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몸을 날리는 것을 참 좋아하는구려. 하늘에서 천사가 떨어진 줄 알았소.”
“주의력이 부족한 탓일 뿐이오. 도와준 건 고맙게 생각하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 알았다면 매일 들렀을 것이오. 연구를 위해 온 것이오?”
“그, 그렇소! 제국의 높은 의술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오.”
“그런데 여긴 낭만소설이 주력인 서가인데 길을 잘못 든 것이오?”
바이런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프리아가 진땀을 흘렸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기엔 이미 골라 놓은 이야기책들이 사다리 아래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제, 제비궁 주인께서 이야기책을 좋아하시기에 장서관에 온 김에 몇 권 가져다 드리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내가 한 권 추천해 드려도 되겠소? 여기 아름다운 소네트가 있구려.”
바이런이 가까운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금박으로 새겨진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의 미로』.
잠깐, 잠깐 기다……. 프리아가 저지하기도 전에 바이런이 영롱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그대는 꽃, 나는 나비. 그대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왔다네. 나는 작은 꿀벌, 그대의 꽃물에 취해 잠이 든다네. 나 여기 있으니 문을 열어 주오. 그대의 암술에 나의 수술을 닿게 하리라. 그대는 파랑새, 내 품으로 날아오라. 나라는 새장 속에서 안식을 찾으리.”
뭐야, 결론이 감금이야?
피폐물은 썩 좋아하지 않는 프리아가 이어지는 시 낭송을 제지했다.
“추천 감사하오. 참고하겠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이런이 다시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참 좋지 않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 어디 가서 서로의 수술을…….”
“일단 좀 내립시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 황급히 바이런의 품에서 뛰어내린 프리아가 바이런을 잡아끌어 서고 안쪽으로 데려갔다.
“여기서 말이오? 보기보다 화끈하시구랴. 그럼 우리 어서 서로의 수술을 수정…….”
“무슨 소릴 하시는게요? 신성한 장서관에서.”
“모르고 계셨소? 유명한 밀회 명소라오.”
이래서 후궁 출입을 금지시켰나? 인적이 드문 장서관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한들 알 수 없는 사각지대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기르 그대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스물넷이라오.”
“난 스물다섯이오. 나이도 비슷한데 우리 친구가 되면 어떻겠소?”
“친구?”
“그렇소. 친구.”
“친구라면 같이…….”
망설이던 프리아가 입을 열었다.
“같이?”
“같이… 책도 보고?”
“그렇소.”
“같이 산책도 하고, 같이 차도 마시고, 같이 토론도 하고 나라님 흉도 보고?”
“기르, 그대.”
활짝 웃던 바이런의 얼굴이 한순간에 흐려졌다.
“어지간히 친구가 없었나 보오.”
“……친구가 왜 없소! 특히 이성 친구들이 많다오.”
거짓은 아니다.
“연령대도 다양하다오. 하나같이 매력 넘치고 활기찬 분들이라오.”
5세에서 18세까지. 이성의 무리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내는 프리아가 바이런의 동정에 발끈했다.
“그건 나와 같구려. 이제 보니 숨은 실력자셨군. 그래도 나에게 자리 하나를 내어 주지 않겠소? 낯선 제국에서 불편한 일도 생길 수 있으니 그럴 때 나를 불러 준다면 무엇이든 도와드리리다.”
돕겠다 자청하는 바이런의 말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의정 대신 대리 양반,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만.”
“얼마든지. 하나만 말고 백 가지쯤 물어보시오.”
“특수 서고에 있는 책을 열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상부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오?”
“그렇소. 상부의 허락이 필요하오.”
아껴둔 청원을 여기에 쓸 걸 그랬나. 그러나 당사자에게 어찌 너희 집 호구 조사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하겠는가.
어두워지는 프리아의 얼굴을 본 바이런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은 내가 든든한 뒷배를 가지고 있어서 그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소.”
“그 말이 진정이오? 고위층에 연줄이 닿아 있는 것이오? 하긴 의정 대신의 대리라 하였으니 뒷배가 있을 만하오.”
“그보다 높은 뒷배라오. 친척을 잘 만났소.”
“친구합시다!”
반색하며 프리아가 바이런의 손을 맞잡았다.
외간 사내와 접촉하면 안 된다는 유디스의 경고가 있기는 했지만 후궁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기사 영웅담에서나 보았던 사나이들의 뜨거운 우정을 체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프리아의 얼굴이 환해지자 바이런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왕이면 절친으로 합시다. 앞으로 그대의 1순위는 나란 걸 잊지 마시오. 이래 봬도 자존심이 꽤 높아서 살면서 그 흔한 세컨드 취급 한 번 받아 본 적 없소이다.”
“낙찰이오.”
“기쁘구려.”
“나의 절친, 첫 번째 임무요. 황실록을 구해 주실 수 있겠소?”
“권력의 달콤함을 맛볼 준비를 하시구려.”
