. 순진한 맛도 있는 반면 아찔한 잔가시도 갖추고 있으니. 품에 안았다 싶으면 순식간에 도망치고 없기도 해. 처음 그를 만났던 순간이 아직도 눈 감으면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려. 영락없는 달빛의 정령이라고만 생각했거든. 이대로 홀려 요정의 나라에 가게 되는 걸까. 돌아오면 백년 세월이 흘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했는데. 사람이더라고. 얼마나 다행인지. 한순간에 이름 두 글자만을 남기고 사라져 어디에서도 자취를 찾을 수가 없었어. 그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한 편의 시와도 같아서 소네트라도 읽으며 그를 추억하려고 장서관에 갔거든. 그런데 기적처럼 하늘에서 천사가 떨어진 거야. 그도 나를 찾아 헤매었던 거지. 우정을 가장해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이토록 강렬한 떨림은!”

아, 난 빠져 버렸어!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연극적인 감탄사로 긴 넋두리를 마무리한 바이런이 힘이 빠진 듯 소파 위로 스르륵 내려앉았다.

갈증을 호소하는 바이런을 한심하단 표정으로 바라보며 시종장이 감로수가 담긴 은주전자를 내왔다. 바이런이 머물렀던 연애의 장마다 주옥같은 명대사가 자취로 남아 음유 시인들에 의해 구전되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어쩜 저리 숨도 안 쉬고 낯간지러운 말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저것도 참 재능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어.”

나 정말 심각해, 폐하. 고개를 든 바이런이 울상을 지었다.

* * *

또다.

어느새 또 ‘그’ 생각에 잠겨 있던 자신을 깨달은 오웬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낭패다. 쥐고 있던 펜에서 잉크가 흘러 빈 서명란을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공업이 발달한 트루바니아 공국으로 제국의 수련공을 보내 일정 기간 도제 과정을 거치게 해 노동력과 기술 이전을 교환할 것을 제안하는 중요 문서였다.

업무 중 잡생각에 정신이 팔리다니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인가. 아니면 간교한 사내 후궁이 사악한 주술이라도 부리고 있는 걸까.

사내 후궁의 처소에서 눈을 떴던 그날 이후로 자꾸만 오웬의 상념 속으로 후궁 프리아가 찾아왔다. 이마 위로 끼치던 후궁의 따스한 숨결. 후궁의 피부를 물들인 자신의 입술 자국. 허벅지 안쪽으로 남은 짙푸른 멍들. 꼭 끌어안으며 잠투정을 늘어놓던 후궁의 느릿한 목소리. 따뜻했던 품이 순식간에 떠오르며 오웬을 당황케 했다.

“……”

최종 승인만을 기다리며 단상 아래서 대기하고 있던 상공업 차관이 피로한 표정으로 눈두덩을 문지르는 황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일국의 황제라는 버거운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즉위한 이래로 빈틈 한 번 내보이지 않았던 황제가 아니었던가. 아침저녁 나절로 찬 바람이 불어오기는 하지만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땀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아직 무더운데 이런 날에도 격무에 매여 집무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젊은 황제가 차관은 못내 안쓰러웠다.

“다시 작성해 주겠나?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

망친 서류의 재작성을 이르는 황제에게 곧 그리하겠노라, 시원스레 대답한 차관이 다음 국무회의에서 제안할 묘안을 떠올렸다. 아끼는 애첩과의 행궁. 황제에게 이보다 좋은 휴가 선물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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