장서관의 지하로 프리아를 데려간 바이런이 접수처에서 받아 온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열쇠가 아니라오.”
문을 연 바이런이 먼저 들어가라며 프리아에게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걸린 인물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반갑지 않은 단 한 사람, 황제의 초상화였다.
“어느 시기의 황실록을 보고 싶은 것이오? 절친?”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고 싶소. 선황제까지 나와 있는.”
“최근이라… 여기 있구려.”
서가로 걸어간 바이런이 제목을 살핀 끝에 한 권을 골라 프리아의 눈앞에 꺼내놓았다.
“이게 책이오? 무기오?”
손목이 아플 정도로 두꺼운 황실록의 페이지를 넘기며 프리아가 탄식했다. 글씨도 빽빽하게 적혀 있어 원하는 시기를 바로 찾아내기 어려웠다. 한 장 한 장 주의 깊게 살피며 책장을 넘기던 프리아가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책을 뒤집어 거꾸로 넘기기 시작했다. 즉위 53년 황태자 아론 사망, 즉위 50년 제1황손 아서 사망, 즉위 50년 황손비 출산…….
프리아는 황실록을 내려놓고 서가를 뒤져 황조의 초상을 모은 화집을 찾아냈다. 선황제와 그의 황후. 선선대의 황제와 황후, 책장을 계속 넘겨도 황제 부부의 초상화 외에는 실려 있지 않았다.
“다른 황족들의 초상은 어디에서 볼 수 있소?”
“황족들이라 함은 어떤?”
“죽었다는 전 황태자의 초상화 같은 것 말이오.”
“아, 그거라면 여기에.”
육중한 책을 몇 권이나 들추어낸 끝에 바이런이 안쪽에 숨겨져 있던 화집을 꺼내 주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들추어 본 이가 없었던 듯 책장이 습기로 달라붙어 있었다. 묵은 먼지 냄새를 풍기는 화집을 들추자 전 황태자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 우아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황제와 매우 닮았지만 표정만은 더 완고해 보이는 청년의 초상이었다. 죽은 애첩의 뒤를 따라 세상을 등질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으나 황태자의 뜨거운 정열을 초상이 감히 담아내지 못한 까닭이리라.
“황족이 아닌 사람의 초상도 있소?”
“이를테면?”
“이를테면…….”
주위를 살핀 프리아가 바이런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황태자의 정부라든가. 요난나라고 빼어난 미인이 있었다고 들었소만…….”
프리아의 입에서 나온 요난나란 이름에 바이런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미인이기는 했지. 요난나에 관심이 있으시오?”
“동향이라 그저 한번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 그러오. 안 되겠소?”
“선황께서 모두 불태우라 명하셨다오.”
“볼 수 없는 것이오?”
“공식적으로는. 하지만.”
“하지만?”
“말했듯이 나는 힘 있는 친척을 두었기에.”
말을 멈춘 바이런이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프리아의 손을 끌어 이번에는 복도 끝에 있는 다른 서고의 문 앞으로 데려간다.
“여긴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 골칫거리들을 모아 놓은 창고요.”
‘이래서 세상은 뒷배가 있어야 한다고 하나 봐요.’
유디스의 말이 맞았다. 든든한 뒷배를 둔 바이런의 힘을 빌리자 궁정 곳곳 가 보지 못할 곳이 없었다. 본인 역시 최고의 뒷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프리아가 존경의 눈빛으로 바이런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오.”
어지러이 널려 있는 잡동사니들 속에 요난나의 초상화가 방치되어 있었다. 한데 묶여 있는 액자의 끈을 잘라 내자 먼지 쌓인 초상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수려한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연못 빛 눈동자와 붉은 달빛의 머리카락.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에 그늘이 깃들어 있다. 몸에 걸친 화려한 장신구들이 눈에 띄게 강조되어 있어 선물한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곳을 떠나온 이가 몇 해 전까지 이 궁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한 장의 초상만으로는 무엇도 알 수가 없다. 무심한 표정의 동향 앞에서 프리아는 할 말을 잃고 그저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 자와 닮았소?”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
“그런 거 말고 말이오. 닮은 구석이 있소?”
“굳이 따지자면 둘 다 금발이라는 점? 다만 이쪽은 도발적인 적금발이고 그대는 꿀처럼 녹아 흐르는 내 취향의 금발이오.”
작작 좀. 잠시 바이런을 쏘아본 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말고 더 없소? 이목구비가 닮았다거나.”
“그대가 더 내 취향이요.”
실없는 바이런의 대답에 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어볼 대상을 잘못 골랐다.
“절친, 왜 그런 걸 묻지?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오?”
바이런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은 프리아가 요난나의 초상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초상은 군데군데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 위로 핀 곰팡이 꽃은 닦아 내도 번지기만 할 뿐이었다.
“사서가 나를 보자마자 알훼니아 출신이라고 금방 알아보았다오.”
그리고 황제는 나를 요난나로 착각했지.
“그뿐이오.”